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보다는 저주

2020.06.02 08:12

박상형 조회 수:16

축복보다는 저주(신27:11~26)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간 후
6개 지파는 축복을 위해 그리심산에 서고
또 다른 6개 지파는 저주를 위해 에발산에 선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축복과 저주를 선포해야 했다.(11~12)


저주와 축복을 선포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누구는 왜 저주를 선포해야 하고
누구는 그 좋은 축복을 선포해야 했을까?


나는 축복하고 싶은데 저주를 해야만 하는
지파는 없었을까?


저주는 마귀가 하는 짓이고
축복은 천사가 하는 짓이 아니었던가?


아니다.
저주는 나쁜 짓이고 축복은 옳은 일이 아니다.


저주가 사람에게 필요없는 것이라면
축복만 많이 하라고 하셨을 텐데
하나님은 축복과 저주를 꼭 같이 나누시고 배분하셨다.


저주와 축복은 같이 다닌다.
하나님이 저주와 축복을 함께 놓아두셨다.
그러므로 저주의 길로 갈 것이냐
축복의 길로 다닐 것이냐는 내 선택에 달려있다.


사람들은 축복에 환호한다.
칭찬에 고래가 춤추길 바란다.
칭찬에 고래가 춤출 수 있다.
하지만 고래가 춤 출 수 있는 것은
칭찬이 아닌 훈련에 의해서 이다.


꽃길만 밟고 가라고 한다.
하지만 꽃 길은 흙길이다.
비가오면 질퍽거리고 비가 안오면 말라 갈라지는...


비가 적당히 오고
햇빛이 비춰야 흙길의 꽃이 꽃 다와진다.


우리의 마음은 축복에만 가 있다.
그래서 저주를 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축복의 묵상에 아멘을 하던 사람이
저주의 묵상을 하니 욕하고 가 버린 적이
여러번 있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공평하게 나누어서
축복과 저주를 하게 하신다.


예쁜 지파는 축복을 하고
미운 지파는 저주를 하게 하신 것이 아니다.
그들 모두는 가나안에 들어갔다.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가자 마자 하는 일이
축복과 저주의 선포였다.


그냥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면,
아니 축복의 말만 하게 했었다면
이스라엘이 과연 축복의 삶만 살았을까?


하나님이 축복과 저주를 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부흥은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영원히 죽지 않는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다.
그 말씀이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괜히 찌르고 쪼개는 것이 아니다.
축복을 받을 준비가 된 내 혼과 영을
말씀이 찌를 리 없다.


내 안에 좋은 마음, 좋은 생각이 들어있는데
그것을 잘라내기 위해 말씀이 내 의도를
굳이 밝혀 끄집어 내실 필요가 있을까?


내가 축복보다는 저주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가 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다.


그래서 나도 오늘 레위인이 선포하는 저주의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한다.


말씀이 저주받을 혼과 영과 마음들과 생각들을
찔러 쪼개주시기를 소망하며...
(2020. 06. 02. 화요일)


카페 정보

회원:
3
새 글:
0
등록일:
2016.12.07

로그인

오늘:
6
어제:
3
전체:
69,146

신입 회원 소식

게시글 랭킹

댓글 랭킹

현재 접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