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희망으로 바꾼 '한국의 모세' 채규철 선생

▲ 두밀리자연학교 채규철 교장 <소나기 30분>
ⓒ 도서출판 선
어느날, 그대에게 뜻밖의 자동차 사고가 나 온몸에 불에 타서 숯검정으로 변해 얼굴이 도깨비처럼 흉측한 모습으로 변해 목숨마저 잃을 지경에 처한다면 어찌하겠는가. 행여 살아나더라도 잃은 귀를 어쩌지 못하고, 한 눈은 의안을 해야 하고, 손은 갈고리처럼 휘어진다면 어찌하겠는가.

여기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국내 최고의 대학을 마친 뒤 덴마크와 인도로 가서 유학까지 마치고 돌아와 찬란한 희망의 날개를 막 펼치다가 자동차 사고로 하루아침에 날개가 꺾여버린 사람이 있다.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한국의 모세'로 불리는 두밀리자연학교 채규철 교장, 이분이 바로 그 처참한 운명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채규철 교장은 그 모진 고통 앞에서도 결코 무릎을 꿇지 않았다. 교통사고가 나는 1968년부터 1982년까지는 서울 청십자의료협동조합 전무를 맡았으며, 1970년에는 간 질환자진료사업인 '장미회'를 창립했다. 이어 1975년에는 사랑의 장기기증본부를 창립해 지금까지 이사를 맡고 있으며, 1986년에는 두밀리자연학교를 세워 지금까지 교장을 맡고 있다.

게다가 지금 그는 그 바쁜 일과 불편한 몸에도 새마을 연수원 등 수많은 교육현장에서 삶을 주제로 한 강의를 하고 있다. 바로 그런 까닭에 가까운 사람들은 그의 기적을 모세에 비유해 '한국의 모세 채규철'로 부르고 있으며, 아이들은 철없이 'ET할아버지'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죽어도 채규철은 살아야 한다"

"60여 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랑곳없이 매일 새벽에 차디찬 교회의 한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나의 아들 철이를 한국의 모세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던 지난해(2005) 돌아가신 어머니의 기도를 잊을 수 없습니다." - '머리글' 몇 토막

'채규철의 멋, 아름다운 얼굴 그리고 삶 이야기'라는 덧글이 붙은 <소나기 30분>(도서출판 선)은 두밀리자연학교 채규철(69) 교장의 일그러진 삶의 자화상이자 그 모진 운명을 이겨낸 인간승리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다.

채규철 교장은 머리말에서 "1970년 5월 24일 부산에 있는 아들 진석이의 생일 선물을 사러 갔다가 지병이었던 결핵으로 몇 번의 각혈을 하다 매정하게 떠난 아내 성례의 핸드백 속에 간직되었던 한 장의 유서 '나는 죽어도 채규철은 살아야 한다'고 한 그녀의 마지막 유언을 잊을 수 없다"고 고백한다. 마치 그 유언 때문에 오늘의 채규철이 살아있는 것처럼.

옛 청십자의료협동조합 대표이사를 지낸 장기려 의학박사는 추천의 글에서 "채규철은 명석한 머리, 지혜의 눈, 정의감에 불타는 심장, 용감하게 실천하는 의사, 어학의 재능 등 사람으로서 교만해질 수 있는 요소들을 풍성하게 지니고 있다"며 "(만약) 사고를 당하지 않았더라면 세상에서 어떻게 쓰임 받을지 불문가지라 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 '나의 아들 철이를 한국의 모세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던 지난해(2005) 돌아가신 어머니의 기도를 잊을 수 없습니다.
ⓒ 도서출판 선
새로운 인생길 열어준 헬렌켈러의 <3일 동안만 볼수 있다면>

"내게는 외동딸이 하나 있다. 이름은 송화, 채송화. 이름도 예쁘지만 얼굴도 이름 못지않게 예쁘다. 얼굴이 예뻐서인지 몰라도 매일같이 동네 꼬마 총각들이 데이트하러 우리 집에 왔다. 보통 날은 괜찮았다. 내가 아침 일찍 출근했다가 늦게 귀가하니까.

그런데 어느 일요일, 내가 집에 있을 때였다. 송화와 동네 꼬마들이 한참 신나게 뛰어 놀고 있다가 우연히 내가 화장실 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나를 보자마자 꼬마들은 얼른 신발을 찾아 신고 도망을 쳤다. 그 다음부터 이 꼬마들이 다시는 우리 집에 놀러오지 않았다." - 97쪽, '3일 동안만 볼 수 있다면' 몇 토막


왜 아이들이 채규철의 모습을 딱 한번 보고 혼비백산한 뒤 발길조차 딱 끊어버렸을까. 이에 대해 채규철은 "꼬마들의 눈에는 내 모습이 도깨비나 호랑이로 보였나 보다"라며 껄껄 웃는다. "그래도 내 얼굴은 30여 회나 성형수술을 거쳐 만든 걸작품"이며, 600만불 사나이처럼 많은 돈은 들어가지 않았지만 최소한 6000만원은 들어간 얼굴인데 말이다.

사실, 채규철은 성형수술을 할 그때 흉측하게 일그러지고 불에 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얼굴보다 시력 걱정을 더 많이 했다. 그가 1968년부터 1970년까지 2년여의 입원을 마치고 병원을 나섰을 때 하나밖에 남지 않았던 눈의 시력이 1미터 앞을 볼 수도 없을 정도였다. 다른 것은 다 괜찮은 데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이 더 고민스러웠다.

그때 그에게 새로운 인생의 길을 열어주고 삶의 용기를 준 책이 한 권 있었다. 헬렌켈러의 <3일 동안만 볼수 있다면>. 그는 잘 보이지 않는 한쪽 눈으로 그 책을 틈틈이 읽고, 주치의들이 보내온 '마지막 남은 시력을 상실하지 않도록 수술을 잘해야 한다'라는 편지 내용들을 꼼꼼하게 챙기며, 마침내 길을 찾을 수 있을 정도의 시력을 회복한다.

채규철의 아내 정희는 제자이자 천사

"내 아내 정희는 비즈니스(business) 우먼이 아니고 비지(busy) 우먼이다. 아내의 비즈니스(busyness, 바쁨)는 아침 일찍부터 시작된다. 화상으로 손이 갈고리 같이 구부러져서 세수도 못하는 내 모든 뒷바라지를 해야 하고, 의안인 한쪽 눈을 식염수에 소독하여 다시 넣어 주어야 하며, 와이셔츠 단추를 채우지 못하니까 그것도 해주어야 한다,

이렇게 전반전 일들이 끝나면 식사하고 우리의 중반전이 시작된다. 아내는 매일 같이 내게 오는 강의 청탁 전화를 받는 일 외에도 잡다한 일 처리를 하는 매니저가 된다. 중반전이 지나면 후반전이 시작된다. 155cm의 작은 체구로 코란도 운전기사가 되어 내가 강의하는 곳까지 운전해서 나를 데려다 주어야 한다. 그 다음엔 종반전," - 123쪽, '내 아내 정희' 몇 토막


흔히 후반전이라고 하면 어떤 일이 마무리되는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글쓴이의 집에서는 종반전이 또 남아 있다. 그의 아내 정희는 종반전에서 그를 포장마차까지 안내를 해야 하고, 교회 여신도 일까지 해야 한다. 그리고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의 잠자리까지 돌봐 주어야 한다. 그래야 하루 일이 모두 끝난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의 아내는 매주 금요일에는 구역예배를 인도하는 일을 해야 하고, 주말이면 가평에 있는 농장에 가서 김을 매주고 물도 주어야 하며 벌레도 잡아야 한다. 그리고 가끔 가까운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오면 음식대접을 위한 일류 조리사까지 되어야 한다.

그런 까닭에 채규철은 그의 아내 정희를 비즈니스 우먼이 아니라 '비지 우먼'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또 그 때문에 그는 늘 아내에게 감사하며 산다. 지금의 그의 아내 정희는 충남 아산에 있는 작은 학교 '풀무학원'에서 그가 가르친 제자. 그리고 그가 교통사고로 불구가 된 뒤 처녀의 몸으로 스스로 원해서 결혼까지 했으니, 그의 눈에 아내가 천사로 보이지 않겠는가.

▲ 두밀리자연학교에서 아이들의 도움을 받으며 리어카를 끌고 있는 채규철 교장"을 "두밀리자연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줄놀이를 하고 있는 채규철 교장.
ⓒ 도서출판 선
천당 내신성적 A급은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생명을 바친 사람

"천당 가는 내신 성적을 A, B, C, D로 나누어보면, 천당 내신 성적 A급은 친구나 이웃을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생명을 바친 사람들이다. 이름도 성도 모르는 신장병 환자들에게 자기의 한쪽 콩팥을 기증한 사람들, 앞을 못 보는 맹인들을 위해 자기의 안구를 기증한 사람들… 은 천당 대신 성적 A급이 되고도 남는다." - 175쪽, '천당으로 가는 내신성적' 몇 토막

그렇다면 채규철이 말하는 천당으로 가는 내신성적 B, C, D급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는 "B급은 시간과 기술 그리고 노력을 어려운 노인들과 장애인을 위해서 쓰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봉사자"라고 말한다. 그리고 C급은 알뜰하게 모은 돈으로 불우이웃 돕기 단체 같은 곳에 내는 사람들이며, D급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100원짜리 한 닢이라도 베푸는 사람들이다.

<소나기 30분>은 죽음의 밭을 희망의 밭으로 일구어낸 살아 꿈틀대는 기록이다. 우리나라에 의료보험제도를 처음 들여와 사회복지사업에 힘을 쏟던 한 젊은이가 졸지에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 50% 3도 화상을 입고, 30여 차례의 수술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불행한 운명과 싸워 이겨낸 이야기. 채규철의 일그러진 얼굴이야말로 우리 시대 진정한 아름다운 얼굴이 아니겠는가.

1937년 함남 함흥에서 태어난 두밀리자연학교 채규철 교장은 그동안 수기<저 높은 곳을 향하여>, 수필집<사람은 두번 죽지 않는다>, <사명을 다하기까지는 죽지 않는다>를 펴냈으며, 역서로는 <마틴루터 킹의 사랑의 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등이 있다.
 
 
 
 
 
불길 헤치고 불꽃처럼 살다간 ‘ET할아버지’

교육자 채규철씨 별세 교통사고로 3도 화상 30차례 성형수술 오그라든 몸으로 농촌계몽·청십자운동 “…저기가 어디야,아름답구먼.나 이제 급히 감세"마지막 말 남기고…
“…저기가 어디야, 아름답구먼. 나 이제 급히 감세.”
 ‘E.T.할아버지’ 채규철(69)씨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었다. 평생을 불꽃처럼 살아온 재야교육자 채규철씨가 13일 오전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채씨는 지난 10일 갑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서울 아산병원에 입원한 뒤 수술을 앞두고 13일 오전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삶을 살다 간 사람이다.(조선일보 2005년 6월 2일자 D1면 참조)
함경도 함흥에서 농촌운동을 하던 목사 아버지와 신여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채씨는 어렸을 때부터 농촌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노라 다짐했다. 6·25 때 혼자서 서울로 온 채씨는 길거리에서, 천막교회 한쪽 귀퉁이에서 새우잠을 자며 공부해 서울시립농업대(서울시립대학교의 전신) 수의학과에 들어갔다. 졸업 후 덴마크에 유학을 다녀온 후 1961년 충남 홍성에 있는 풀무학교에서 교사직을 시작했다. 그러다 장기려 박사(전 부산 복음병원 원장. 평생 가난한 이와 함께하다 1995년 한푼 남긴 것 없이 별세. ‘바보 의사’로 불렸다)와 함께 일종의 의료보험인 ‘청십자의료조합’ 운동을 시작해 복지운동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청년 채규철의 인생은 1968년 교통사고로 전신에 3도 화상을 입으면서 큰 도전을 받는다. 승용차에 실어뒀던 시너통이 터져버린 것이다. 생전에 채씨는 “병원에 누워 있는데, 울고 싶어도 눈물샘까지 타버려서 울지 못했다”고 했다. 결국 30차례가 넘는 성형수술 끝에 채씨는 한쪽 눈을 잃고 손가락까지

오그라든 몸으로 살아남았다.
 ‘E.T.할아버지’라는 별명은 어린이들이 ‘이미 타버린 할아버지’라는 뜻으로 붙여준 별명이다. 하지만 채씨는 희망으로 상처를 덮었다. 채씨는 “이 몸이 요즘 돈으로 6000만원 넘게 들여 성형한 몸인데, 사람들이 진가를 몰라줘”라며, 웃음으로 상처를 넘기곤 했다.
채씨는 병석에서 일어나자마자 청십자운동을 다시 시작하고 간질환자들의 복지 향상을 위한 모임 ‘장미회’를 만들어 의료 복지운동을 전개했다. 농촌 계몽운동에서 시작한 채씨의 교육 사업은 1986년 경기도 가평에 설립한 ‘두밀리자연학교’로 연결됐다. “어린이가 바로 세상”이라는 철학을 이곳에서 실천했다.
두밀리학교 설립 멤버였던 구천서 단국대 자원경제학과 교수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알려주는 학교였다”며 “채 선생은 자기 돈을 몽땅 털어 두밀리를 키웠다”고 했다. 두밀리자연학교는 지난해 가평군에 의해 농지를 불법 전용했다는 사소한 이유로 아쉽게 폐교됐다. 생전에 채씨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사는 데 ‘F’가 두 개 필요해. ‘Forget(잊어버려라), Forgive(용서해라).’ 사고 난 뒤 그 고통 잊지 않았으면 나 지금처럼 못 살았어. 잊어야 그 자리에 또 새 걸 채우지. 또 이미 지나간 일 누구 잘못이 어디 있어. 내가 용서해야 나도 용서 받는 거야.”
활활 타오르던 불꽃이 하늘로 날아갔다. 유족으로 부인 유정희(56)씨와 아들 진석(인천대 컴퓨터공학과 교수), 광석(국민대 성곡도서관 사서), 딸 송화(대구보건대 겸임교수)씨가 있다. 발인은 16일 오전 8시 서울아산병원. (02)3010-2265
 
출처 : [조선일보 2006-12-14 09:27]
 
 
 
 
 
ET교장 하늘서도 ‘왕철부지’인가요?
[한겨레   2006-12-21 19:14:05] 
 [한겨레] 불의의 교통사고로 온몸화상을 입고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고 채규철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난 지 일주일이 지났다. 함석헌과 장기려를 사랑했던 그는 평소 두 분의 발자취를 따르려 애썼고, 그의 삶 역시 두 분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을 만큼 훌륭했다.
채 선생의 활동내용과 공간은 참으로 넓고도 다양했다. 사람마다 각기 다른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어떤 이는 그를 농촌운동가로, 교장이나 교육운동가 또는 유명 강사로 기억한다. 또다른 이는 장기려 박사와 청십자 운동을 시작한 그를 의료보험 창시자나 사회복지 실천가로, 그 외에도 환경운동가, 장애인의 대부, 독서왕, 문화운동가, 평화주의자, 왕철부지로 기억한다.
이렇게 다양하게 불려질 만큼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각양각색이었다. 그런데 최근 두 가지를 통하여 이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달 4일 선생의 70회 생신을 맞아 출판 기념을 겸한 칠순잔치를 마련해드리고자 그의 제자, 후배, 함께 활동했던 사람들과 ‘채규철을 사랑하는 사람들’(채사모)이 공동으로 자리를 마련하였다. 기획과 사회를 맡아 진행하는 동안 연극인, 음악인, 출판인, 장애인 등 그날 모인 축하객들의 다양함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칠순잔치를 연극무대에서 한 것도 그의 철부지 같은 생각이 뒷받침된 것이었지만... 또 하나의 사건은 이번 장례식 때다. 운명하신 직후 빈소를 마련할 때부터 그곳을 지키며 오가는 수천명의 조문객들의 다양함에 다시 한 번 놀라고 말았다. 항상 넉넉하고 정이 넘치는 그의 열린 마음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나 보다. 농촌운동가·사회복지가·장애인대부…아름다운 세상 회복 위해 늘 약자 편에참살이 하자며 ‘철들지 않는 사람들’ 조직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한 여러 활동들, 그리고 그의 삶 전체를 들여다 보면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조물주가 창조한 태초의 세상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 아름다운 세상이 평화로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름다운 세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자연의 소중함과 생태와 환경을 보존하는 일에 늘 앞장서 왔다. 그리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어린이와 장애인, 노약자와 소외된 이웃의 평화를 먼저 챙기고 그들의 권익을 위해 늘 앞장섰다.
그는 많은 조직을 결성하기도 하였고, 기존 관련 단체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는데 그가 마지막 애정을 쏟으며 앞장서 출범시킨 조직이 바로 ‘철들지 않은 사람들’ 모임이다. 그는 아름다운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만들어야 한다며 먼저 아름다운 사람이 되자고 역설하였고, 이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철들지 않은 사람들’이라 부른 것이다.
그는 틈날 때마다 철부지 홍보대사로 자원해서 나선다. 왕철부지답게 지칠 줄 모르고 만나는 사람마다 꿈과 용기와 희망과 사랑을 나눠 주었다. 이제 ‘철들지 않은 사람들’은 채규철 선생을 제3대 왕철부지로 위촉하려 한다. 초대 왕철부지 고 장기려 박사와 2호 왕철부지 고 이선관 시인에 이어 그가 세 번째 왕철부지가 되는 셈이다.
살아 생전 그는 아름다운 세상과 평화를 위해서는 그의 영원히 마르지 않는 호주머니를 항상 열어두었고, 칠순잔치에서 경비를 아껴 기부금을 내놓았던 그의 뜻을 받들어 장례식을 마치고 그의 가족들이 고인의 뜻을 기리기 위해 남은 부의금 모두를 고인이 참여했던 단체에 기부하겠노라는 뜻을 전해왔다. 채규철님이 다시 부활하였으니 참 행복하다.
철들지않은사람들 상임위원장 문홍주 (한성디지털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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