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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랑한 크리스천”(전병욱 목사) 

 


  현대인은 실패와 죄의식, 사회적인 압력으로 인해 눌려 있다.

눌림의 문제는 우울증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

무엇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다 있는 것 같은데, 허전하고 텅빈 느낌이다.

삭개오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돈도 벌었다.

세리장이니 출세도 했다.

그러나 로마의 앞잡이라는 사회적 배척이 그를 누르고 있었다.

우울한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서 밝고 명랑한 모습으로 변화된다.(눅19:1-10)

명랑하게 변화되는 길은 무엇인가?

 

 
  첫째, 삶의 자리를 바꾸어 보라.

키 작은 삭개오는 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왜? 키가 작아서? 사람이 많아서? 아니다.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삭개오는 다른 사람과 의미있는 관계를 맺지 못했다.

그래서 스스로 사람들과 떨어진 자리만 찾아 다녔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나무에서 속히 내려오라고 하신다.

내가 네 집에 유하겠다고 말씀하신다.

 

눌린 사람은 자기는 드러내지 않고, 남만 보려고 한다.

엿보기 심리가 주를 이룬다.

항상 뒷자리를 좋아한다.

들키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에 집중한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에게 다른 사람 앞에 나오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은 그의 “삶의 자리”를 바꾸셨다.

삶의 자리를 바꾸어 보라. 앞자리로 가라.

먼저 연락하는 주도권을 가지라.

적극적으로 표현하라.

명랑한 모습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둘째, 다른 곳의 영광을 내 그릇에 담으라.

삭개오는 보잘 것 없었다.

그러나 영광스런 예수님이 집에 들어가자 영광이 가득했다.

이등병이라 할지라도 장군이 머무르면 장군의 영광이 임한다.

아무리 보잘 것 없어도 예수님을 나의 그릇에 담으면 영광스러워진다.

영광은 내 안의 것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다.

영광은 모시는 것, 담는 것이다. 허락도 받지 않고,

남의 이름을 도용해서 호가호위하는 사람들이 있다.

분명 사기다.

그러나 성도는 합법적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살도록 허락받았다.

주어진 권리도 행사하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음이다.

주어진 영광으로 일하는 법을 배우라.

주어진 권위를 사용하는 법을 배우라.

 
  셋째, 예수님의 인정을 받으라.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했다’(눅 19:6)

왜? 예수님의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집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교제권으로 인정했다는 말이다.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씀 해 주셨다.

예수님이 그를 인정해 주신 것이다.

사람들이 아무리 칭찬해도 양심의 자유가 없으면 어두울 수 밖에 없다.

반면 만인이 조롱하고 공격해도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떳떳한 양심의 자유가 있으면 밝아진다.

숨은 죄, 양심과 충돌하는 것은 없는가?

회개하고, 예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라.

밝고 명랑한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성도가 될 것이다.

영혼이 웃는 밝고 명랑한 모습을 자주 보고 싶다.

 

 

 

임마누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