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너무나 잘 아시는

2020.04.25 07:51

박상형 조회 수:2

나를 너무나 잘 아시는(신9:22~29)

 

 

지금 이스라엘은 몇 발자국만 움직이면

들어갈 정도로 가나안 가까운 곳에 있다.

 

 

가나안 입성을 목전에 두고 있는 이 때에

모세가 이스라엘에게 하는 말은 격려의 메세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사기를 복돋아 주는 말도 아니었다.

또 지난 40여년간 고생했으니 이제 꽃길만 걸을 것이라는

희망을 주는 일도 아니었다.

 

 

모세의 말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반역을 일삼은 그 동안의 일을

되새김질해주는 것이었다.

 

 

좀 좋은 말을 해 주면 안될까?

 

 

가까운 길을 돌고 돌아 40여년을 걸어와

이제 곧 목적지에 도착하려는 이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이 과연 이것 뿐일까?

 

 

알만한 분께서 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맞다. 알만하기 때문에 이러는 것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안다.

사람이 하나님앞에 어떤 존재인지 알기에

이러는 것이다.

 

 

모세가 아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앞에 늘 반역만

일삼은 그런 민족이었다.

(24)너희는 내가 너희를 안 뒤로 줄곧 반역만 일삼아 왔다.

 

 

이스라엘은 모조리 멸망을 당해도 할 말이 없을만큼

충분한 반역의 이유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여기까지 이끌고 오셨다는 것이다.

 

 

그것을 알고, 그것을 명심한 채로 가나안에 

들어가야 되기 때문에 이러는 것이다.

 

 

가나안은 믿음의 깃발을 높이 들고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과거에 내가 어떤 존재였는지 알고, 

틈만 있고 여차하면 반역할 수 있는

존재임을 명심하고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다.

 

 

이 말은 마치 구원받았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니라

내가 구원받을 만한 존재가 결코 아닌데

구원해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며

믿음생활을 해야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지 싶다.

 

 

믿음의 최고 무기인 성령의 검은,

적의 목을 자르고 사탄의 심장을 베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나를 주장하는 것들을 베고 자를 때

최고의 무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제 한 순원과 말씀의 유익에 대해 나누었다.

우리가 나는 말씀의 유익은 

나를 매력있는 사람으로 만들고, 

다른 이들에게 사랑받고 존경받는 

멋진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죄를 지었을 때,

내가 믿음이 아닌 세상의 생각을 따라가고 있을 때,

그것들을 자르고 몸을 돌리게 해서 

다시 믿음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에 있다는...

 

 

말씀은 회복의 능력을 주는 것이지

성공의 능력을 주는 것이 아니라고,

 

 

믿음의 길이 아닌데 크게 되면 뭐 할 것이며

믿음의 길이 아닌데 멋지면 뭐 할려고...

 

 

모세가 하나님에게 기도를 한다.

울부짖으며 누구도 못 알아듣는 말을 섞어가며

떼를 쓰고 막무가내로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설득하고 있는 기도였다.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키며 

말씀으로 하나님을 설득하고 있다.

 

 

받을 수 있으려면 하나님을 설득하면 된다.

하나님을 설득하려면 나를 알고 말씀을 알아야 한다.

그럼 하나님이 설득 당하신다.

하나님은 내 말이 아닌 말씀에 설득당하신다. 

하나님을 설득할 수 있는 것은 말씀밖에 없다.

 

 

나는 말씀으로 하나님을 설득할 능력은 없는 것 같고

일단은 믿음 밖으로 삐져나온거 다시 집어넣고

삐져나오려고 하는 거 못 나오게 하는데

집중적으로 사용하시도록 부탁해 보려고 한다.

 

 

말씀은 나를 너무 나 잘 아시니까!

(2020. 04. 25.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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