예수님과(科)

2018.01.06 08:42

박상형 조회 수: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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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科)(고전1:26~31)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을 때에, 

그 처지가 어떠하였는지 생각하여 보십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26)



내가 부르심(구원)을 받았을 때의 처지를

생각해 보라고 한다.

무엇을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일까?



그 때의 처지와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는 것일까?



내 처지를 살펴보기 전에 살펴보아야 할

다른 처지가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태어나심에 대한 처지이다.



빛나는 별을 따라 온 그래서 궁궐에 찾아들어온 

동방박사 세 사람을 당혹하게 만들었던 

그 처지 말이다.



여태까지 행한 것으로 보아서는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줄 구세주가 

거의 확실해 보이는데 



이제까지 괜찮아 보이는 것 같다가

결정적인 마지막에 십자가에 매달림으로

모든이의 소망을 단숨에 끊어버리고

그를 추종하던 제자들까지 당황하게 만든 

그 처지 말이다.



그렇다면 내가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처지는

나를 부르신 이의 처지와 비교해보면 어떤가? 

동일한 가? 아니면  다른 가?

아마도 이것을 생각해 보라는 것 아닐까?



그래서 같다면 다행이지만

그리고 그 형편을 따라 믿음생활을 하면 되지만

만약 다르다면 그리고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도 

다르게 생각하며 믿음생활 하고 있다면 

이제라도 헛수고하지 말고 딴데 가서 알아보던지

아님 원인파악 들어가던지 하라고 말이다.



기독교는 부자여서는 안된다.

또 무엇을 가득 쟁여놓아서도 안된다.



가난한 모습으로 오셨고

가지고 있던 것 다 퍼주고 더우기 입고 있던

옷까지 나누어 주고 가신 예수님을 따른다면

말이다.



또한 난 가난하다고 안심해야 할 일도 아니다.

퍼 주지 못하는 가난함은 나의 게으름 탓일 수 있다.

퍼 주고 가난해짐 이것이 기독교의 기본이고

진수이다. 



지혜를 부끄럽게 하려고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을 택하셨는데(27)

택함 받은 자가 세상의 지혜를 따르고 있다면,



잘난 체하는 것을 없애려고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아무것도 아닌 것들을 택하셨는데(28)

택함받은 자가 잘난 체 하고 있다면,



주안에서 지혜와 거룩함을 자랑해야 하는데(30)

세상에게 건물의 크기와 숫자를 자랑하고 있다면

나의 부르심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난 이상하게도 큰 교회가 체질에 맞지 않는다.

대형 교회를 비방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상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교회 건물도 없고 성도 수

채 열 명이 안되는  초소형 교회를 다니고 있다.



그런 소형교회 목사님이 늘 하는 말이 있다.

성도 300명 이상이 되지 않는 교회를 지향한다는,

바르고 느리고 질적으로 가겠다는,

우리가 증인이라고 하면서...

아직 30명도 안되는데 웃기다.



해서 성도인 나도 웃기는 말 한 마디 한다.

300명 이상되면 저 다른 교회로 갑니다. 



나는 목사님과고 목사님도 내 과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예수님과 이다.

(2018.01.06.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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