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준 [朴寬俊, 1875.4.13~1945.3.16]

종교운동가·그리스도교 순교자.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총독(總督)을 찾아가 신사참배 강요를 포기하도록 촉구하는 등 종교의 자유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사후 대통령표창,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활동분야
 
종교
출생지
 
평안북도 영변
주요수상
 
대통령표창(1968), 건국훈장 애국장(1991)


본문

평안북도 영변에서 출생하였다. 1900년경 그리스도교 교도가 되었고, 한방(韓方) 의술을 배워 1917년 조선의생(朝鮮醫生) 면허(지금의 의사 면허)를 받고 개업, 1935년 평양에서 십자의원을 운영하였다. 개천교회(价川敎會) 장로로 재임 중 1935년 일제가 그리스도교 교도에게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강요하자, 평남지사(平南知事)와 총독(總督)을 여러 차례 방문하고, 그 부당성을 지적, 신사참배 강요를 포기하도록 촉구하였다.

1938년 도쿄[東京]로 건너가 제74회 제국의회(帝國議會)를 방청하며 ‘동아대국교개종헌의서(東亞大國敎改宗獻議書)’를 회의장에 살포하다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 후에도 계속 종교의 자유와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벌이다가 피검되어 복역 중 6년간의 옥고를 치르다 사망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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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5∼1945. 기독교 장로. 평안북도 영변 출신. 1900년경부터 기독교를 믿기 시작하여 보수주의적 신앙에 침잠하였고, 한방의를 배워 1917년 4월 조선 의생(醫生)의 면허를 받았다.

여러 곳을 전전하며 개업하다가 1935년 평양 선교정(船橋町)에서 십자의원(十字醫院)을 운영하였다. 1920년대부터 ‘아세아인 5억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기독교화하는 길밖에 없다.’라는 계시를 계속 들었다고 한다.

1937년 신문에서 평양의 삼숭(三崇), 즉 숭실전문·숭실중학·숭의여중이 신사불참배로 폐교위기에 놓였다는 기사를 읽은 뒤 신사참배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일제와 합법적으로 싸워 한국교회를 구출하기로 결심하였다.

곧, 장문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니시모토(西本) 평남지사, 미나미(南次郎) 총독 등에게 보냈고, 13회나 총독부를 방문하여 신사참배 강요를 포기하도록 권고하였다.

1939년 1월 신사참배문제로 선천 보성(保聖)중학교 교사직을 사퇴한 안이숙(安利淑)과 동경(東京)에서 유학하고 있던 아들 영창(永昌)의 도움으로 일본에 건너가 일본의 거물급 정치인인 닛비키(日疋信亮)·우가키(宇垣一成)·아베(阿部磯雄) 등을 방문하고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이러한 시도가 여의치 않음을 알게 되자 마침내 일본 중의원에 직접 청원하는 길밖에 없음을 판단하고, 신종교법안이 심의되는 일자를 골라 1939년 3월 24일 회의장에 들어갔다.
종교법안이 상정되어 심의가 이루어지던 중 미리 준비되었던 건의서를 “여호와 하나님의 사명이다.”라고 외치면서 단상을 향하여 던졌다.
회의장은 수라장이 되면서 그는 즉시 붙잡혔고 32일간 경시청에 갇혀 있었다. 귀국 후에 신사참배거부운동을 전개하다 검속되어 6년간의 옥고 끝에 평양의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은 일제가 국체변혁모의의 중죄로 다스릴 만큼 사안의 중대성을 인식하던 운동인데, 그는 처음 이 운동을 시작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참고문헌≫ 韓國基督敎史硏究(金良善, 基督敎文化社, 1971)
≪참고문헌≫ 太陽神과 싸운 이들(안용준, 세종문화사, 1972)



안녕하세요 ~

일제시대때 기독교계에서
신사참배 운동에 동참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습니다.


신사참배(神社參拜) 모습

일제강점기(1910~45)에 일본의 민간종교인 신도(神道:Shintoism) 사원(寺院)인 신사를 곳곳에 세우고 한국인들로 하여금 강제로 참배하게 한 일.

【참배강요】 신사를 중심으로 천황도 신격화하여 자국 국민의 정신적 지배는 물론, 군국주 의적 침략정책 및 식민지지배에도 이용하였다. 한국에도 1876년 개항과 더불어 일본의 정치 적·군사적·경제적·문화적 침략이 개시되면서 신도가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신사는 1910년 전에는 일본 거류민들을 위해서 민간에서 건립과 유지를 주도하였지만, 병합 후에는 조 선총독부의 보호와 육성 아래 신사의 관·공립적인 성격이 강화되고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인에게까지 신사참배와 신도신앙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25년 조선신궁(朝鮮神宮) 진좌제 (鎭座祭)를 고비로 언론과 기독교계 사립학교들이 강력히 반발하자, 일단 사립학교 학생들에 게까지 강제로 신사에 참배시키는 정책의 실제 시행은 보류하였다.

30년대에 들어 대륙침략 을 재개한 일제는, 이를 뒷받침할 사상통일을 이룩하기 위해서 각종 행사를 개최하고 기독 교계 사립학교에까지 다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하였다. 이때까지만 하여도 기독교계는 신앙상의 이유로 이를 거부하고 총독부의 양해를 구하였으나, 총독부가 35년 11월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사건을 계기로 강경책으로 나오자 기독교계는 분열되었으며, 37년부터 기독교계 학교의 일부는 폐교되고 일부는 ‘순응’하게 되었다. 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의 이른바 ‘황민화(皇民化)운동’의 고조와 함께 교육계에서의 신사참배 문제가 그들의 의도대로 일단락되어가자, 이제 그 강요의 마수를 일반인들은 물론 교회에까지 뻗치 게 되었다.

일제 경찰은 38년 2월 기독교에 대한 지도대책을 세워 일반신도들의 신사참배를 지도 강화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일선 경찰력을 동원하여 교회로부터 시작하여 노회·총 회 등 교단적 차원에서 신사참배를 결의 실행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결국 기독교계도 이 러한 강압을 이기지 못하고 38년 9월 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고비로 굴복하여 급격 히 변질되고 말았다. 그러나 교단의 신사참배 결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를 거부하고 신앙의 절개를 지킨 인물들이 어느 교파에나 있었다. 총독부는 신사의 건립을 계속 장려하여 45년 6월 현재 신궁(神宮) 2곳, 신사(神社) 77곳, 면 단위에 건립된 보다 작은 규모의 신사 1,062곳이 세워졌다. 이것도 부족하여 각급학교 등에는 ‘호안덴[奉安殿]’을 세우고, 각 가 정에는 ‘가미다나[神棚]’라는 가정 신단(神壇)까지 만들어 아침마다 참배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신사참배에 동원된 인원은 조선신궁 참배자만도 40년에 약 215만 9000명, 42년에는 약 264만 8000명에 이르렀다. 【거부운동】 크게 2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그 하나는 일제 당국이나 일제에 영향력 있 는 기관 또는 인사들을 찾아가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말 것을 청원 내지 경고한 ‘신사참배 강요 금지 청원운동’이며, 다른 하나는 일제의 강요와 제도권 교회의 불법적 결의에 순교 를 각오하고 끝까지 저항하여 신앙과 교회를 지키고자 한 ‘신사참배 거부 권유운동’이다. 32년 초부터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각 지역 기독교계 학교에서 해마다 문제가 되자, 34년 장로회 총회장은 총독에게 2차에 걸쳐 청원서를 제출하려 하였으나, 일제 당국자들에 의해 저지되었다. 이듬해 11월 평양 기독교계 사립학교장 신사참배 거부 사건 이후 일제는 신사 참배에 대한 공식적인 논의마저도 금지시켜 이러한 청원운동은 개인적 차원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평남의 박관준(朴寬俊) 장로는 신사참배 거부로 교사직을 사직하고 거부운동을 하던 안이숙(安利淑)을 대동하고 39년 2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정계요인들을 만나 신사참배 강 요 저지를 호소하고, 같은 해 3월 종교통제를 목적으로 한 ‘종교단체법안’을 심의하던 제 74회 일본제국회의 중의원 회의장에 방청객으로 들어가, 종교법안 제정 반대, 기독교의 국교 화·신사참배 강요 금지, 양심적 교역자 투옥 철폐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한 경고장을 단상을 향해 투척하였다.

김선두(金善斗) 목사도 일본 유학생 김두영(金斗英)과 함께 신사참배 강요 금지를 일본 정계 요로에 진정하고자 38년 8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하였으며, 이에 동조 하는 일본 정계 요인들과 함께 다시 한국에 돌아와 장로회 총회의 강제 신사참배 결의를 막 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일제 경찰에 알려지자 김목사는 사전에 구속되고 총회도 삼엄한 경찰의 압력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결의 시행함으로써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물 론 이러한 청원운동은 일제에 의하여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고, 청원자측이 일제의 권 력구조 내지 식민통치 체제를 인정한 체제 내의 운동이라는 점에서는 한계를 가지는 것이지 만, 이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일제의 종교탄압에 대항하여 문제를 확산 폭로하고 불의를 담 대히 경고하였다는 점에서는 일정한 의의를 지닌 운동이었다.

일제의 강압으로 38년 이후 한국교회가 신사참배에 굴복하자, 이에 반대하는 교역자와 신도들은 서로 연대를 맺고 조직 적·집단적 저항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제 당국과, 이를 결의 실 행하는 제도권 교회를 비판하면서 신자들을 대상으로 신사참배 거부를 권유하고 거부자들 간의 결속을 강화하는 운동을 폈다. 그 중심 인물은 평남의 주기철(朱基徹), 평북의 이기선 (李基善), 경남의 한상동(韓尙東)·주남선(朱南善), 전남의 손양원(孫良源), 함남의 이계실 등 으로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있었으며, 만주 지역에서도 박의흠(朴義欽)·김형락·김윤섭 등 이 활약하였다. 일제는 이들을 수차례 검속 탄압하다가 40년 6월경부터 9월경에 걸쳐서 본 격적인 검거에 착수하고 재판에 회부하여 해방되기까지 옥고를 치르게 하였다.

40년에 나온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지도 방침’이나 같은해 9월 20일 새벽을 기하여 전국에 걸쳐서 실 시된 ‘조선 기독교도 불온분자 일제 검거령’은 바로 이들을 탄압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조용학·주기철·최봉석·최상민·김윤섭·박의흠 등의 순교자가 나왔다. 이상과 같은 조직적 집단적 신사참배 거부운동과는 달리 보다 규모가 작거나 개인적 차원의 신사참배 거부항쟁은 전국 어디서나 볼 수가 있었다. 일제 경찰은 이들을 민족주의자로 규 정하고 치안유지법·보안법·불경죄 등을 적용하여 탄압하였는데, 이렇게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투옥된 이는 대략 2천 여 명에 이르고 2백 여 교회가 폐쇄되었으며, 순교자만도 50여 명에 이르렀다.

【거부운동의 의의】 기독교인이 아닌 일반인들도 일제의 강요에 마지못해 참배를 하거나 가정에 가미다나를 설치하기까지 하였으나, 이에 대한 민족적 반감을 깊이 느끼고 있었다. 각 가정에 모시도록 행정기관을 통하여 나누어 준 ‘신궁대마(神宮大麻:가미다나에 넣어 두 는 일종의 신주 내지 부적)’도 바로 폐기하거나 형식적으로 벽에 밥풀·압핀 등으로 붙여 두는 경우가 많았다.

44년 가을 일제의 어용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충남지역 농가를 대상으로 이에 대한 실태를 조사한 결과 주민들은 대부분이 ‘왜놈의 귀신’, ‘일본의 귀 신’이라 하여 이를 별도로 취급하거나, 방치 폐기하고 있었다. 이러한 반감 때문에 45년 8 월 광복이 되자마자 대부분의 신사들이 민간인들에 의해 불타거나 파괴되었다. 이들 신사는 대부분 8월 15~16일에 방화 파괴되었으며 그 터는 대부분 공원이나 학교·교회 등 공공장소 로 이용되었다.

이상과 같은 신사참배 거부운동은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기독교 신앙의 순수 성을 지키려 하였다는 점에서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천 황제’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한 일본적 체제를 부정하고, 일제의 이른바 ‘황민화정책’ 내지 ‘민족 말살정책’에 대한 저항적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민족사적 의의도 지니고 있다.





일제 시대 때 행해진 신사참배는 '나 이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불순종의 죄입니다.
일제시대 때 행해진 것이지만 그 죄에 대해서는 반드시 한국교회와 성도가 하나되어서
회개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래 사이트에 가시면 신사참배와 관련한 많은 자료가 있습니다.
http://holyspiritkorea.or.kr/


신사참배란 일제강점기(1910∼1945)에 일본의 민간종교인 신도(神道:Shintoism) 사원(寺院)인 신사를 곳곳에 세우고 한국인들로 하여금 강제로 참배하게 한 일을 말합니다.
일본의 신도는 그들의 고유 종교요, 일본 국수사상의 핵심입니다.

일제는 한일합방 직후부터 한국 내에 신궁?신사의 설립을 추진하고
한국인들의 신사참배실시를 계획하는 등
한국의 민족혼 말살과 일본화 정책의 주요 방편으로 신사참배 책략을 수용해 왔고,
식민정치의 막바지로 치닫는 30년대부터는 구체적이고 강압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력히 추진하자, 처음에는 이에 반대했던 종교단체들도
일제에 굴복하기 시작했습니다.
평양에서 먼저 물의를 빚기 시작한 신사참배의 문제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순교하거나 옥고를 치렀고 또 일부 교계지도자들은 이를 받아들이며 교권을 유지해 나갔습니다.

1937년 일본은 모든 조선의 기독 학교 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1938년, 일본은 ‘교회는 예배를 드리기 전
신사 참배를 먼저 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즉 예배 시작 전에 일본신에게 먼저 참배를 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주기철 목사와 같이 신사참배를 적극적으로 반대하다가 투옥되고
자결로서 순교한 성직자도 없지 않았지만
일제시대 한국 기독교(천주교)의 지도자들은 그리스도 대신 일본의 신사에 참배하고
이를 권유하면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과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찬양하고 앞장섰습니다.

1938년 2월, 평북노회는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닌 ‘국가 의식’임을 인정한다는
결의를 했고, 4월에는 감리교 유형기 목사를 비롯한 각 교단 대표들이 모여
신사참배에 동참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6월에는 전북노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했습니다.
또한 같은 해 9월 장로교는, 신사참배는 우상 숭배가 아니며
일본의 신민(臣民)된 의무로 행하는 의식일 뿐이라고 발표했습니다.
또한 1938년 제 27회 장로교 총회 안건으로 신사참배 안이 채택되었는데,
여기서 총회장 목사는 일본 헌병과 경찰들 앞에서 ‘신사참배는 종교 의식이 아닌
국민의례이므로 교회가 참여해도 좋다’는 결의를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습니다.
이후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등이 신사참배에 결의했습니다.

1939년 열린 제28회 장로교 총회에서는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 예수교 장로회 연맹’을
결성하고 일본의 광적인 침탈전쟁을 위해 기도운동과 모금운동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장로회는 1937~39년 전승축하회 5백94회,무운장구기도회 9천53회,
국방헌금 1백58만여원,시국강연 1천3백여회 등을 열어 일본을 도왔고,
감리회도 교회 종 헌납과 황도문화관(皇道文化館) 개소 등으로 일제를 지원했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당시 목사님들이 일본 중들이 행하던 불교 세례
즉, 불교에서 물을 뿌려 세례를 주는‘미소기 바라이’라는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이 미소기 바라이는 강과 바다 등에서 집단적으로 행해졌는데,
한국 교회 목사들은 일본 불교 중들에 의해 행해진 이 예식을 단체로 행했습니다.
기독교 기관도 친일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한국 비정부기구(NGO)의 뿌리이자 산파인 YMCA는 <청년>에 '황국시민의 선서'를 냈고 신흥우 윤치호 등 YMCA 지도자가 친일 행각을 벌였습니다.

평양 신학교가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1938년에 폐교하자
서울에서 1939년에 조선신학교를 설립하였고,
김재준, 송창근 등이 주축이 되었는데 이들의 대부분이 자유주의자거나
거기에 동조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조선 신학교는 "선교사들의 지배와 보수신학으로부터의 해방"을
설립의의로 삼았습니다.

또한 평양에서는 총회 직영 신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1939년 11월에 평야에 신학교를 세웠습니다.
이 학교는 채필근이 교장으로 부임하여 일제 당국의 인가를 받아
교육하였으나 일본화의 길을 갔습니다.
위의 두 신학교의 공통된 점은 신사참배의 수용과 자유주의 신학경험이란 점입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수난 당하는 사람들이 감옥으로, 지하로,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귀한한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공동현상을 자유주의자들이 메우게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대한민국이 건국 근거로 삼는 3·1운동을 주도했으면서도
하나님과 민족 앞에 떳떳하지 못하고 고개 숙일 수밖에 없는 '신사참배의 죄'를 짊어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해방 이후 출옥 성도들이 친일 부역한 죄를 물어 회개를 선포했을 때
한국 교회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사회에서 반민특위가 기독교 친일파를 잡아들였을 때
'기독교 정권'의 수장 이승만 대통령이 방해했습니다.

한국 교회가 회개를 거부한 첫 기회는 1945년 8월 해방 직후였습니다.
신사참배 거부로 옥에 갇혔다가 해방과 함께 출옥한 교인 20여 명은 집으로 가지 않고 평양 산정현교회에 모여 2개월간 교회 재건을 위해 기도한 뒤,
1945년 9월20일 '한국교회 재건 기본 원칙'을 발표했습니다.
△교회 지도자(목사 및 장로)들은 모두 신사에 참배하였으니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회 정화한 후 교역에 나아갈 것
△권징은 자책 혹은 자숙의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한 2개월간 휴직하고
통회 자복할 것
△목사와 장로가 휴직 중에는 집사 혹은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할 것
△교회 재건의 기본 원칙을 전한(全韓) 각 노회 또는 지교회에 전달하여
일제히 시행하게 할 것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복구 재건할 것 등입니다.

이 재건 원칙은 1945년 해 11월14일 열린 평북목사수양대회에서
평북6노회 교역자 200명이 참여한 가운데 다시 발표되었고,
12월 소집된 북한5도 연합노회 결의에도 포함되었습니다.
이후 여러 부흥회에서 설교 간증과 함께 재건 원칙이 발표되었지만,
당시 교회 대부분이 이 원칙을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권을 잡은 목사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38년에 열린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선포한
홍택기 목사의 반발입니다.
홍 목사 등 친일파 목사들은 재건 원칙을 주장한 목사들을 향해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고생한 사람이나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고, 교회를 버리고 해외로 도피했거나
혹은 은퇴한 사람의 수고보다는 교회를 등에 지고
일제 강제에 할 수 없이 굴한 사람의 수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라고
반박했습니다.
나아가 그들은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책벌은
하나님과의 직접 관계에서 해결할 성질의 것이지
누구의 강요에 의해 결정될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교권에서 받아들이지 않자 출옥 교인들은 신사참배한 죄를 회개하지 않는 자들과
함께 할 수 없다며 별도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친일에 대해 회개하지 않은 것이 결국 교회 분열의 씨앗이 된 셈입니다.
회개 대신 장로교 총회는 1954년 제39회 총회에서
슬그머니 신사참배 결정을 취소하는 성명을 전국 교회에 알렸을 뿐입니다.
'취소 성명서'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교회는 진실한 참회의 모습이 없고,
형식적인 수준에 그쳤다는 평가를 받기에 이릅니다.
취소 성명서에는 '제27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성명에 대하여
일제 강압에 못 이긴 결정이었으나 이것이 하나님 앞에 계명을 범한 것임을 자각하고…
본 총회는 이를 취소하고 전국 교회 앞에 성명함'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신사참배에 대한 개인적인 참회와 사죄는 있었지만,
한국교회는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해 공식적인 참회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분열의 씨앗은 곧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에 의해 양분화 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1950년 4월 대구 제일 교회에서 대한 예수교 장로회 46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자행한 목사들은 ‘우리도 양떼를 흩어버리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애쓰고
수고했다’, ‘교회를 지키기 위해 어쩔 수가 없었다’고 자신들의 죄를 정당화 했으며,
신사참배를 거부한 목사들은 ‘너희는 회개해야 한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리고 한국 신학 대학의 창립자였던 김재준 박사가 ‘자유주의다, 아니다’하는 문제
때문에 서로 시비가 붙었고, 급기야 서로 자기 주장을 하기 위해
강단으로 몰려나온 사람들은 성찬상을 뒤집어엎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을 벌이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후 약 2개월 뒤, 6.25전쟁이 터졌습니다.

한국교회는 신사참배의 잘못을 언제 총회적으로 고백하고 사죄할 것인가.
이는 장로교총회만 관계되는 것은 아닙니다.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등 모든 교단과 관계됩니다.
그러나 장로교총회는 한국교회의 다수를 점하는 대표성을 띠고 있었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출처 : 성령한국 홈페이지 http://holyspiritkorea.or.kr)




박관준 장로 투옥전 유언시

人生有一死(인생 일대에 한번 죽음이 있으니)

何不死於死(어찌 죽을 때에 죽지 않으리요)

君獨死於死(그대 홀로 죽을때에 죽었으니)

千秋死不死(죽었어도 천추에 죽지 않았도다)

時來死不死(죽을 때가 와서 죽지 않으면)

生樂不如死(살아 즐거움이 죽음만 못하리라)

耶蘇爲我死(예수 나위해 죽으셨으니)

我爲耶蘇死(나 예수위해 죽으리라)
 
 
일본 국회에까지 가서 일제의 신사참배 부당성을 알리고 복음 증거하다가 투옥되어 해방을 5개월 남긴채, 1945년 3월 13일 한국 민족에게 이사야11장10-16 말씀이 반드시 성취 될것을 예언하고 순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