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는 고난 속에서도 기도를 멈추지 않는 행복의 섬이다. 전남 고흥반도의 끝자락, 섬의 모양이 작은 사슴과 닮은 땅. 한센병 환자의 애환이 깃들어 있는 곳이었다. 한때는 6000여명이 살기도 했다. 지금은 600여명이 기도의 용사로 사랑과 희망을 전하고 있다. 소록도는 이제 외롭고 쓸쓸한 섬이 아니다. 지난해 소록대교가 개통되면서 육지와 연결됐다. 다리 위엔 하늘 높이 길쭉하게 솟은 다이아몬드 모양의 상징이 눈길을 끈다. 육지와 섬, 일반인과 한센인이 한마음으로 화합하고 소통하라는 메시지가 담겼다.

 

1964년 한꺼번에 봉헌 예배드린 7개 교회

 

소록도에 처음 교회가 생긴 때는 1922년 10월 8일이다. 2대 원장으로 부임한 일본인 하나이 젠기스가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 구북리교회가 창립됐다. 첫 크리스마스 예배는 그해 12월 25일 성대하게 드렸다. 오전 9시에 시작해 12시에 폐회했다.

 

12년 동안은 태평성대였다. 그러나 34년 성결교 시대가 막을 내리고 ‘소록도 기독교’라 개칭하면서 탄압이 시작됐다. 하지만 교회는 계속 생겨났다. 37년에는 서성리교회가 분리됐다. 이듬해는 중앙교회가 설립됐다. 41년 태평양 전쟁이 확대되면서 교회에 대한 일제의 만행은 노골화됐다. 주일이면 더욱 심한 중노동을 시켰다. 예배당 안에 우상을 세우고, 가마니공장을 차려놓고 일일 할당량을 정해 달성을 못하면 태형 등의 처벌이 행해졌다. 살기 위해 바다를 헤엄쳐 도망가다 빠져 죽은 이와 순찰선에 발각돼 맞아 죽은 자가 수없이 많았다. 공개처형도 당했다.

 

42년 2월 참다못한 이춘상이라는 젊은이가 칼을 빼들었다. 그는 “3000명 원생의 원수는 칼을 받으라”며 일본인 원장을 살해했다. 이때 김정균 성도는 고난의 글 한 편을 남겼다. ‘아무 죄도 없고 불문곡직하고 가두어 놓고, 왜 말까지 못하게 하고, 어째서 밥도 안 주느냐, 억울한 호소는 들을 자가 없으니, 무릎을 꿇고 주께 호소하기를, 주의 말씀 따라 내가 참아야 할 줄 아옵니다(중략)…양심을 속이는 반성문을 쓸 수가 없었노라’

 

3년 후 해방이 됐지만 소록도는 또 무법천지가 됐다. 45년 8월 22일, 자치권을 주장하던 중앙교회 전도원 이경도 등 84명이 반대파로부터 생화장을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수난을 받았다.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탄압은 계속됐다.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렀던 김정복 목사는 서울 수복을 하루 앞 둔 27일 고흥경찰서 뒷산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자세로 총탄을 맞고 순교했다.

 

소록도 교회는 지금도 새벽예배를 빠른 곳은 오전 3시30분, 늦어도 오전 4시 전에 시작한다. 몸이 성한 사람은 걸어서 10분이면 갈 거리를 수십 분 동안 엉금엉금 기어서라도 예배당을 찾는다. 낮 12시를 전후 해 교회마다 오종(午鍾)을 쳤지만 요즘은 차임벨을 울린다. 가던 길도 멈추고 하던 일도 중단한다.

 

신성교회는 모교회 격인 중앙교회에서 100m 정도 떨어진 나지막한 언덕 위에 있다. 오전 3시30분. 교회로 가는 길에 사슴 두 마리의 환영을 받았다.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오래된 시골교회 풍금에서 나는 독특한 냄새가 코끝에 흘렀다. 50여명의 교인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대부분 70대 후반이었다. 예배는 1시간 만에 끝났다.

 

올해 95세의 김기현 장로는 “날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기도하고 걷고 즐겁게 찬송하는 것”이라면서 “서두르고 걱정하고 화를 안 내면 누구나 나보다 더 오래 살 것”이라고 말했다. 하모니카선교팀을 만들어 전국을 돌며 복음을 전했다는 80대 우종선 집사는 “하모니카는 가볍고 작은 악기로 숨을 쉴 수 있는 사람이면 다 불 수 있다”면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맘껏 불고 나면 새로운 힘이 솟는다”고 말했다.

 

고난과 영광을 저울질해 보려거든 그곳에 가보라

 

4시30분. 모두 다 집으로 돌아간 시간. 전동차 한 대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인심(74) 권사였다. 그녀는 여고 1학년 어느 가을 날, 자고 일어났더니 기막힌 일이 생겼다고 했다. “손가락이 휘어지고 거울을 봤더니 눈썹이 잘 안 보이더군. 그날부터 학교도 못 갔어. 소록도엔 죽을 생각으로 오빠에게 데려다 달라고 졸랐지.”

 

장 권사는 전쟁이 막 끝날 무렵 소록도에 왔다. “배만 타면 뛰어내릴 작정이었어. 어서 돌아서라고 손짓을 했지만 오빠는 눈물을 흘리며 그대로 서 있는 것이었어. 배가 가운데쯤 왔을 때 뛰어 내리려고 하는데 함께 탄 서너 명의 남자들의 내 눈을 쳐다보는 거야. 빠져 봤자 금방 건질 게 뻔했거든. 그렇게 바다를 건너 소록도에 닿자 설움이 복받쳐 눈물이 억수같이 쏟아지더군.”

 

장 권사는 ‘내일이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를 믿으면 행복해진다’는 말을 듣고 자살을 미루기로 했다. 정말 그런지 알아보고 죽어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교회를 교인이 손수 지었다고 하던데요.”

 

“5·16 군사쿠데타가 나고 몇 년이 지났었지. 어느 날 병원 구획 문제 등이 얽히면서 교회를 다 빼앗겨 버렸어. 졸지에 길바닥으로 내몰린 사람들은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예배를 드렸지. 그랬더니 땅은 줄 테니 지으려면 지어 보라는 식으로 일곱 곳을 허락해줬어. 그런데 힘이라도 남아 있는 사람들은 다 인근 오마도 간척사업에 끌려가 강제노동을 했지. 밥숟가락 겨우 뜰 사람만 남았어.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몸뚱이로 기면서 바닷가에서 모래를 긁어왔지. 벽돌도 찍고.”

 

장 권사는 교회를 지을 땅에 있는 돌과 흙을 앉아서 엉덩이와 몸으로 밀어냈다고 했다. 바닷가까지 밀어낸 다음 숟가락을 손목에 감고 모래를 퍼 담았다고 했다. 머리카락이 성한 여자들은 모두 머리카락을 자르고 꼬깃꼬깃 모아둔 돈을 다 내놓았다. 7만원 정도였다.

 

그녀의 교회건축 이야기는 1시간 넘도록 계속됐다. “거무스름하던 벽돌이 피가 묻어서 그런지 빨갛게 변하더군. 그렇게 한 장, 두 장 쌓아서 7개 교회를 지었어. 마지막으로 지은 중앙교회가 완공되던 64년 5월 17일 한꺼번에 창립예배를 드렸지,”

 

섬 안에는 병원과 중앙공원을 중심으로 중앙교회 신성교회 동성교회 남성교회 북성교회 등 5개 교회가 있다. 서성교회와 장성교회는 마을이 중앙리로 이주하면서 폐쇄됐다.

 

소록도는 고난과 영광이 공존하는 땅이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영원한 전도사로 사역하고 있는 천우열 전도사는 ‘∼찌라도 섬’이라고 강조한다. ‘두 손이 없을 찌라도’, ‘두 발이 없을 찌라도’, ‘두 눈이 보이지 않을 찌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살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이다.

 

고난은 앞으로 받을 영광에 비하면 큰 바다에 떨어지는 잉크 한 방울에 불과하다는 말이 떠올랐다. 믿는 사람의 눈은 역경 속에서도 빛난다. 영광스러운 미래를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와 사랑에 빠진 자체만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자랑한다.

 

소록도(고흥)=글 윤중식 기자·사진 윤여홍 선임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