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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1일자 생명의 삶, 묵상에세이 소개된 루실 티즈데일 여의사님의 삶이

너무도 아름답고 도전이 되어서

인터넷에서 검색해 본 내용입니다..

 

"인생에서 왜 사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단순히 소비되는 인생이 아니라 생산되고 섬기고 나누는 인생이 되길 소원합니다.

 

 

 

<아프리카 내 사랑> 아프리카를 울린 루실 티즈데일...감동의 눈물T_T;;| 이런저런 얘기
Milarepa | 조회 19 |추천 0 | 2004.05.13. 02:20
<수술이 아닌, 환자가 바로 삶이었던 루실 티즈데일>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선 지금, 우리나라 의대생들이 가장 기피하는 전공의가 바로 외과라는 통계에서 알 수 있듯이, 외과는 그 어느 전공의보다 집중력과 정확성, 세밀함이 필요하며, 수술에 따른 긴장감 역시 만만치 않다. 그래서 외과 전공의들의 자살률이 높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이다. 과거보다는 의료환경이 훨씬 좋아진 지금도 이러하거늘, 1950년대는 과연 어떠했을까. 이 책의 주인공 루실 티즈데일(Lucille Teasdale)은 1929년, 캐나다에서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집안의 딸로 태어나 여성의 사회 진출은 물론이요, 사회적 지위 보장 역시 척박하기만 현실 속에 의학을, 게다가 외과를 선택했다. 외과를 전공하는 학생 중에서 유일한 홍일점인 그녀. 캐나다를 떠나야 할 처지가 된 루실은 처음에는 미국을 생각했으나 그녀가 지원했던 20여 곳의 미국 병원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통보해 왔다. 그녀는 이 같은 반응을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대학에서 좋은 성적을 얻었고, 경력도 쌓았으며,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외과의사가 써준 매우 호의적인 추천장도 갖고 있었으나 도대체 왜 미국인들은 그녀를 거부한 것일까? 대부분의 병원들은 이리저리 말을 돌려가며 얼버무렸지만, 딱 한 곳만은 왜 그녀를 원하지 않는지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저희 병원에서는 여성을 채용할 계획이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그녀는 문득 외과를 전공하는 것을 말린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이 과연 잘못된 일이었는지를 스스로 물을 수밖에 없었다. “자기 아이의 생명을 여자 손에 맡기는 어머니는 절대 없을 거예요!” 누군가가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자 루실은 이렇게 대꾸했다. “천만에요! 여성들은 외과外科를 하도록 운명지어져 있어요. 그건 바느질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거든요!” 미국 병원에서 이처럼 매정하게 거절당하자 그녀는 물론 마음이 심란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분노하지는 않았다. 그 당시만 해도 여성들이 아직 진출하지 못한 분야가 꽤 있었으며(퀘벡에서 여성들이 의업에 종사하기 시작한 것은 겨우 1930년대 들어서였다), 여성들은 남성들과 같은 권리를 행사하지도 못했다. 캐나다 여성들은 남편이나 아버지가 서명하지 않으면 수표조차 발행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 일을 계기로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두 여성이 싸우고 있었다. 분별력 있는 여성은 충분히 예측가능한 일이었다며 미국 병원측의 거부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감성적인 여성은 결코 체념하거나 이 같은 상황을 용인할 수가 없다고 맞섰다. 너무 부당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두 달 간의 약속, 35년의 사랑>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활발하지 못했던 당시, 루실 역시 그렇게 자신감이 투철한 여성은 아니었다. 어렸을 적 그녀는, 우울증에 시달리던 어머니가 친구에게 한 고백을 엿듣게 되면서 자신은 어머니에게 고통만 안겨주는 딸이라는 자괴감에 빠진다. 어머니의 우울과 비관에 찬 모습을 보는 것이 고통스러웠던 루실은 막연하지만 외과를 선택하여 ‘인도’로 가서 의술을 펼칠 계획을 세운다. 그녀의 든든한 후원자인 아버지의 헌신과 사랑으로 그녀는 자신의 꿈을 가졌고, 그 꿈을 향해 힘겨운 발걸음을 내딛는다. 프랑스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외과를 전공하던 그녀 앞에 어느 날 피에로 코르티(Piero Corti)라는 이탈리아 남성이 나타난다. 한때 캐나다에서 루실과 같은 병원에서 일했고, 짧은 시간이나마 그에게 그녀는 가슴 아픈 과거의 한 단편을 털어놓은 사이였다. 피에로는 그녀에게 두 달 동안만 우간다에서 병원을 세우려는 자신의 계획을 도와달라고 제의한다. 운명이었을까. 그녀는 아프리카 대륙이 유럽의 식민지 상황에서 서서히 기지개를 펼 무렵, 그래도 우간다는 안전하리라 생각했고 기꺼이 피에로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한다. 1961년 5월 1일, 우간다에 도착 두 달 동안 루실과 피에로는 굴루의 라코어 병원에서 헌신적으로 의료활동을 펼친다. 두 달 후 피에로는 자신의 계획과 야망을 이루기 위한 파트너로 루실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아무런 준비도 없는 그녀에게 청혼한다. 루실은 느닷없는 그의 청혼에 당황하며 두 달의 약속 기간을 끝내고 프랑스로 돌아왔고, 피에로 역시 아버지가 편찮으시다는 전갈에 잠시 이탈리아에 머무르기로 한다. 프랑스로 돌아온 루실은 피에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어느덧 자신의 마음속에 자라고 있음을 깨닫고 프랑스에서 일하기로 했던 원래의 계획을 대폭 수정하여 피에로와 함께 아프리카에 자신의 꿈을 이루기로 결심한다. 두 사람은 우간다로 함께 돌아와 1961년 12월 5일, 라코어 병원 안에 있는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당장 팔을 걷어붙인 두 사람은 더욱 긴밀하게 협조하면서 일을 해나갔다. 외과에서 피에로는 환자들을 마취시키고, 루실이 수술할 때는 옆에서 도와주기도 했다. 그녀는 상냥하고 다정하게 환자의 피부나 근육을 어루만져 주곤 했다. 그러면서도 일하는 속도가 무척 빨랐다. 수술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감염에 대한 위험이 그만큼 증가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동작은 언제나 세련되어 있었다. 젊은 여성 외과의사가 이 정도의 테크닉을 보여준다는 건 타고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수술 속도를 조절해가면서 일사불란하게 수술팀을 이끌었다. 그녀는 엄밀嚴密과 복종을 요구했다. 수술 중에 간호사들은 침묵을 지켜야 했고, 그녀의 동작을 방해하지 말아야 했으며, 팔짱을 끼는 일은 일체 용납되지 않았다. 그녀는 퀘벡과 프랑스에서 이렇게 해야 한다고 배웠기 때문에 우간다에서도 똑같이 하려고 애썼다.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해야만 했다. 사람들의 건강과 생명이 달린 문제였다. 그녀는 이곳이 아프리카니까 대충대충 하겠다는 생각 같은 건 아예 하지 않았다.

<내전으로 얼룩진 격동기의 우간다, 그 중심에 선 루실과 피에로의 의료활동>
종족과 지역에 따라 정치적으로 분리되어 있던 우간다는 1962년 10월 독립했다. 1년 뒤 부간다의 통치자인 무테사 2세가 초대 대통령에 임명되었으나, 대통령과 총리 간에 그리고 다양한 종족들의 대표자들간에 분쟁이 생겨났다. 1966년 오보테는 무테사를 몰아내고 1년 후 새 헌법을 공포해 스스로 대통령에 올랐으며 모든 왕국을 폐쇄했다. 1971년에 이디 아민 장군은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는데, 그의 집권기간은 폭정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는 1972년 상업,경제 부분을 장악하고 있던 아시아인들을 우간다에서 추방했고, 아촐리족?랑고족을 비롯해 다른 종족들을 박해했으며, 우간다의 경제 파탄을 초래했다. 1978년 아민은 이러한 우간다 내부문제로부터 관심을 돌리기 위해 탄자니아를 침략했으며, 이에 대한 보복으로 1년 뒤 아민에 의해 추방당한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탄자니아군이 우간다를 침략해 그를 몰아냈다. 내전으로 얼룩진 우간다, 루실과 피에로는 아촐리 부족이 중심을 이루는 굴루의 라코어 병원은 정부군과 반군의 협박과 의약품과 생활필수품 등의 약탈로 온갖 시련을 당한다. 그러나 그런 역경 속에서도 병원 문을 닫지 않고, 루실은 ‘헌신’이야말로 의술의 기본이라고 믿으며 반군과 정부군의 부상병을 치료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1973년부터 1977년, 5년 동안 루실은 유방절제 수술(10회)과 방광?질 누관 수술(21회), 갑상선종 수술(31회), 맹장 수술(41회), 절단 수술(70회), 제왕절개 수술(176회), 자궁절제 수술(316회), 탈장 수술(588회) 등을 해냈다. 그리고 1979년 ‘해방전쟁’이 시작된 이후로 루실은 전쟁의학戰爭醫學의 대가를 이루었는데, 절단을 하기보다는 절단을 막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게 바로 전쟁의학이 할 일이었다. 그녀가 좀처럼 보기 드문 수술로 부상을 입은 한 군인의 다리를, 한 인간의 미래를 구해준 것도 바로 이때의 일이었다.

<에이즈와 함께한 15년 동안의 기적 같은 삶>
루실은 습관처럼 녹초가 될 때까지 일을 하곤 했지만 그래도 금방 회복되곤 했다. 그러나 1985년, 자주 피곤을 느끼는 것이 오십을 넘은 나이 탓이라고 여겼으나, 정밀한 진단 결과 에이즈 바이러스(HIV) 보균자임이 밝혀졌다. 도대체 어떻게 감염된 것일까. 루실은 총알에 맞은 부상자들을 수술할 때마다 꺼칠꺼칠한 것과 우툴두툴한 것을 찾으려고 엄지손가락을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 끝에 올려놓고 동시에 밀어넣었다. 이렇게 하면 물론 손가락을 찔리거나 베이기는 했지만(그녀가 손에 낀 고무장갑은 대부분 살균은 되어 있었지만 예전만큼 질기지가 않았다) 어쨌든 그런 환자들 중 한 명이 바이러스를 전파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루실은 자신이 감염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감염시켰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굴하지 않았다. 에이즈에 걸리면 2년 뒤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이 약 25퍼센트 정도된다는 선고에도 루실은 계속 정상적으로 일을 했다. 오후가 되면 그녀는 장갑을 두 켤레씩 끼고 다시 수술을 시작하곤 했다. 그녀는 부주의하고 불필요한 일체의 동작을 피하기 위해 한층 더 정신을 집중시켰다. 아홉 시간 동안 계속해서 수술을 한 적도 있었다. 1986년 루실과 피에로는 세계보건기구에서 수여하는 ‘사사카와 상’(료이치 사사카와는 ‘일본 조선산업 재단’의 회장으로, 1950년 이후로 여러 가지 사업에, 특히 천연두 박멸 사업에 120억 달러를 기부한 독지가다)의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그 와중에 우간다의 상황은 점점 혼란으로 치닫고 있었다. 군인들과 반군들은 병원 인접 지역에서 죽음의 대무對舞를 추는 데 몰두했다. 정규군이 낮에 이 지역을 점령하고, 밤이 되면 반군이 다시 탈환하는 일이 매일같이 되풀이되었다. 민간인들은 양쪽 모두에 배신자로 낙인 찍혔다. 정규군은 반군을 돕는다고 의심이 가는 민간인들을 군대 막사와 감옥에 가두어놓았다. 반군들은 또 정규군에 협력한다고 생각되는 민간인들을 처형했다. 암담한 현실 속에서 그녀의 일과 그녀의 병원은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우간다의 에이즈 환자 수는 계속해서 늘어났다. 1980년대 말에 접어들자 우간다는 약 천7백만 명의 인구 중에서 15만 명 이상이 에이즈에 감염되었다. 루실을 찾아오는 에이즈 환자들은 한편으로는 그녀가 이 병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매번 그녀에게 깨우쳐주곤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때때로 미처 보지 못했던 현실에 눈을 뜨도록 해주기도 했다. 그녀는 사랑받고 있었다는 것을. 1989년 4월 혼미를 거듭하는 내전 속에 마침내 피에로와 루실의 라코어 병원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간다의 여성들은 그들이 떠나는 것을 간과하지 않았다. 병원을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루실과 피에로를 옹호하기 위해서……. 그들의 삶이 불안해졌듯이, 병원도 점점 더 불안정한 곳이 되어갔다. 몇몇 환자들은 중상을 입었는데도 감히 병원까지 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반군들에게 부상을 당한 민병대장도 군대 막사로 실려갔고, 그곳에서 의사에게 도움을 청해 왔다. 라코어 병원에 갔다가는 반군들에게 발견되어 살해당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1989년 7월 12일, 세 개의 수술실을 갖춘 수술병동이 완공되었고, 그 다음날, 루실은 이곳에서 최초로 수술을 했다. 이제 병원은 350개의 병상을 갖추게 되었다.

<아프리카와 아프리카의 자유, 심지어는 아프리카의 태양까지도 사랑한 사람들>
루실은 35년 동안 라코어 병원에서 횟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을 만큼 엄청나게 수술을 했다. 하루에 평균 두 번씩, 큰 수술만 2만 번 정도는 했을 것 같았다. 1만 번의 자질구레한 수술은 제외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녀는, 의술은 하나의 ‘사명’이며 에이즈는 ‘직업상의 위험’이라는 자신의 소신이 분명히 전달되기를 원했다. 그녀는 동정 같은 건 절대 원하지 않았다. 우간다는 그녀가 한 선택이고 그녀가 따른 의무였으며, 피에로는 그녀가 사랑한 남자였다. 아프리카는 때때로 루실을 절망에 빠뜨리곤 했다. 그녀가 우간다에 정착한 이후로 의사들의 수는 1만2천 명당 한 명(1965년)에서 2만2천 명당 한 명(1995년)으로 크게 줄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녀는 이런 사실에 분개하면서 적어도 자기는 그 의사들 중의 한 명이라고 생각했다. 2만2천 명이 자기를 믿고 있다고 말이다. 그녀는 라코어 병원에서 보낸 지난 30여 년을 되돌아보았다. 확실한 건 자신과 피에로가 없었더라면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볼 때, 너무나 명백한 이 진실은 높이 평가받을 만했다. 죽음을 면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 두 사람 덕분에 그들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아직 더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병원(건물 몇 동과 의료기기들, 발전기 한 대)을 우간다에 물려주게 된 것을 만족스럽게 생각했다. 그렇지만 아프리카 농촌뿐만 아니라 다른 어느 곳에서도 병원이란, 무엇보다도 저항하려는 의지를 가진 인력人力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었다. 루실과 피에로는 헌신의 귀감이 되었고, 운명에 맞서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여주었다. 과연 이중에서 무엇이 남아 있게 될 것인가? 어쨌든 그들이 기여한 바는 사람들에게서 주목을 받았다. 1995년 5월 1일, 요웨리 무세베니 우간다 대통령은 외래 진료병동의 준공식에 참석해 지난 30여 년 동안 우간다 북부에서 일어난 온갖 재난에 용기와 결단력으로 용감히 맞섰던 루실과 피에로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루실은, 1996년에 1백50만 명이 에이즈로 사망했듯이 역시 이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녀는 우간다 굴루의 라코어 병원 안에 있는 무화과나무 그늘 아래에 묻혀 영원한 안식을 맞이했다. ‘아프리카의 테레사 수녀’로 비유되는 루실 티즈데일.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뉴욕의 유엔본부에서 부트로스 갈리 유엔총장은 격려의 편지를 보냈다. 당신이 저개발과 질병, 내전으로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을 자기 것처럼 여겼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존경할 만한 일입니다. 당신 자신이 에이즈에 감염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의사와 동시에 환자로서 당신이 발휘한 정신력은 감동적일 뿐만 아니라 당신이 평생 이루어낸 업적에 한층 더 큰 도덕적 권위를 부여합니다. 에이즈라는 죽음의 바이러스에 맞서 투쟁하는 그 용기, 에이즈 바이러스가 당신과 수백만의 아프리카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그 용기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귀감이며 영감의 원천입니다. 당신이 우간다에서 해낸 일은 에이즈에 걸린 사람들이 풍요하고 생산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환자들의 건강권健康權에 대한 당신의 줄기찬 옹호와 당신의 개인적인 약속은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된 수많은 아프리카인들을 감동시켰으며,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저는 미래의 세대들과 수많은 우리 동시대인들이 당신이 기울인 노력과 당신이 보여준 모범을 본받으리라 확신합니다. 그리하여 저희는 당신과 당신의 친구이자 파트너인 피에로 코르티 박사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생명을 앗아가고 있는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아프리카에 어마어마하게 기여했고 지금도 여전히 크게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루실과 피에로가 살아온 길>
루실Lucille Teasdale Corti은 캐나다의 몬트리얼에서 1929년에 태어나, 열세 살 때 ‘인도의 선교의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1955년 우등으로 의학 학위를 받고 몬트리올 생트-쥐스틴 병원에서 인턴 과정을 마친 후, 그녀는 소아외과 전문과정을 밟는다. 이때 그녀는 그녀와 같은 병원에서 소아과 과정을 밟고 있던 피에로를 만난다. 1960년 프랑스에서 소아외과 과정을 밟고 있을 때 피에로를 다시 만나고, 피에로는 먼저 일하고 있던 우간다 굴루에 있는 라코어Lacor에 조그마한 선교 병원의 외과병동에서 두 달간 도와줄 것을 부탁한다. 루실은 1961년 5월 라코어 병원에 도착하고 병원의 예배당에서 1961년 12월 5일에 피에로와 결혼한다. 그리고 그녀는 1985년 에이즈HIV에 걸렸음을 판명받은 뒤로도 수많은 진료와 수술활동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1996년 4월까지 꾸준히 진료를 한다. 그리고 1996년 8월 1일 세상을 떠난다. 루실은 수많은 국제적인 상을 받았고, 캐나다는 그녀를 ‘국민 영웅’이라 칭송했다.  Hospital present personnel 에, ‘환자제일주의’를 창안한 점, 다른 문화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조화롭게 통합한 점과 지칠 줄 모르는 수술로 수많은 생명을 구한 그녀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피에로Piero Corti는 1925년 이탈리아 밀라노 부근의 베사나에서 태어났으며, 우등으로 의학 학위를 받은 후 그는 방사선과(밀라노 대학, 1953)과 신경정신과(파두아 대학, 1958) 전문 과정을 수료한다. 1955년에서 1958년까지, 루실 티즈데일을 만났던 몬트리올 생트-쥐스틴 병원에서 소아과 과정을 밟은 뒤 선교사의 삶을 살고 싶었던 피에로는 인도에서 선교사로서 첫 경험을 갖는다. 1960년 인도의 ‘답사’ 여행을 다녀온 후, 그는 아프리카에서 ‘선교(내과)의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1961년 4월, 피에로는 의학용품, 약, 친척과 아버지의 친구인 실업가들의 기부금을 비행기에 싣고 우간다로 루실과 함께 치료여행을 떠난다. 그후 그는 의학과 방사선학의 대표이자 경영자이며 의학 총감독으로 라코어 병원을 이끌어간다. 1988년 이후, 꾸준히 그는 의학 전문가로서 이탈리아 정부의 아프리카 대외협력단에 관한 건강 훈련 프로젝트를 수행하는가 하면, 진료소 수준의 라코어 병원을 우간다 마케레레 대학의 인턴과정을 담당하는 당당한 대학병원으로 우뚝 세우기에 이른다. 피에로는 죽기 전까지 라코어 병원에서 진료를 계속하다가 2003년 부활절에 아내 옆에 묻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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