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 많은 교회가 회개와 거룩과 자기 부인과 세상 부인과 순종과
이웃사랑이 빠진 "오직 믿음~ 오직 믿음~" 이라는 신앙주의에 빠져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다'는 말은 행함이(순종) 없는 믿음으로도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오해되고 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약2:14)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라는 사람의 계명, 인본주의적인 구원관을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신봉하고 추종을 하는 것일까?

회개와 거룩함을 추구하지 않아도 일단은 인간적인 안정감을 주기에
언제나 부담없이 편리하게 붙들 수 있는 인본주의적인 구원관이기 때문이다.

선지자 예레미야 당시에도 유대인들은 불의를 행하면서도 자기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결코 지옥 심판을 받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불의를 행한다 할지라도 성전이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한다고
저들은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성전사상'은 그 당시의 시대정신 이었다.

영적 지도자들은 백성들에게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고 가르쳤다(렘7:4)
'결코 망할 수 없는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는 성전이 그들 가운데 계시는데
어찌 망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구약의 거짓 선지자들이 말했던 '할례'를 오늘날 '믿음'으로, '성전사상'을
'구원의 확신사상'으로 이름만 살짝 바꾸어 놓았을 뿐이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라는 사람의 계명, 인본주의적인 구원관을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신봉하고 추종을 하는 것일까?

세상의 가치를 부인하지 않고 세상을 추구하고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을
따라가면서도 부담없이 편리하게 붙들 수 있는 인본주의적인 구원관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일2:15~17)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라는 사람의 계명, 인본주의적인 구원관을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신봉하고 추종을 하는 것일까?

하나님의 뜻과 그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도 부담없이 편리하게
붙들 수 있는
인본주의적인 구원관이기 때문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 (눅6:46)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라는 사람의 계명, 인본주의적인 구원관을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신봉하고 추종을 하는 것일까?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않아도 부담없이 편리하게
붙들 수 있는 인본주의적인 구원관이기 때문이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25:4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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