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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몰입이 가능하게 한다.” (전병욱 목사) 

 

어느 교수님이 말했다.

요즘 대학생이 가장 불쌍하다고.

왜? 요즘 대학생은 열심히 산다.

잠도 줄여가며 고3같은 생활을 지속한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열정과 꿈 때문이 아니다.

취업에 대한 불안, 낙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래서 대학 4년동안 치열하게 이력서를 장식할 스펙을 위해서 준비한다.

영어, 중국어, 각종 자격증, 연수 실적 등을 4년동안 소화해 내려고 한다.

 짧은 시간에 다 잘하려고 하니, 피상적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열심히 사는데, 깊이가 없다.

치열하게 사는데, 내공이 없다. 현장에서 1년만 지나도 공부한 것이 모두 소진된다.

얕게 공부했기에 응용능력이 거의 없다. 


 

교양이 중요하다. 교양이란 ‘다른 것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내 생각, 내 뜻, 내 전공만 주장하는 사람을 교양없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다른 것의 가치를 알고, 인정하는 것이 교양이다.

목회자를 만난다. 대화와 행동, 관심사가 오로지 목회 밖에 없다.

교양없음을 느낀다. 답답함을 느낀다.

자전거도 타고, 영화도 보고, ‘꽃보다 남자’같은 드라마 이야기도 하고, 운동도 한다.

시원함을 느낀다. 이것이 교양이다.

전공말고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은 기술자이지 인격자라고 말할 수 없다.

교양이 있어야 더불어 사는 법을 안다.

세상이 경쟁과 적대만이 아니라 협력과 환대의 세계라는 것을 인식한다.

 


그러면 왜 교양을 추구하지 못하는가?

두려움 때문이다. 취업에 대한 두려움이 교양보다는 취직 기술에 매달리게 만든다.

자기 세계를 못 벗어나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기 확신없기 때문이다.

자기 확신이 없는 사람의 속마음은 두려움이다.

언제 내가 무너질지, 언제 내가 쫓겨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자기 세계 밖을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두려움을 이기는 길은 사랑이다.

사랑이 부어지기 전까지 누구도 두려움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말 배우는 아이가 있다.

틀리면 안된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평생 말 못하는 벙어리로 살 것이다.

그러나 틀려도 용납된다는 사랑의 확신이 있으면, 배울 수 있다. 성장할 수 있다. 

두려움을 이겨야 배우고 성장한다. 

두려움에서 자유하면 몰입이 가능하다.

집중력이 생긴다. 건강함은 몰입이 가능하게 만든다.

건강한 아이는 꽃을 바라본다. 그리고 꽃에 빠져들어 꽃에 몰입한다.

그래서 식물학자가 되는 것이다.

두려움이 교육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피상적인 교육으로 흐르게 한다. 

 

눅10장을 보면, 마리아는 칭찬듣고, 마르다는 욕먹는다.

왜?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는 몰입이 가능했다.

반면에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했다.

몰입이 안되는 인생이었다.

마리아가 몰입이 가능했던 이유는 사랑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마르다는 뭔가를 해야 사랑받는다는 율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사랑의 확신이 없으니, 분주한 행동은 있지만 몰입이 안되는 것이다.

요10장을 보면, 오빠 나사로가 죽는다.

마리아는 오빠의 죽음 때문에 슬픔에 몰입한다.

그래서 움직임이 없다.

반면에 마르다는 슬픔에도 몰입이 안된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뛰쳐 나가 맞이한다.(요11:20)

그리고 여러 가지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

마르다는 사랑의 확신이 없기에 슬픔에도 몰입할 수 없었다.

 

사랑의 확신이 있으면,

잠에 몰입한다.

일에 몰입한다.

놀이에 몰입한다.

뭐든 몰입하기에 피어나게 된다.

열매를 거두게 된다.

두려움은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다.

교양없는 인간으로 머무르게 한다.

사랑의 확신만이 몰입하게 하고, 피어나는 인생으로 유도한다.

 

 

임마누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