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마나인 하나님

2018.08.09 08:09

박상형 조회 수:28

<style type="text/css"> p.p1 {margin: 0.0px 0.0px 0.0px 0.0px; font: 11.0px 'Apple SD Gothic Neo'; -webkit-text-stroke: #000000} p.p2 {margin: 0.0px 0.0px 0.0px 0.0px; font: 11.0px 'Apple SD Gothic Neo'; -webkit-text-stroke: #000000; min-height: 13.0px} span.s1 {font-kerning: none} </style>

아나마나인 하나님(행24:24~25:5)



총독 벨릭스는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바울을 2년 동안이나 감옥에 잡아두었지만

바울에게는 상당히 호의적 이었다.



왜냐하면 바울이 전하는 도를  자신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래서 아내를 대동하고 바울을 불러

그가 전하는 말씀을 듣기도 한다.



(24)며칠 뒤 벨릭스는 유대 사람인 아내 드루실라와 함께 나타났습니다. 그는 바울을 불러들여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에 관해 바울이 설명하는 것을 들었습니다(25)바울이 정의와 자기 절제와 다가올 심판에 대해 설명하자 벨릭스는 두려워하며 말했습니다. “이제 됐다! 가도 좋다. 내가 편한 시간에 다시 부르겠다(26)동시에 그는 혹시 바울이 자기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 바울을 수시로 불러들여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신앙은 

알고 있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적용하는데 있었다.

적용없는 믿음은 아나마나이기 때문이다.



유대인 아내를 대동하고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들었지만

바울의 강론이 의와 절제와 장차오는 심판인

개인적인 문제로 되어가자 두려운 마음이 생겨

이야기를 중단시킨다.



두려운 마음이 어떤 것이었을까?



의는 무엇이 옳은가? 인데

황실의 노예였던 자신이 총독의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더럽고 추악한 행위가 찔렸을 것이며



절제는 아내 드루실라에 대한 이야기 인데

전 남편을 버리게하고 자신과 결혼하도록 만든 것과

바울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 도를 듣기 위함도 있지만

돈을 바라는 그 욕심이 절제에 해당되었을 것이며



그러한 삶의 결과로는 도를 안다고 해도 장차오는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경고의

멧세지로 들렸을 것이다.



그 두려움을 받아들였어야 했는데

그래야 그 두려움과 함께 믿음이 자리를 잡을 수 

있었을 텐데 그것을 피해버렸다.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명성교회 세습을 찬성하는 예장통합총회의 판결을

보고서 말이다.



왜 그런 판결을 내리게 되었을까?



교회가 무엇이 옳은지?

어떤 욕심을 절제해야 하는지를

이젠 모른다는 말인가?

혹 찬성을 원하는 누군가가 돈을 뿌린 것은 아닐까? 



찬성표를 던진 재판국원들은

이 판결결과가 자신들과 직접 관련이 없다고

생각해서 찬성표를 들은 것일까?



하나님을 알긴 아는데

적용에는 실패하는 벨릭스와 같은 모습을

우리의 교회가 보여주어야 하는가 말이다.



남의 문제가 아니다.

나의 문제이다.

의와 절제와 심판에 대해 두려운일이

나에게 있지 않은가?를 늘 생각해야 한다.



그 말이 나를 찌를 때 결코 피하면 안된다.

그 말이 나를 살리는 말이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맘이 무겁다.

(2018. 08. 09. 목요일)


카페 정보

회원:
3
새 글:
0
등록일:
2016.12.07

로그인

오늘:
0
어제:
6
전체:
69,146

신입 회원 소식

게시글 랭킹

댓글 랭킹

현재 접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