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전에 이형구 순장님에게 요청받고

지난 5주차때 발표한 메시지 파일을 올립니다.

 

예전 고등학교 때인가 국어교과서에

'암탉의 배를 가르고 생기다 만 알을 꺼내려 하지 말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충분한 묵상 없이 글을 쓰지 말라는 의미였습니다.

 

이런저런 상황 때문에 메시지 작성에 충분한 묵상과 시간을 들이지 못하고

정말 순종하는 마음만으로 어떻게든 메시지 작성을 '끝내는데' 목적을 두고 작성했기에

감히 메시지라고 말씀은 못드리겠습니다.

 

그냥 하나의 샘플로만 봐주시기 바랍니다.

 

그나마 짧은 시간동안 몇장이라도 작성할 수 있었던 것은

각 장별 주요내용을 하나로 정리한 것이 있었기에

그거 보면서, 인터넷과 성경프로그램(용어 반복 횟수 파악 등)을 활용하면서

끝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성경 한권(갈라디아서)을 가지고 어떻게 메시지를 만들어야하나 감을 못잡고 있을 때

첫 시간때의 김상법 순장님의 메시지가 생각나서

그 메시지를 본 것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섬겨주신 순장님들께 감사드리며

주님의 말씀이 다시 한번 이 땅에 흥왕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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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한글 없는 분들 위해서 본문을 아래에 카피해 놓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나의 나됨

 

조용민(BBB 귀납법적 성경연구 세미나)

이 세미나가 있기 전에 저는 지역대표로서 모임의 지체들이 스스로 말씀을 연구하여 영적 자양분을 섭취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약간의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 이 세미나가 시작되어 주님의 인도하심을 느끼며 모임의 순장님들과 함께 세미나에 참석했고, 벌써 오늘이 마지막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번 훈련기간중 실습 본문이었던 갈라디아서를 귀납법적으로 연구하면서 익숙하지 않던 방법으로 인해 많은 시간 씨름을 했어야만 했지만, 오히려 긴 시간동안 말씀에 노출됨으로써 제 마음속에는 갈라디아서에 담긴 바울 선배님의 고민과 당시 갈라디아 교회들의 문제를 비교적 생생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또한 공동체에 닥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사도 바울의 논리와 확신을 접하며, 저와 우리 BBB모임의 과거와 현재를 돌아보게 되었고, 또한 미래를 고민하는 기회가 된 듯 합니다.

갈라디아서가 쓰여진 시기는 바울이 1차 선교여행과 2차 선교여행 사이 수리아 안디옥에 머물 때인 A.D. 48-49년 사이에 기록되었다는 견해와, 2차 선교여행중 고린도에서 기록되었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바울이 이 서신을 쓴 이유는 자신이 전도하여 세운 교회 안에 유대인들 출신으로 추정되는 이단세력이 들어와서 바울의 사도성을 부인하고, 율법이 교묘하게 혼합된 거짓 복음을 전하면서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소식을 듣고 이를 바로잡아 그곳 형제들의 신앙을 온전케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전체적인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바울은 총 6장 중 1장에서 자신의 사도됨은 하나님이 임명하신 것임을 설명하고, 2장에서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도 바울의 이방 사도됨을 인정하였다는 내용과 함께 그 유명한 “내가 십자가에서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고백이 나옵니다. 3장에서는 모세의 율법 이전에 존재했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할례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들어 믿음이 율법에 우선한다는 진리를 설명하고, 율법은 구원의 진리로 인도하기 위한 ‘임시교사’의 역할을 수행할 뿐임을 이야기합니다. 4장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자기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감싸주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그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안타까움을 표현하였으며, 5장에서는 율법의 종이 되지 말고 진리 안에서 자유인으로 살 것과 그 자유를 성령님의 원하시는 바를 이루는데 사용하라는 권면을 합니다. 마지막으로 6장에서는 갈라디아의 형제자매들이 서로를 바로잡아 주고 짐을 서로 나누며 선한 일중에 낙심치 말 것, 자신을 속여 교만해지지 말 것 등 성도가 마땅히 살아야 할 모습을 권면하면서 편지를 마칩니다.

갈라디아서는 작은 로마서라고도 불리어지는데, ‘이신칭의’ 즉 오직 믿음으로만 의로워진다는 로마서의 내용을 축약해 놓은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들은 율법, 할례, 종 그리고 믿음, 복음, 자유와 은혜이며, 율법은 총 23회가 사용되었고, 할례가 12회, ‘종’이 12회, 믿음이 19회, 복음이 11회, 자유가 9회, 은혜가 8회가 각각 사용되었으며, 바울은 이 단어들을 통해 자신이 꼭 말하려는 내용을 전달하려 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 핵심단어들만으로도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 무엇이 문제였는지 추측을 해볼 수 있을 듯 합니다. 유대인 출신이었던 이단들은 현지의 비유대인 교인들에게 복음을 설명하면서 자신들이 이미 자격요건을 갖춘 할례와 율법을 혼합시킨 복음을 주장하였으나, 바울은 단 1%로라도 인간의 노력이 들어간 복음은 그리스도의 피를 헛되이 하는 것이라며 분명한 어조로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려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지금이야 이 갈라디아 교회내의 침투세력들을 이단으로 분명하게 규정하고 있지만, 그 때 상황에서는 그렇게까지 보지 않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리스도의 보혈을 전면적으로 부인한 것도 아닌데 할례 하나가지고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바울의 주장 때문에 생길 교회의 분란을 생각해보면 그냥 넘어가도 되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바울은 5장 1절에서 그 이유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바울은 이 상황이 할례로 끝나지 않고 점점 더 많은 율법을 요구하여 결국 복음의 본질이 왜곡될 것을 경계하였던 것입니다.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하나님은 제게 다음과 같은 점들을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첫째는, 나의 열심이 복음의 은혜를 조금이라도 가려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저와 우리 BBB 지체들은 통상 교회 다니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그리스도인들과 달리 신앙의 열정이 있고, 훈련과 사역에 대한 충성이 남다른 것을 종종 봅니다. 그러나 혹시 그 열정과 열심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은혜와 그것에 대한 감사함을 훼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처음에는 모든 것이 은혜요, BBB에서 비전과 공동체를 만난 것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가 점차 훈련을 받고 예비순장, 순장의 역할들을 감당하면서 내가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러나 순원들이 잘 따라주지 않거나 리더나 공동체에게 불만이 생기면서 주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사라지고, 결국 의무감으로 사역을 하는 모습을 나와 공동체 내에서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주님의 도(道)와 은혜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단순히 구원받게 하신 은혜 뿐 아니라, 나같이 자격없는 자를 주님의 동역자로 삼아주셔서 헛된 일에 소모될 인생을 주님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것 또한 은혜가 아닙니까? 그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보혈의 덕분이요 은혜일 뿐인데, 내가 무언가를 열심히 했음에도 그 열매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사람들이 잘 안알아준다고 해서, 리더에게 순원에게 공동체에게 불평을 한다면, 그리고 나아가서 직간접적으로 주님에게 불평을 한다면 그것 또한 순수한 복음을 왜곡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당시 갈라디아 교회들을 어지럽힌 자들도 나름대로 열심이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믿음 외에도 뭔가를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들입니다. 이번 갈라디아서 공부를 계기로 스스로를 돌아보아 오직 감사함으로만 사역하고 있는지, 혹시라도 내 의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한 은혜와 감격을 조금이라도 훼손하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길 바랍니다.

 

이 본문을 묵상하면서 주신 두번째 생각은 복음의 본질과 비본질을 잘 분별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오늘날에는 신앙의 다양한 모습들이 나타나면서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비본질인지, 어떻게 그것들을 분별해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스러울 때가 많은 듯 합니다. 세례냐 침례냐의 문제로 교파가 갈라지고 사회정의의 참여 수준을 놓고 서로 싸워 결국 분열하고 교회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모습을 자주 볼 때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본질과 비본질을 구분해야 할까요? 바울은 의외로 할례 자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갈 2:1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에 갈 때에는 할례받지 않은 디도를 데려갔고, 행 16:3에서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시키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할례를 받고 안받고가 아니라, 그것이 복음의 순수성을 왜곡시키느냐 아니냐였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6:15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할례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백성이 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서 5:25절에서 새로운 백성이란 성령으로 새 생명을 얻은 자이며, 갈 3:2절에서는 그 성령을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받을 때 함께 받았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왜곡하지만 않는다면 할례를 행하던 행하지 않던 그것은 교회의 분열 이유가 되지 않으며, 상황에 따라 서로 이해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를 분명히 하여 작은 누룩이 점차 퍼지는 점을 경계해야 하겠지만요. 이 기준을 분명히 기억한다면 예수 제자 공동체가 분열되는 일은 현저히 줄어들 수 있을 듯 합니다. 우리 BBB도 과거 대표의 신학공부 및 목사안수 문제로 인하여 분열의 아픔을 겪은 적이 있습니다만, 다시 그런 일들이 없기 위해서는 갈라디아서에 있는 바울의 가르침을 꼭 기억해야만 할 것입니다.

 

본문 관찰중 주신 세번째로 보여주신 것은 바울이 자신의 이방인 사도로 부르신 소명과 복음에 대해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갈 2:8에서 바울은 주께서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다고 분명하게 자신의 정체성과 소명을 밝히고 있습니다. 평생 여러 차례의 전도여행중 많은 지방들을 돌아다니며 목숨의 위협을 받기도 하고, 애써 세운 교회가 이단의 손에 흔들리기도 하며, 결국 그가 마지막 감옥에 갇혔을 때 대부분의 동역자들이 떠나간 상황에서도 마지막까지 열정을 잃지 않았던 바울의 열정과 한결같음은 바로 하나님이 자신을 이방의 사도로 세우셨다는 분명한 정체성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한 정체성을 가진 바울을 통해 저를 살펴봅니다. 저는 예수님과 원수된 삶을 살다가 직장생활 2년을 보내던 중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곧 BBB로 연결되었습니다. 제 신앙성장은 대부분 BBB 내에서 이뤄졌고, 비록 시간은 꽤 걸렸지만 그 과정에서 주께서 저를 직장선교사로 부르신 소명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순장으로 섬기면서 애써 양육한 제자들이 떠나가고, 남들에게 보여줄만한 지역대표로서의 열매는 잘 보이지 않았으며, 포기해야 할 많은 대가 앞에서 가족의 불만과 반대를 참아내며 사역해야 하는 상황들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온 것은 바로 저를 직장선교사로 부르신 소명의식 때문이었습니다. 처음 직장사역을 7~8년 할때는 제가 직장선교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제가 직장선교를 위해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직장선교라는 소명이, 직장선교사라는 정체성이 저를 붙잡아주고 있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소명이란 한 때의 열정이나 열심이 아닙니다. 나무가 다듬어져 한번 연필로 만들어졌으면, 그 물건은 글을 쓰는데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한번 만들어진 연필을 의자나 이쑤시게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연필은 글을 쓰는 데에 사용되거나 아예 사용되지 않은채 쓰레기통에 들어가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이 분명한 결단이 있어야 하나님은 나를 사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분명한 소명의식을 따라 살았던 바울이 가장 가치있는 삶을 살았듯이, 저와 여러분 모두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음을 믿고, 그 계획이 바로 이 척박한 시대에 척박한 땅 직장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을 확신하고 나아가는 축복의 삶을 살길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생각나게 하신 찬양 한 구절을 되새기며 메시지를 마칩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