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규 칼럼] 이동현 목사 사태를 보며
이민규 교수(한국성서대학교) l 등록일:2016-08-04 17:18:54 l 수정일:2016-08-04 17:52:16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뭣이! 뭣이 중헌지도 모름서…"
"자네는 낚시를 헐 쩍에 뭣이 걸려 나올지 알고 허나?
그놈은 그냥 미끼를 던져분 것이고 자네 딸내미는 고것을 확 물어분 것이여."
"우리 딸, 우리 딸 살려야 디여…. 그 새끼 꼭 잡아야 디여…."

범인을 끝끝내 못 잡은 영화 곡성에서와 달리, 현실에서는 한 여고생을 성적으로 짓밟은 목회자의 과거가 밝혀졌다. 정말 뭣이 중할까?  

여고생을 성적으로 이용한 한 유명 청년사역자에 대한 사람들의 착각이 있다. 찬양인도와 설교로 청소년들을 감동시키는 그의 특별한 능력을 성령의 사역이라 오해한 것이다. 물론 한때 그랬을 수도 그리고 부분적으로 그래 왔을 수는 있다. 
 
그에겐 분명 청소년들을 사로잡는 뛰어난 카리스마가 있다. 그리고 핵심을 찌르는 바른 말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러나 겉보기에 그의 공적인 사역이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능력과 유사해도 성령의 역사와 별 관계가 없을 수 있다. 

종교적인 사람일수록 카리스마와 신령함을 지독하게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기독교 안에서 카리스마는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의미하는데, 이 용어가 기독교 밖에서는 영적인 것과 상관없이 그저 "사람들을 심복시켜 따르게 하는 능력"의 뜻으로 널리 쓰인다. 첫 번째 카리스마와 두 번째 카리스마는 분명히 다르다. 

물론 신령한 체험이 사람들을 따르게 하는 권위적 카리스마로 이어지는 경향은 있다. 하지만 늘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처음엔 순수하다가도 점차 욕망에 젖어 살다 보면 육적인 사람으로 변질되기도 쉽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서의 권위는 사라진 채, 그저 사람들을 심복시키는 차원의 인간적인 능력이 계속 강하게 남아있을 때 문제는 커진다. 

일반적으로 권위적 카리스마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몸짓과 억양, 말투, 언어 등으로 설득력 있게 잘 홍보하고 사람들을 기막히게 선동할 줄 아는 능력이다. 사람들은 이런 카리스마가 강한 목사에게 쉽게 사로잡힌다. 그리고 그가 신령할 것이라고 믿고 이성까지 접으며 마음을 내 준다. 콩깍지가 씌우면 때론 돈과 시간뿐만 아니라 몸까지 조종당한다. 그렇게 되면 물질과 정신이 유린당한다. 그러나 신령한 것은 카리스마와 같은 것이 아니다.  

예배 중 찬양을 잘 인도하고 감동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능력이 탁월해 사람들을 잘 모으는 이들이 있다. 그럼 '그들의 능력=신령함'이란 공식이 성립될까? 세상에서 음악가나 연기자만큼 감동을 잘 주는 이들도 드물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그만큼 인격적이거나 신령한 것은 아니다. 감동적인 영화라 해도 거기 등장하는 인물은 연예인일 뿐 영화 속 동일인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카리스마가 있는 사역자들도 평소의 모습은 전혀 다를 수 있다. 신령한 것은 또다른 문제다. 

그럼 신령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신령한 것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하는 것이나, 그들의 의지를 조종하는 것과 큰 관련이 없다. 신령한 사역자는 영적 에로티시즘적인 자기도취에 중독되어 있지도 않고, 타인에 대해 심리적으로 건강하며, 제자들을 조종하거나 기만하지 않는다. 신령한 목회자는 제자들을 심리적으로 의존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가 결정하고 영적인 체험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준다. 

신령한 이는 자신을 매우 평범하게 여기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선택하여 이 세대와 온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과대망상에서 자유롭다(세상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에게 주어진 것과 하루하루의 삶에 충실할 뿐이다. 

신령한 것은 '자아'가 사라질 때 나타나는 지혜와 사랑이다. 결국 세상을 향해 어리석은 자만이 누리는 축복이다. 그러나 단순 카리스마가 강한 이의 능력은 진정한 사랑이나 성령충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정신을 조종하고 마케팅을 잘하는 연기력이다.

필자는 종교적 열심이나 소명에 사로잡힌 이들이 두렵다. 날이 갈수록 그들 중엔 진짜보다 가짜가 더 많기 때문이다. 사기꾼들이 넘쳐나고 판칠수록 진짜가 무시당하고 고통의 나날을 보내기 쉽다. 그러니 무엇이 중할까? 영화 곡성의 또다른 대사가 답을 준다. 하나님 아닌 인간적 카리스마에는 "절대 현혹되지 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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