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무니 없는 은혜 : 손희영 목사님

2016.05.31 09:13

강중석 조회 수:9376

다음은 손희영 목사가 ‘터무니없는 은혜’란 제목으로 설교한 본문입니다.
손희영 목사는 연세대 의대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연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내과학 교수를 역임했습니다. 미국 텍사스 대학 앤더슨 암센터에서 폐암 분야 선임연구원으로 지내던 중 어릴 적부터 생각해오던 목회자의 길로 나서 현재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설교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복 있는 사람, 2014)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터무니없는 은혜

장막을 걷어라 너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 보자.
창문을 열어라 춤추는 산들바람을 한번 또 느껴 보자.
가벼운 풀밭 위로 나를 걷게 해주세 봄과 새들의 소리 듣고 싶소.
울고 웃고 싶소 내 마음을 만져 주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테야.

접어드는 초저녁 누워 공상에 들어 생각에 도취했소.
벽의 작은 창가로 흘러드는 산뜻한 노는 아이들 소리.
아 나는 살겠소 태양만 비친다면 밤과 하늘과 바람 안에서
비와 천둥의 소리 이겨 춤을 추겠네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테야.

고개 숙인 그대여 눈을 떠 봐요 귀도 또 기울이세.
아침에 일어나면 자신 찾을 수 없이 밤과 낮 구별 없어.
고개 들고서 오세 손에 손을 잡고서 청춘과 유혹의 뒷장 넘기며
광야는 넓어요 하늘은 또 푸르러요 다들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

1970년대 젊은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던 포크록 가수 한대수 씨가 작사 작곡한 ‘행복의 나라로’라는 노래입니다.

한대수
한대수! 그는 소위 말하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할아버지는 미국에서 신학을 공부한 목사요 교수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한대수가 태어난 지 백일이 채 못 되었을 때 서울대 공대를 다니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당시 수소폭탄의 세계적 권위자 밑에서 배우며 연구하던 아버지가 갑자기 실종되었습니다. 얼굴도 기억이 안 나는 아버지가 안개같이 증발해 버린 겁니다.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 후 한대수는 할아버지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외로움과 소외 가운데서 세상의 아픔과 눈물에 서서히 눈을 뜨게 됩니다. 통기타 하나를 벗 삼아 사춘기를 보낸 뒤, 그도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미국에서 그는 실종되었던 아버지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한국말을 다 잊어버렸고 백인 여자와 결혼해 있었으며, 과거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너무나 이상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늘 혼자였지만 이제 자신의 뿌리가 사라져 버렸다는 절망을 확인한 셈이었습니다.
홀로 낯선 땅에 버려져 가난과 고독,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과 씨름하며 세상의 고통과 눈물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아 살던 그가, 1970년대에 ‘행복의 나라로’라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습니다. 세상은 절망과 좌절, 고통과 슬픔으로 얼룩진 곳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영혼과 대중들을 향해서, 외로움과 슬픔을 딛고 일어나 ‘행복의 나라’로 나아가자고 목메어 외쳤습니다. 그는 뉴욕에서 한 몽골인 여자를 만납니다. 스무 살이나 연하인 그녀는 고질적인 알코올중독자로, 한 달에 술 취하지 않은 날이 고작 며칠이 안 되는 폐인이었습니다. 한대수는 그녀를 자신의 숙명처럼 떠안습니다. 일상생활을 전혀 하지 못하는 피폐한 여자의 인생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결혼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는 아내의 전남편, 마약중독에 정신분열증 환자로 폐인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는 그 사람을 자신의 집에 들여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끼니를 잇기 힘든 자신의 집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는 두 사람을 돌보는 ‘터무니없는 사내’였던 것입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런 터무니없는 인간이 있습니까?
언젠가 저는 한국으로 돌아온 그의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텔레비전 화면을 보니,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소주 30병을 연달아 들이킨다는 아내 옥사나가 취해서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었습니다. 고정적인 수입도 없고 아무것도 보장된 것이 없는 한대수 씨가 인생의 모순과 아픔을 한 몸에 짊어진 채, 이 시대의 상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향해 ‘행복의 나라’로 가자고 절규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 노래를 듣는 순간 저는 전율을 느꼈고,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습니다. 인터뷰 내내 그는 바람처럼 자유로웠으며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기풍이 서려 있었습니다.

절망의 시대
세상은 불공평하다고들 말합니다. 세상은 썩었고 기득권자의 횡포로 말미암아 부패와 모순으로 병들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불행과 고통은 이 세상의 구조적인 모순과 악 때문이며,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뒤집어엎어야 한다고 절규합니다. 좀 더 완곡하게 표현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신뢰하는 정치인을 내세우고 정권을 잡아 그러한 모순을 해결하고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려는 합리적인 노력을 기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이 세상이 너무나 단단합니다. 잘 흔들리지 않습니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라는 ‘정글의 법칙’이 너무나 강고하게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존의 질서를 바꾸려면 엄청난 피를 흘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주어야 하고, 때로는 하나를 주어도 하나를 받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인과응보와 뿌린 대로 거둔다는 엄혹한 생존법칙이 바둑판처럼 교직되어 존재하는 세상 속에서, 약하고 소외되고 삶의 자원이 결핍된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개천에서 더 이상 용이 날 수 없는 세상이 되었고, 사회경제적 계층의 이동이 사실상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사람들 대부분은 절망하고 있습니다. 죽음 외에는 고통과 저주에서 헤어날 길이 없습니다. 이러한 절망이 마치 고무껍질이 벗겨져 구리철사가 드러난 고압선처럼 가장 첨예하게 노출되어 있는 곳이, 지금도 종종 볼 수 있는 노동자들의 ‘철탑 고공 농성장’입니다. 가장 추운 몇 달 동안, 산 자의 땅에서 내몰린 그들은 차디찬 허공에 매달려서 이 시대의 슬픔과 절망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사회구조적 모순이나 인간의 고통과 비극을 해소하려는 수많은 노력이 있어 왔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작동한 적이 있었습니까?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다양한 방법으로 사회구조의 모순을 파악하고 개선하는 일에 힘을 보태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치명적으로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터무니없는 일들
국가가 한정된 자원을 가졌을 때, 이곳을 막으면 저곳이 터지고 저곳을 막으면 이곳이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변화된 정책과 조치들을 하려고 할 때면 기득권자들의 필사적인 저항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구조적 모순은 아마도 역사의 끝 날까지 존속할 것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합니다. 이토록 삭막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세상에 가끔-아니, 잊어버리지 않을 만큼 자주-이 세상의 가치체계와 병든 양심을 뒤흔드는 ‘터무니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작디작은 예가 바로 한대수 씨가 이 시대의 ‘레미제라블’(비참한 사람들)인 한 남자와 한 여자에게 행한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일, 정신 나간 사람이나 할 법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시대의 이기적인 삶의 방식과 인간의 비열한 양심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폭풍과도 같은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디 그것뿐이겠습니까? 우리는 드물지 않게 그런 일들을 봅니다. 한국전쟁 때 월남한 한 여인은 남편을 여의고 눈에 밟히는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시장에 좌판을 깔았습니다.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여름의 찌는 무더위를 견디어 가며 한푼 두푼 모았습니다. 허기진 배를 다 채우지도 못하고 살아남기 위해 돈을 모았습니다. 그렇게 자녀들을 잘 키우고 인생의 황혼에 이르자 수십억 원의 재산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가 자신의 재산을 자신보다 더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 세상으로 돌려보낸 것입니다.
한번은 기자가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어떻게 이런 장한 일을 하시게 되셨습니까?” 그러자 이 할머니가 한 대답이 똑똑히 기억납니다. “사는 동안 있어 준 햇볕이 고맙고, 발밑의 흙과 나라님이 고맙고, 고생한다고 욕본다고 손잡아 준 어르신들이 고맙고, 내 콩나물 사준 아낙네들이 고마워서, 이 세상이 고마워서…”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한 번이라도 이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 적이 있으셨습니까? 얼마나 황당합니까? 도대체 이 세상이 그녀에게 무엇을 해주었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할머니는 세상에 고마워하며 그토록 터무니없는 일을 하시고는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정말로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이와 같은 일을 볼 때 우리는 재빨리 칭찬합니다. 서둘러 경의를 표하고 그 앞을 떠나고 싶어 합니다. 혹여라도 내 양심이 그런 것을 요구하는 소리를 들을까 봐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헌금을 합니다. 교회는 그것을 모아 가난한 사람들을 돕습니다. 잘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이상은 없습니까? 우리는 개인적으로 제3국의 극빈한 아이들을 돕기도 하고 사회봉사팀을 꾸려 장애우를 방문하며 독거노인도 위로합니다. 정말, 정말로 잘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몇 걸음만 더 나아갈 수 없겠습니까?

브루스터 선교사 부부
제가 미국 풀러 신학교에서 신학과 선교학을 공부한 후로 제 영혼의 중심에 늘 살아 있는 한 가족이 있습니다. 토머스 브루스터 박사는 억만장자의 아들로 태어나 아이비리그 대학을 마친 수재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그리스도를 만난 후 선교사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수영장에서의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는 큰일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브루스터 부부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휠체어를 타고 전 세계의 선교지를 누비며, 선교사들이 현지어를 쉽게 배울 수 있는 독창적이고 탁월한 방법을 교수하여 개신교 선교 역사에 지워지지 않을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그것을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남편 브루스터 박사는 암에 걸려서 비교적 젊은 나이에 주님 곁으로 갔습니다. 홀로 남은 미망인인 엘리자벳 브루스터 여사는 아직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들 제드를 데리고 대도시 로스앤젤레스의 흑인 밀집 지역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제드가 백인이라고는 자기밖에 없는 학교를 다니던 무렵, 브루스터 여사가 가르치던 클래스의 학생들이 그 집에 가서 놀랍도록 소박한 점심 식사를 나누며 교제하던 일을 저의 기억에 영원히 남아 있습니다. 여사는 시댁으로부터 물려받은 거액의 유산을 마치 휴지처럼 쉽게 자선단체에 넘겨 버리고는 흑인 동네의 낡고 초라한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저는 그 집에서 먹었던 점심 메뉴가 뇌리에 생생합니다. 알루미늄 포일에 싸서 찐 감자와 브로콜리, 감자칩과 사괴주스가 전부였습니다. 비닐을 덮은 식탁과 낡은 카펫, 그녀가 앉아 있던 삐걱거리는 의자도 생각납니다.
흑인 인권이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이 개선된 지금도, 미국의 흑인들은 그 누구도 백인이 자신들을 마음 깊이 받아 주리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흑백의 피부 색깔은 영원한 분리와 저주의 아이콘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백인 모자가 새까만 교정으로 걸어 들어왔습니다. 이 동네에 집을 샀답니다. 그리고 이 학교에 다니겠답니다! 억만장자의 상속자인 그들이, 백인이라면 어느 누구도 쳐다보지 않을 자신들의 삶의 게토 속으로 스스로 걸어들어 온 것입니다.
저의 지나친 상상일까요? 아니요, 저는 하나님 안에서 확신했습니다. 그 어린 흑인 아이들의 솜털같이 부드러운 영혼이, 바로 이 백인 모자의 ‘터무니없는 것’으로 말미암아 처음으로 자신들이 세상에서 한 인간으로 존중받고 있다는 희미한 느낌을 받았을 거라고 말입니다. 또한 이 세상이 분리와 저주의 죽음의 땅이 아니라, 나도 그 속에서 숨쉬고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의 장소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꼈을 거라고 말입니다.

은혜, 그 터무니없는 것
이 터무니없는 것을 성경의 용어로 은혜라고 부릅니다. 은혜! 이 부드럽고 따뜻한 것,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는 진실로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요 5:1-9)에 나온 38년 된 병자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람에게 지상 최대의 행운은 자신을 연못에 넣어 줄 사람을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깡패든 도둑이든 상관없습니다. 지나가다가 그저 자신을 연못 속에 밀어 넣어 주기만 해도 그것은 대박입니다. 이 절망적인 병자, 이제는 낫고자 하는 소원과 열망도 식어 버린 지 오래된 사람에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산 것 같지만 사실상 죽은 자와 다름없는 죄인에게 온 우주를 창조하시고 모든 생명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는 이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실 분이었습니다. 병자 쪽에서 보면 오직 자기 한 사람만을 위해 세상에 내려오신, 너무나 터무니없는 분이셨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이렇게 임하셨습니다.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세상에, 내가 뭔데! 어떻게 나같이 강퍅하고 무정하고 비열한 죄인에게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생명을 주셨다는 말입니까?” 말도 되지 않는, 제대로 된 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터무니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세상을 역사의 말미까지 지탱해 주는 힘은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자유와 평등을 위한 정치적 노력과 희생도 필요합니다. 사회정의를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일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을 향하여 닫힌 인간의 모진 마음을 여는 힘, 내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가 고통과 저주에 신음하는 소리에 귀 기을이기를 거부하는 우리 영혼을 화들짝 깨어나게 하는 힘, 켜켜이 쌓인 이기심과 변명과 합리화로 옷 입은 비열한 자신을 수치에 떨게 하는 힘이 바로 터무니없는 은혜에 있습니다.
나와 우리 자녀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예수 믿고 구원받아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것도 좋습니다. 교회 봉사 잘하고 행복한 가정도 꾸리고 적당히 재물 좀 나누어 주면서 한 세상 살겠다고 하셔도 잘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렇게만 하라고 우리를 부르셨을까요? 제가 앞서 브루스터 선교사 부부와 그 아들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대수 씨 이야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과 여러분의 자녀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이 시대의 고통과 슬픔에 노출되어 그들과 함께 시련의 비바람을 견뎌 내기를 원하십니까? 세상에 대해 절망하는 이들을 항하여 “세상과 인간은 아름다운 것이며, 하나님이 마련하신 행복의 나라는 반드시 존재한다”고 외치며 그들과 함께 나아가는 삶을 살도록 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과 자녀들이 정말 세상의 가치체계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터무니없는 삶을 살아내며 혁명으로도, 분신으로도, 피흘림으로도 이루어낼 수 없는 행복한 나라를 가리키는 손가락이요, 이 어두운 시대를 밝히는 등불을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자녀들을 새롭게 올려 드리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하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한대수 씨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라도 좋습니다. 예수님이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수만 명의 군중들이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놀라고 시기하는 종교지도자들이 이를 강력하게 저지하려고 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 19:40). 우리가 하지 않으면 능히 믿지 않는 사람들, 돌들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은 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터무니없는 일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의 진수 중의 진수이며, 그 안에 온 세상을 살리는 신비롭고 불가항력적이며 신적인 능력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설교문을 쓰면서 꼭 20년 전, 브루스터 선교사의 집에서 흘렸던 눈물을 기억했습니다. 점심 식사를 하던 그날, 16개국에서 온 40여 명의 학생들은 나이에 비해 체구가 작고 얼굴이 창백했던 제드와 그의 어머니 브루스터 여사의 ‘터무니없는 일’에 압도되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아무도 먼저 일어서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때의 제 나이만큼 교회를 다닌 사람이었지만 “나는 크리스천이 아니다. 나는 크리스천이 아니다”라고 수없이 독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터무니없는 우리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너무 상식적으로 살았습니다. 내가 손해 보지 않고 내가 상하지 않는 테두리 내에서 약간씩 동정을 베풀고 사랑도 한다고 하며 살았습니다. 아니, 그것조차 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기적투성이요, 그 자체가 신비입니다. 신이 인간이 되고, 신이 인간을 위해 죽고, 신이 인간의 발을 씻기는 말도 안 되고 터무니없는 신앙체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상식적이고, 좋게 말해서 이성적입니다. 현대 교회는 신앙의 이성을 잃어버리고 혹시 있을지 모르는 천국을 보험으로 들어 이생에서 죄의 용서와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신사숙녀로 사는 참으로 점잖은 종교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종교적 동물인지라 일정한 만족과 희열을 주는 종교행위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인 줄 알고 십 년 이십 년을 지내며 영혼의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돌보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지상에 남겨진 또 하나의 성육신인 교회, 곧 그리스도의 몸은 그 몸에 그리스도의 상흔을 지니고 있습니다. 못자국 난 손과 창자국 난 허리와 가시관으로 찍긴 머리말입니다. 도대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못에 찔렸고 어떤 창에 찔렸으며 어떤 가시관을 썼나요? 예수를 믿어서 무엇을 손해 봤으며 예수를 믿어서 밥을 한 끼 굶어 봤습니까? 예수 믿어서 남에게 다 퍼주고 나니 남은 것이 없어 본 적이 과연 있습니까?
이와 같은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늘 그렇습니다. “예수를 꼭 그렇게 믿어야 합니까?”
대답은 이렇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터무니없는 일을 하도록, 터무니없는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294 [11/23 월요모임 출첵] 느헤미야 시작 file 홍진숙(삼성역) 2020.11.24 16
293 [11/10 월요모임 출첵] 삼성 에스라들. file 홍진숙(삼성역) 2020.11.10 11
292 [11/02 월요모임 출첵] 박재완형제 메시지 + 인도네시아에서도 함께 file 홍진숙(삼성역) 2020.11.03 12
291 [10/29 목요모임 출첵] 오늘도 요렇게 file 홍진숙(삼성역) 2020.10.29 13
290 [10/27 월요모임 출첵] 제주 라라랜드에서도 봅니다. file 홍진숙(삼성역) 2020.10.27 27
289 [10/19 월요모임 출첵] 오늘은 정규혁 형제님 메시지~ file 홍진숙(삼성역) 2020.10.22 12
288 [10/15 목요모임 출첵] 해와같이 빛난 얼굴들 file 홍진숙(삼성역) 2020.10.15 12
287 [10/12 월요모임 출첵] 즐거운 월요일!! file 홍진숙(삼성역) 2020.10.12 7
286 [10/5 월요모임 출첵] 우리의 월요일은 당신의 주말보다 즐겁다 ?!?!?! file 홍진숙(삼성역) 2020.10.06 13
285 43회 BBB 일터선교대회 (10.09 9:00 금요일) file 홍진숙(삼성역) 2020.09.29 16
284 모임 개설 10년 [1] 구승회(삼성역) 2020.02.11 38
283 삼성역 놀자먹 홈커밍데이~ [1] file 홍진숙(삼성역) 2017.08.03 8462
282 삼성역 모임장소 임시 변경됩니다. [2] file 홍진숙 2017.06.12 7955
281 2017 BBB 직장인선교대회 [1] file 박제한 2017.05.16 7476
280 3.6월요모임 메시지 [3] file 박진수 2017.03.07 8453
279 2017년 사경회 신청명단(14명) [1] file 최영란 2017.01.04 7637
278 성경은 하나님의 용서의 편지 박홍현(삼성) 2016.07.26 8328
» 터무니 없는 은혜 : 손희영 목사님 [1] 강중석 2016.05.31 9376
276 배려의 힘 강중석 2016.05.30 17671
275 도행역시 : 한번 생각해 보며 살아요...... 강중석 2016.05.27 8282

회원:
96
새 글:
0
등록일:
2009.09.21



오늘:
3
어제:
6
전체:
232,110

게시글 랭킹

댓글 랭킹

현재 접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