푹푹 찌는 지난 여름

서울 성모병원에 갔다가 입원실이 없어 내려 오신 외숙모님을 모시고

점식식사를 함께 했다.

앞으로 항암치료를 받으려면 몸이 든든해야 돼요.” 하면서

편육이며 막국수며 두부며 메밀전을 시켰다.

창밖에 펼쳐진 논과 밭의 풍경은 투병중의 망중한의 시간을 주었다.

 

2주일후 (정확히 13일후)인 어제 아침, 외사촌동생 광배로부터 부고메시지를  받았다.

   ~, 그날 점심이 마지막 만찬인 걸 알았더라면 좀 더 근사한 식당으로 모실 걸.

 

3일장이라 소렴이 끝나자 곧장 대렴을 하였다.

언제나 웃고 있었고 낙천적이었으며 예뻤던 우리 외숙모,

장례지도사의 화장을 하였지만 마지막 외숙모의 얼굴은 잿빛이었다.

 

마지막 인사를 하세요라는 장례지도사의 말에 따라

 외삼촌과 자식들은 고인의 면전에 차례로 섰다.

 좋은 곳으로 가.  먼저 가 있어. 내 곧 따라 갈께. “

 외삼촌이 울먹이며 말했다.

 

 끊임없는 부부싸움으로 어머니의 속을 썩였던 양순이네 부부

 울면서 양순이는 엄마, 혼자 남겨진 아버지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잘 모실께요.”

 라고 했고 박서방은 고인앞에서 약속했다. “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싸우지 않고

 선아하고 잘 살께요.”

 

이런 일, 저런 일,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했으며 결국 어머니에게 손을 벌렸고

그 때마다 도움을 받았던 큰 아들 광배, 아직도 가난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는 그는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으며 어머니~ “ 하고 통곡을 하였다.

 

조용히 그녀의 몸에 손을 대었고 기도하였다.

평생 가족과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였던 우리 외숙모,

 쥬단학 아줌마로 화장품 가방을 들고 사창가 아가씨들을 상대하였고

 구멍가게 아줌마로, 대구양행 사장님으로 억척스럽게 일하셨지요.

 

 그러나 그녀의 말년은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 찬 시간들이었습니다.

 사업에 실패한 큰 아들은 고향 원주로 내려 와 보험설계사로 다시 시작하면서

 어머니 집에서 숙식을 하였고 이혼 한 둘째 아들은 외아들을 어머니인 당신에게

 양육을 맡겼고 출가한 막내 딸은 툭하면 부부싸움을 하고 두 아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와서 몇 날 몇칠을 있었지요.이혼을 하네 마네 하면서~

      

 지난 번 암판정을 받고 받은 보험금 천만원마저

 생활고에 힘들어 하는 아들에게 다 주었지요.

 

 다행스러운 것은 이런 와중에 그나마 당신은 조카의 전도로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주일마다 예배드리러 오셨습니다.

 혼자가 아닌 친손자 진웅이와 외손자 준흠이를 데리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말년에 우리 외숙모가 하나님을 영접하게 하신 것을 ,

 병마에 오랜시간 고통 당하지 아니하게 하신 것을

 아낌없이 주고 주님 품에 안긴 우리 외숙모에게 평안한 안식을 주십시요.

 그녀의 두 손을 잡고 교회에 나왔던 손자들에게 겨자씨 만한 믿음을 주게 하심을

 외숙모 감사합니다.

당신을 떠나 보내고 싶지 않으나 더 좋은 곳, 천국으로 가시니 붙잡지 않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

 

무언가 너에게 주었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내게 남은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단 말야
.
나는 다만 늙어 버린 나무 밑둥일 뿐이야, 미안해..."

-      < 아낌없이 주는 나무> 중에서

 

*2012. 8. 21 장례 이틀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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