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풍성함(19:14~21)

 

풍성함은 넉넉하고 많다는 말입니다.

 

그 풍성함 속에는 욕심이 들어있지만

그 단어를 굳이 끄집어 내지만 않는다면

풍성함의 의도(풍성해진 이유)를 알게 됩니다.

풍성함에는 더 풍성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풍성해 졌는데 더 풍성해지지 말라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지고 있고 보여지는 것만이 풍성함이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알면서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지고 있으면서도 주지 못하는

어설픈 풍성함이 아니라

나누어주는데 진정한 풍성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내 풍성함의 원조입니다.

예수께 받은 새로운 생명은

떼어 나누어 줄 수 있는 생명입니다.

 

내가 생명을, 그것도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 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풍성함 속에는

남아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더 풍성함입니다.

 

그 말은 풍성함에 안주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 말은 풍성함을 방치하지 말자는 말입니다.

풍성함에 더 풍성함이 없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주신 풍성함이 아닙니다.

 

태어난 것보다 더 풍성한 것은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태어난 것을 의심하고

성장하지 않으면 왜 날 낳았냐고 불평하기

때문입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내가 태어난 목적을 알 수 없습니다.

내가 태어난 목적은 내가 더 풍성해 지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의 죽음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내가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의 죽음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내가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때리고 십자가에 못 박고 죽인 사람만

예수를 반대하는 사람이 아니라

구원받고 성장하지 않는 사람도

예수를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성장해서 더 풍성해지면

하나님이 만드신 이웃과 분쟁하는 일은

없게 될 것입니다.

 

내가 더 풍성해지면

내게 싸울 힘이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죽을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를 위해 예수가 죽었다면

남을 위해 나도 죽을 수 있는 것,

그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더 풍성함 입니다.

(2011.04.17.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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