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께서 지속적으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계속 계시해 줄 것을 기대하고 믿습니다.

그리고 계시를 통해서 우리를 계속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어제 저녁에 여러분과 함께 나누기 시작했던 것을 지속적으로 나누기 원합니다.

 

우리가 어제는 마13장의 구절을 읽으며 함께 나누었습니다.

마13:19절에 :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그래서 어제 여러분과 나누기를 부흥도 이와 동일하다‘ 라고 말씀드렸어요. 우리가 진정한 깨달음이 없이 그것을 주님께 구할 때 이것을 놓치기 너무나 쉽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제 저녁에는 하나님만이 이러한 부흥에 대한 깨달음과 이해를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렸어요. 그래서 모든 사람이 부흥을 위해서 기도할때는 주님! 우리에게 부흥을 주시옵소서. 이렇게 단순하게 기도함을 통해서 시작한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 마음이 진심을 가지고 전심을 가지고 부르짖을 수 있어요. 그리고 열정적으로 기도할 수 있어요. 그리고 주님께 주님! 주님이 우리가 필요한 것을 보지 않습니까!라고 기도할 수 있어요. 주님! 그러니 제발 우리에게 부흥을 주십시오. 그리고 주의 성령을 우리에게 쏟아 주옵소서.

 

그러나 자주 이러한 종류의 기도로서는 어떤 기도의 응답을 받기 어렵다는 것을 말씀드렸어요. 그리고 어제 나누기를 어떤 사람들은 이런 과정에서 피로해지고 멈추어 버린다는 것을 말씀드렸어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절대로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님은 진정으로 주시기를 원한다는 사실. 그것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렸어요.

요한복음 6장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누구든지 나에게 오는 자를 내가 거절하지 않는다‘라고 말씀하셨어요. 렘33장에서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그리하면 내가 크고 비밀한 일을 너에게 보이리라’라고 말씀하셨어요. 성경에서는 아주 여러곳에서 우리가 주님을 찾고 찾으면 우리가 주님을 찾고 발견하게 될 것에 대한 그런 확신을 주는 말씀이 많이 있어요.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구체적으로 너희가 악한자라도 좋은 것으로 너희 자녀에게 줄줄 알거든 얼마나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성령을 구하는 자에게 그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셨죠. 저는 그래서 다는 어떤것보다도 특별히 특정하게 하나님께 성령을 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기 원합니다.

야고보서 말씀을 읽음으로 어제 저녁 시간을 마감했는데요. 지혜가 없는 자는 후회함이 없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께 와서 지혜를 구하라‘ 하신 말씀이죠. 그리고 우리가 구할때는 의심한점 없이 믿음을 가지고 구해야 된다고 했어요. 의심하는 자는 아무것도 주님께 받지 못한다 그랬죠. 그래서 우리가 주님 앞에 주님!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습니까? 우리의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구한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시고 우리에게 보여주신다는 것을 말씀드렸어요.

 

그런데 우리가 동시에 깨닫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르게 이 과정을 거친다는 사실이에요. 단계가 다르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기초를 더 단단하고 견고하고 더 단단하게 기초를 놓는 것을 우리에게 사람들에게 가르칠수만 있다면 사람들이 더 빨리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 때문에 몇몇의 지도자들이 함께 모였어요. 그래서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과제를 주어서 역사를 공부하고 성경을 공부해서 이 모든 과제에 대해서 더 깊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그렇게 시작햇어요.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 바른 올바른 깨달음을 주는 것이었어요.

 

우리가 첫 번째로 연구한 주제는 “부흥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것이었어요.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죠. 어떤 사람들은 그 정의가 무엇인지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우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만 알고 있으면 된다‘ 라고 말을 하죠. 그러나 우리가 이 질문에 더 깊이 있게 상고해보면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우리가 부흥의 의미가 무엇인가! 우리가 정확히 알 때 우리가 어떠한 대가를 치를 수 있는가! 우리 스스로 준비를 더 잘 할수 있기 때문이에요.

 

첫 번째로 ‘부흥’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없어요. 성경에서는 ‘부흥시키다’라는 그런 단어들이 있어요. 우리를 다시 새롭게 하소서. 부흥시키소서. 이러한 말은 있어요. 그래서 주님께서 주님의 눈이 온 세상을 다니면서 자신을 부흥시키기를 원하는 자들을 찾으신다‘라는 말씀은 성경에 있지요.

그러면 과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흥시킨다는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피조물을 부흥시킨다는 그의미는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부흥시킨다’라는 그 단어를 쓸 때 항상 영적으로 뭔가를 새롭게 하고 이전으로 회복시킨다‘라는 의미로 그것을 사용을 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떤 영토에 운행하실때는 하나님의 영을 새롭게 하는 신성케하는 그일 이상의 것을 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어요. 하나님은 피조세계도 터치하시고 아니면 사회 여러 요소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시고 관섭하시는 일도 하시고

어떨때는 한 나라의 정치적인 그 상황에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기도 하시고 어떨때는 전쟁의 상황에도 하나님께서 그곳에 간섭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부흥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중의 하나는 ‘리즈 하월즈’라는, 웨일즈라는 곳에서 온 사람이에요. 이반로버츠로부터 시작된 웨일즈 부흥에서 나온 사람이에요. 그가 예수님을 그 부흥기간에 영접했어요.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순복을 요구하시고 요구하시고 요구하시는지에 대해서 어제 나누었지요.

 

부흥의 첫 번째 경험, 그곳에서 주님은 중단하시지 않는다고 했어요.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완전한 순복, 완전한 항복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부르신다 했어요. 그래서 이 사람도 한번 순복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주님 앞에 순복하는 과정을 거쳤어요. 그리고 그 매 단계마다 그는 하나님의 더 강력한 권능을 체험했고 더 큰 권위가 임하는 것을 그가 체험을 했어요.

 

그래서 저는 이책, 어떻게 하나님께 순복하는지에 대한 책인데 이 책을 다 읽기를 권면합니다. ‘중보자 리즈하월즈‘라는 그런 책이에요. 웨일즈 부흥에서 그가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는 또한 남아프리카로 보내졌어요. 그리고 또 그곳에서 부흥을 일으키는 개척자의 역할을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그가 웨일즈로 돌아갔을 때 중보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이디오피아’에 대해서 또한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이디오피아’를 위해서 너가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그의 기도를 통해서 이디오피아는 아프리카 전 대륙에서 한번도 식민지가 되본적이 없는 나라가 되었어요.

그 나라를 위해서 그 사람이 계속 기도했고 이탈리 사람들이 공격을 해서 그 나라를 정복하려고 했을때도 이디오피아의 황제가 영국으로 오게 될 것을 리즈하월즈에게 주님께서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웨일즈에서 그 황제가 오는 것을 너가 받아들이는 것을 준비해라‘ 하셨어요. 그래서 그가 본대로 받은대로 다 일어났어요. 그리고는 그 황제가 리즈하월즈를 통해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어요. 나중에는 그 사람이 이디오피아로 돌아가서 이디오피아가 완전히 자유를 되찾을 수 있게 되었어요.

 

이러한 역사 뒤에 있는 하나님의 목적은 드러난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심오한 것이죠. 그래서 제가 이러한 보기들을 여러분에게 나누는 것은 ‘과연 부흥이란 무엇인가’를 나누기 위해서에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부흥시킨다‘라는 말의 뜻이 과연 무엇일까요. 몇가지 정의를 여러분과 나누기를 원해요. 더 정확한 그림을 보여주기 위해서.

 

어느날 우리가 한 방에 여러 목사님들과 함께 모여 있었어요. 그리고 그 모든 지도자들이 각자가 부흥의 정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를 다 받아 적게 했어요. 성경에서는 부흥이라는 단어가 나오지는 않지만, 바로 부흥시키다‘라는 어떤 사람이 체험하는 그 체험에 대한 그 정의가 무엇인지를 각자 적도록 했어요. 그래서 각자가 다 그것을 적었어요. 사람들이 다 적은 것을 모아서 그것을 공개적으로 하나씩 읽기 시작했어요.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어요. 어떤 사람은 적기를, 이것은 하나님의 운행하심인데 그 운행하심의 결과로 많은 영혼이 추수되는 것이다’라고 말했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로 회복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정의를, 이것은 성령의 권능이 큰 기사와 이적과 표적을 낳으면서 운행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적기를 성령께서 강력한 찔림을 사람들에게 주어서 사람들로 말미암아 회개하게 하고 변화되게 하는 것이다‘라고 했어요.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주 번영하는 것이고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가 전 나라에 확장되는 것이다’라고 적었어요. 이 모든 것들이 다 옳은 말이죠. 다 부흥에 대해 진실히 말하는 그런것이에요.

 

그런데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오직 한가지만을 볼 수 있도록 보여주었는데 우리가 부흥의 한 요소에만 초점을 맞추고 다른 요소는 무시할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에요. 우리가 그 한 요소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면 그럴때는 우리의 믿음이 다른 요소들을 끌어 안을 수 있는 만큼 믿음이 확장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에요. 어떨때는 우리가 다른 요소들을 끌어안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의 운행하심을 중단시키고 거부할수도 있다는 사실이에요. 그리고 우리의 표적이 그렇게 크지 않기 때문에 그 모든 대가를 지불하기를 자원하는 마음이 없을 수도 있다는 거에요. 웨일즈에서 사람들이 부흥을 위해서 기도했을 때, 이반로버츠의 때에, 교회들이 다 동의함으로 주님께서 대 추수를 주실 것을 믿음으로 화합을 했어요. 그들에게는 큰 추수라는 것이 ‘수천명의 영혼들이 구원되는 것이다’라는 그런 개념을 가지고 있었어요. 왜냐면 그 당시에 사람들의 영적이 레벨이 너무나 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어떤 사람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너무나도 힘든 그런 시기였어요.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 수천 수만명의 사람들이 구원된다는 것은 굉장히 큰 개념이었어요.

그래서 그들이 기도했어요. 그래서 그들이 10만명의 영혼이 구원되는 그 목표를 위해서 그것을 믿음으로 구했어요. 성령께서 마침내 그들에게 부어졌을 때 그리고 부흥이 시작되었을 때 수만명의 영혼이 구원되는데 6개월밖에 걸리지 않았어요. 6개월 기간동안에 10만명의 영혼들의 이름을 다 기록할 수 있었고 그 영혼 한사람 한사람에게 어떤 어떤 교회로 가는지까지 그들이 결과를 다 가지고 있었어요. 오늘날도 그 기록이 있어요. 오늘날도 그 기록이 남아 있어서 몇 명의 사람이 성공회 교회로 갔고 몇 명의 사람들이 회중교회로 갔고

이러한 기록이 남아 있어요. 그 6개월이 지난 후에 그 부흥을 지도한 지도자들이 이제는 더 이상 방향 감각을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그들 사이에 논쟁이 있었고 그들이 동의할 수 없는 것들이 있었고 그리고 부흥이 죽어가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거기서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부흥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좁았다는 것이에요. 그들의 목표는 그저 영혼들을 구원하고 그 당시에 너무나 세상적인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변화시키는. 거기까지가 그들이 가졌던 목표였어요. 그러나 우리가 말했던것보다 훨씬 더 넘어서 그 차원을 넘어선 많은 부흥의 이야기들을 우리는 알고 있지요.

 

어제 여러분과 나누었던 것처럼 우간다에서는 전쟁의 상황에서도 주님이 어떻게 간섭하셨는지, 그리고 우간다 전역에 퍼져있던 에이즈라는 즉흥상황을 하나님이 어떻게 간섭하시고 개입하셨는지에 대해, 그리고 콜롬비아에 있는 범죄율에도 어떻게 하나님이 간섭하셨는지, 과테말라나 아니면 사람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어떻게 하나님께서 완전히 변화시켰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죠. 그리고 가정폭력들을 하나님께서 완전히 어떻게 변화시키셨는지, 그리고 완전히 주술과 알콜리즘이 편만한 그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에 대해서, 범죄율을 하나님께서 완전히 낮추시고 4개의 감옥소가 죄수들로 가득찬 것을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완전히 그 감옥을 비우게 하셨는지 그리고 그 영토 자체를 하나님께서 흙 자체를 터치하셔서 그 소산이 이전보다 4배로 증가 될 수 있도록 어떻게 하셨는지 , 휘지의 상황을 어떻게 하나님이 회복시키셨는지, 우리가 성경에 나와 있는 것으로만 돌아가 볼지라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볼 수 있죠. 그들의 전쟁도 싸워주셨고 전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기적들을 행하셧는지를 볼 수가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내려오셔서 주님이 예비하신 주님이 원하시는 그러한 사람들로 우리를 회복시켜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이 이것은 굉장히 큰 기도에요.(24:45)

이것은 단지 영적인 새롭게 하심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가 우리의 사고방식을 더 확장시킨다면 하나님께서 과연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시는가!에 대한 것을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죠.

우리의 가정들, 하나님의 가정들로서 하나님은 무엇을 믿으시는가! 그리고 우리의 결혼생활에서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기 원하시는가! 그리고 우리의 부모 역할이나 자녁역할에서

무엇을 기대하시는가! 그리고 우리의 가정이 어떤 모습이기를 하나님은 원하시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디자인 하셨을 때 하나님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그냥 영적인 영역만을 말하는게 아니라 신체적인 것만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재정적인 것만을 말하는게 아니라 사회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영역뿐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모든 통틀어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가!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주님! 우리를 부흥시켜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할 때, 하나님! 주님이 원래 생각하고 계셨던 그 그림속으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하는거예요. 바로 하나님께서 원래 디자인 하신 하나님왕국의 그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죠.

그런데 왜! 부흥이 중단됩니까? 첫 번째, 그 부흥을 개척했고 시작했던 사람들이 그 부흥에 대한 믿음을 그들이 제한시켰기 때문이에요. 그들이 기도했던 그 시점까지 이르렀을 때 그들의 믿음이 더 이상 나가지 않기 때문에 그냥 중단하는 거예요.

어떤때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른 영역들까지도 터치할 수 있는지 그들이 보지 못하는 거에요. 그래서 그들이 그것에 대한 믿음도 가질 수 없는 것이죠. 아니면 그들이 원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들이 원하던 그 소망, 그것이 이루어졌을때는 거기서 멈춰버리기를 그냥 원하는 거에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창6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세요. 나의 영이 사람의 영과 계속적으로 씨름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거부할 때 주님은 강요하지 않으세요.

 

그래서 우리가 그 방에 모여 있던 사람들마다 각자 부흥에 대한 정의가 다 달랐던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진정을 가지고 말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제는 이것을 가지고 이 모든 것을 통괄 할 수 있는 하나의 정의를 만들어 보자‘ 했어요. 우리가 이것을 하루만에 할 수가 없었어요. 한달이 되도 그것을 할 수가 없었어요. 우리가 계속적으로 모여서 뭔가 좀 진전이 있는 듯 하다가는 또 다시 헤어지고 다시 모이고를 거듭했어요.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모든 것을 통괄하는 하나의 정의를 내리는데 이르렀어요. 저는 절대로 이것이 오직 하나의 정의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의로서 우리가 이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다라는 동의에 이를 수가 있었어요.

 

그 단순한 정의는 이것입니다. 부흥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방문하심이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방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더 크게 나타내 보이시는 거다. 여기서 중요한 요소는 뭣이냐면, 어디에다 초점을 맞추냐면 하나님이 반드시 오셔야 된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임재가 반드시 오셔야 된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께 반응할 수 있도록 우리가 깨어나야 된다는 것이다. 그럴 때 그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더 크게 확장, 드러나는 것이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 왕국이라 말할때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원래 가지고 계셨던 창조할 때 가지고 계셨던 하나님 마음속에 있던 그 디자인, 그 그림을 말하는 것이에요. 아멘.

그래서 이것을 짤막하게 설명을 하자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수 있죠. 왜! 하나님께서 내려오시겠습니까? 만약 하나님께서 오셔야 한다 할때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전에는 계시지 않았다는 뜻입니까? 하나님이 내려오셔야 한다면 하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성경에서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분은 무소부재하신 분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진리이다. 하나님은 모든 순간에 모든 곳에 계시는 분이시죠. 그러므로 주님이 오신다 할 때 주님이 오시기 전에도 거기 오셨다는 걸 우린 알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을 거절하실 수 있다는 거에요. 우리가 여기 있고 하나님도 여기있는데 하나님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죠. 우리가 주님을 체험하지 못할 수 있는 거에요. 우리가 마치 고아와 같은 상태 같은거에요. 아주 텅비고 건조한 땅에 그렇게 고아처럼 있을 수 있다는 거에요. 우리가 회개하고 주님의 뜻 가운데로 돌이킬 때 우리가 주님을 체험할 수 있도록 허락하시죠. 그럴 때 그것이 우리 영혼에 축복이 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 주는 것이죠. 그렇게 주님이 주시는 그것이 은혜를 통해서 주시는 것이죠.

 

성경에 보면, 이 비유를 통해서 설명을 해 주세요. 주님께서 내려오신다‘ 라는 표현을 쓰시는 거에요. 그리고 성령이 그 위에 임하였다’ 그 표현을 쓰시는 거에요.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표현할 때 비유적으로 표현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죠. 하나님은 항상 거기 계셨지만

이렇게 내려오신다는 표현을 비유적으로 쓴다는 거에요. 아멘.

 

그러니까, 주님의 임재로 오시옵소서‘ 라고 기도할때는 하나님이 거기 계시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우리로 체험하게 해 달라’ 라는 의미로 기도한다는 그런 뜻이에요.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더 크게 드러나고 나타내진다‘ 라고 표현을 쓸 때, 하나님 나라가 그 이전에는 우리에게 전혀 보여지지 않는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죠.

우리가 모든 교회에 하나님 나라가 그곳에 임해 있는 것을 어떤 단계 단계에 따라서 볼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더 큰 분량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여 달라는 것이죠. 하나님의 원래 소원하는 그 소원으로 우리가 더 많이 회복시켜 달라고 우리가 그렇게 표현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방문하심이다’ 이렇게 말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르면 그 하나님의 방문하심은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왜냐면, 주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나에게 속한 것’을 보여주시겠다, 했어요.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속한 것이 또 내게 속한 것이다. 라고 말씀했어요. 그리고 성령께서 나에게 속한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가지고 갈 것이다‘라고 말했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구하는 것은 성령님께서 우리를 더 큰 분량으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여 주실 것을 구한다는 사실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찾을 때 이러한 것을 알고 있으면 더 구체적으로 더 초점을 맞추어서 구할 수가 있게 되죠.

 

예를 들어서 첫 번째로 우리가 질문하는 것은 성령님을 매료시키는 요소들이 과연 어떤것들입니까? 성령께서 간절히 보기 원하시는 것들이 어떤 것들입니까? 우리가 이런 지도자들이 모여서 자신들이 생각하는 정의를 적었을 때 성령께서는 겸손함을 사랑하시고 그리고 우리의 깨어진 상태를 사랑하시고 그리고 우리 아버지를 찬양하는 찬양을 사랑하시고.

그래서 이런 리스트가 계속 될 수 있어요. 그런데 제가 또 다른 질문을 한번 해 보겠어요. 성령님에게 거부감을 주는 것들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아니면 성령님을 근심하게 하는 것들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성령님을 완전히 불을 꺼버리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우리 마음을 깊이 찾아보아야 했어요. 그 리스트를 작성하기 위해서. 그래서 우리가 하는 건 흥미로운 과정이었어요.

아! 우리가 부흥에 대해서 이야기 하자!‘ 라고 말하면, 모든 사람이, 아! 우리가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라고 다 동의해요.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이런 요소들이 성령님이 좋아하는 것들이다. 그러면 얼마나 우리가 우리의 회중들에게 가르치고 있는냐?(38:38)

얼마나 우리가 우리의 성도님들에게 성령님이 좋아하는 것들을 얼만큼 가지고 있고 얼만큼 가지고 있지 않은가에 대해서 얼마나 가르치느냐! 아니면 우리가 성도님들에게 자신은 스스로 겸손하다고 생각하지만 진정으로 깊이 볼 때 얼마나 그들이 겸손하지 않고 교만한가! 그런것들. 그리고 얼마나 성령님이 좋아하지 않는 것들, 거부하는 것들을 그 인생에 자기 삶에 얼마만큼 가지고 있는가를 볼 수 있도록 어떻게 가르치느냐? 그리고 사람들이 과연 그들안에 성령님이 싫어하시는 것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볼 때 어떻게 그들을 도와서 그들이 그것을 제거하고 회개함으로 변화될 수 있는가를 얼마만큼 하고 있는가!

 

그러면 어떤 사람이 그 리스트를 보고 이 모든 것들을 자기에게서 제거하는데 10년이 걸릴수 있지 않은가! 그것이 10년 걸릴 수 있는가! 아니면 5년 걸릴 수 있습니까! 아니면 2년 걸립니까! 성령님의 불을 꺼트리는 이 모든 것들을 우리가 제거하는데 얼마나 걸립니까, 성령님을 근심케하고 슬프게 하는 요소들,

우리가 진정으로 그러한 것들에 초점을 맞추고, 주님! 제가 이것을 다 제거하길 원하고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그것을 완전히 덮기를 원합니다. 그럴 마음이 얼마나 있는가! 음. 그들이 정말 가볍게 기도를 한다면, 정말 그들이 기도하고 기도해서 1월달로부터 12월달까지 지속적으로 똑같은 기도를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믿음을 창조해 낼 때 그리고 진정한 변화에 우리가 열심을 소유한다면 당신이 지금 하는 것이, 지금 고백하는 것이 잘 효율적으로 되지 않으니까, 무엇이 당신이 전진하는 것을 막고 있는가를 보라고 우리가 말할 수 있죠.

 

“왜 내가 변화되고 있지 않은가?” 내 안에 있는 이것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데 그리고 내가 계속 주님께 시인하고 고백하는데 그리고 주님앞에 내려놓는데 그런데 내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 않아요. 그럴 때 그저 ‘너 자신을 예수님의 발 앞에 던져라’ 그리고 주님께 부르짖어라. ‘주님! 나를 구원하소서, 그리고 나를 자유케 하소서, 그리고 내 눈을 열어주소서,

내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게 하소서, 내가 이 모든 것을 시인하고 고백했는데 내가 이것이 떠나가야만 하는데.

 

왜냐면, 성경에서는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주님께서 항상 그것을 사해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이 진정으로 뭔가를 고백했는데도 그것이 떠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여러분이 진정한 뿌리를 터치하지 못하고 있을 수 있는 거에요. 그래서 아직은 그것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 있을 수 있는 것이죠. 그래서 아직은 여러분이 이것을 진정으로 다루지 못하고 있을 수 있어요. 여러분의 마음은 진정일지 모르지만 뭔가 여러분의 하는 것이 잘못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앞에 나가서, 주님! 내 마음을 아십니다. 나는 지금 가식적으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내가 외식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심으로 진정으로 나는 이 안에 있는 것들을 제거하기 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떠나지 않다면은 내가 뭔가 다루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증거해 주는 거에요.

 

그럴 때, 여러분 스스로를 분리해서 주님 앞에 홀로 나가야 되는 것이죠. 그리고 주님 앞에 구해야 되요. 주님! 내 인생에 있어서 주님 말씀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내 눈을 열어주옵소서. 내가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그냥 그곳에 여러분 머물러 있어야 되요. 거기서 주님께 아주 간절히 구해야 되요.

 

성경에서 주를 앙모하는 자는 새 힘을 얻을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어요. 그러므로 주님앞에 기도 하다가 신속하게 일어나 떠나지 말고 그 발 앞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되요.

 

우리가 함께 이 연구를 진행하고 있을 때, 우리가 서로 서로에게 진심을 털어놓자‘ 라고 말했어요. 우리가 진정으로 이것을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성도님들이 동일한 과정을 통과하도록 우리가 하고 있습니까? 그 중에 한 지도자가 난 그렇게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과연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 하나님, 하나님의 성령을 우리에게 쏟아 주시옵소서’ 기도하는데 ‘주의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 주옵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마음에 성령님의 마음에 슬픔을 주는 것들을 진정으로 우리가 다루고 있지 않은거에요.

성령님으로 성령님을 거절하게 하는 그런 요소들을 그냥 계속적으로 성령님 우리에게 쏟아 부으소서. 근데 주님이 쏟아 부어지지 않는 거에요.

 

여러분 이사야59장의 말씀을 아시죠! 59장1절과 2절 말씀이에요. 우리가 함께 한번 보겠습니다.

사59: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아멘

 

얼마나 자주 사람들이 주님 앞에 나아와서 부흥을 달라고 수년동안 수년동안 기도하고 기도하면서도 진정으로 자기 삶에 어떤 요소들을 다루지 않는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납니까? 그리고 난 다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우리가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을 해요.

 

여러분 아까 함께 읽은 구절을 이해하시죠. 누군든지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원수가 와서 그것을 훔쳐간다고 말했어요. 어떤 사람이 부흥을 위해 기도하며 그가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음을 가지고 구할 때, 깨닫지 못하고 기도하면 원수가 와서 그 체험까지도 빼앗아 가버려요.

 

그러므로 지도자들로서 서로 서로 깊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어요. 이 과정을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가? 그 성도님들에게 그 안에 성령님께 거부감을 주는 것을 어떻게 제거하도록 그들을 도울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성령님이 매료될 수 있는 분위기를 그들이 창출해 낼 수 있는가? 성령님이 좋아하는 그러한 컨디션, 그러한 조건을 우리가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는가? 그냥 기도시간에만 그러한 조건, 환경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환경이 우리 환경의 삶이 되도록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래서 이제는 우리 인생 자체가 성령께 아주 매력적인 인생이 되도록 만드는 거죠. 그래서 이 과정도 우리 지도자들에게도 배우는 그러한 과정이었어요. 왜냐면 우리가 체험하지 못한 것을 우리 성도님들에게 지도자들에게 가르칠 수 없기 때문이죠.

 

지금까지 말한 것은 우리의 개인적인 삶을 들여다 보는 것에 대해 말을 했어요. 그런데 부흥은 우리의 개인적인 것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죠. 또한 우리의 영을 초월해서 일어나는 것이에요.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했던 우리의 존재 전 영역을 아우르는 것이에요.

우리의 가정, 가족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가족에게 어떻게 부흥이 일어나도록 할 수 있습니까? 그것도 동일한 원리에요. 부흥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주님께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방문하심인데, 그리고 부흥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방문하심이다 할 때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우리에게 무엇입니까?

성령께서 우리에게 더 가까이 오시고 더 깊게 임하시는 것이라고 했죠.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더 많이 원한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러면 과연 우리 가족에, 성령님을 거부하는 것, 성령님을 밀어내는 요소들이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그리고 우리 가정 안에 무엇이 성령님을 근심케 하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리고 어떤 요소들이 성령님의 불을 완전히 꺼트릴 수 있습니까!

우리가 정직하게 이러한 모든 것을 적어봅시다. 그것을 그냥 생각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 적어보자고 했어요.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가자 했어요. 그냥 단순히 고백하는 그 차원이 아니라 진정으로 주님께 고백하기를,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오는 것은 이 모든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환경과 모든 분위기를 성령께 매력적인 것을 만들기 원합니다. 우리가 그냥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변화 진정으로 우리가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그 다음엔 또 어떤 복잡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해요. 왜냐면 우리 가정안에는 어떤 사람은 거듭나지 못한 그러한 멤버들도 있기 때문에, 어떤 가족의 멤버들은 이러한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죠. 성령을 근심케 하는 요소들을 제거하는데 절대로 협조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거에요. 우리는 주님 앞에 가서 주님, 우리는 이것을 제거하기 원합니다.하고 기도하는데, 다른 이 가족들은 이것을 더 많이 가정안으로 가지고 들어오는 거에요. 그럴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첫 번째는 우리 자신을 먼저 다루는 것이죠. 우리가 우리의 순종이 온전해질 때 다른 모든 것들을 책망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루는 일에 성공을 하면 두가지 일이 일어나게 되요.

첫 번째는 우리의 인생이 개인적인 부흥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죠. 우리가 우리의 삶에 더 많은 성령님을 이끌어 들이기 때문이고 그리고 우리의 삶을 통해서 그분이 역사 하시는 것을 더 많이 개인적으로 체험하게 되죠. 그리고 그 사실로 인해서 우리의 그 기도가 더 강력해지게 되겠죠.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성령의 은사가 더 쉽게 흘러나갈 수 있게 하겠죠. 그런걸 통해서 이전보다는 더 훨씬 더 효율적으로 우리 가정에 주의 성령이 임하기를 기도하는데 더 좋은 고지에 우리가 설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런 다음에라야 우리 가족 멤버들을 우리가 취해서 주님앞에 나가는 거에요.

 

주님! 이들을 바라보지 마십쇼. 그들을 대신해 나를 다루소서. 그들이 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들이 하는 말이 무엇이든지, 주님을 근심케 하는 무슨 일을 하든지, 나에게 다루십시오. 그리고 그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 일을 행하신 것이에요. 예수님께서 아버지 앞에 나가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무슨 일을 행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 모든 것을 나에게 임하게 하소서. 우리가 나에게 임하게 하소서‘ 라고 말할 때 그걸 통해서 우리가 대가를 지불해야지 되요. 예수님께서도 대가를 지불하셨어요. 그러한 것을 통해서 우리가 자유케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이 믿는 자로서 여러분이 사랑하는 불신 가족들을, 그들의 죄를 나에게 임하게 하소서. 그리고 매일 매일 주님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나가서 부르짖는 것이에요. 여러분이 지금 가지고 있는 그것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가는 것이에요. 주님 용서하여 주시고 이 죄를 씻겨 주옵소서.

 

그러나 먼저 우리 자신 스스로를 다룬다고 말했죠. 우리가 고백했는데도 우리 안의 어떤 요소들이 떠나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럴 때 어떻게 합니까? 주님 앞에, 주님 내가 보지 못하는 부분이 무엇입니까?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기(마음)에 나를 잡고 있는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러한 동일한 방법으로 사랑하는 자들을 우리가 운반하는 거에요. 그리고 동일하게 주님 앞에서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는 것이에요. 그들이 아직 변화되지 않고 있다면 다시 주님 앞에 나가서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에요. 주님, 내가 보지 못하는게 무엇입니까, 바로 그 죄의 뿌리가 무엇입니까? 그 대가가 무엇이든지 주님 나에게 그것을 보여주시옵소서. 그러면 내가 그 모든 것을 내가 계속해서 순종하겠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지금 구하는게 뭐냐면 ‘ 나에게 보여주십시오, 이 사람 안에 있는 그 멍에의 뿌리를 보여 달라고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에요. 나에게 보여주소서. 이 사람의 사고방식, 그리고 그 사람을 그 포로 가운데 지금 붙들고 있는 그 계약적인, 언약적인, 어떤 언약들을 붙들고 있는지 그를 완전히 묶어 놓고 있는 멍에가 무엇인지 보여 달라고 기도하는 거에요.

 

근데 하나님께서 약속하고 계세요. 그것에 응답할 것이라고. 그럴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시작할 것입니다. 어떨땐 하나님께서 그 가정에 어렸을 때 일어난 일을 우리에게 보여 주실수도 있어요. 그가 어린아이였을 때 그가 학대 당했던 그런 체험이 있을수도 있어요. 그것을 보여 줄 수도 있어요. 그가 어렸을 때 학대를 당했기 때문에 이제 그것이 그 삶을 통해 드러날 수 있는 거에요. 바로 그 멍에가 그를 이끌고 가고 있다는 거에요. 그래서 그들의 인생에 더 깊은 차원으로 여러분이 들어가 볼 수 있는 거에요. 그리고는 그를 학대했던 자를 위해서도 여러분이 기도를 할 수 있는 거에요. 그리고 주님 앞에 이렇게 기도하는 거에요. 그 죄를 나에게 임하게 하소서. 그리고 그것을 내가 지고 갈 수 있는 운반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소서.

 

그래서 이 역사를 통해서 부흥을 위해 기도했던 모든 기도가 진통의 기도를 한다고 말하는 것이에요. 우리가 진통을 하는 기도를 한다는 것이 아주 깊은 차원으로 그 뭔가를 출산시키기 위한 엄마의 진통의 통증을 통과하는 기도를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지금 여러분이 지고 있는 그 상황에 대해서 아주 진통하면서 기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에요.

 

여러분 모세를 기억하시죠. 시내산에 올라갔던 모세, 출애굽기32장에 나오는 그가 이렇게 말했어요. 생명책에서 내 이름을 지우십시오. 그것은 나에게 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에요. 나에게 내가그 책임을 돌리라고 기도하는 것이에요. 그리고 그들은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죠. 그랬더니 하나님이 ‘아니다’ 그러셨어요. 내가 그들을 용서해 주겠다‘ 했어요. 아멘.

 

우리가 그 모든 사람들을 지고 갈 수 있는 거에요. 돌파를 이룰때까지 그런데 이 과정은 세단계로 역사되요

첫 번째 단계는 깊은 회개의 단계, 처음에는 굉장히 힘들고 우울하고 나를 완전히 짓누르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여러분이 그러한 과정을 느끼고 있다면 아직은 돌파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줘요. 그럴 때 주님앞에 지속적으로 구해야지 되요. 나를 도와주소서. 주님께서는 인류의 모든 죄를 가장 먼저 지고 가지 않으셨습니까! 내가 어떻게 다른 사람의 죄를 질 수 있는지 가르쳐 주옵소서. 나에게 보여주소서.

 

성경에서 요한일서 3:16절에서 이렇게 말해요. 이것이 사랑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가 생명을 우리를 위해 내어 주었어요.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 목숨을 다른사람을 위해서 내려놓자. 바로 성경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어요.

 

여러분 잠시 멈추고, 얼마나 많이, 얼마나 자주, 우리가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면서도 이러한 대가를 지불할 마음이 없었는지를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는 왜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지 우리는 궁금했어요. 우리가 이렇게 뿌리에까지 다다르는 깊은 회개와 진통하는 기도와 통곡하는 기도, 이 기도를 지속할 때 마침내는 우리가 그 뿌리에까지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개인적인 그 완전한 순복이 이미 주님 앞에 놓여져 있기 때문에 이러한 때가 이르르면 우리의 중보가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시점이 오는 거에요. 그리고 우리의 기도의 분위기가 무르익는 때가 오는 거에요.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시작하는 것이죠. 그 멍에가 무엇인지, 그들을 묶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흑암의 권세가 그들을 어떻게 묶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의 소경됨이 무엇인지, 우리의 포로된 것이 어떤 것인지, 우리의 멍에가 무엇인지,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돌파의 단계에 이르르게 된거에요.

 

이제는 자비를 구하는 기도를 계속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임해서 이제는 멍에를 깨트릴 수 있는 그러한 일을 하고 포로를 자유케 하는 일을 실제적으로 우리가 할 수 있게 되는 거에요. 그럴 때 우리의 기도는 우리가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서 대신 싸우는 기도가 되는 것이죠.

그리고 사단에 대해서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거에요. ‘너는 더 이상 이들을 포로로 잡고 있을 수 없다. ’ 이제는 너희가 이들을 미혹할 수 없다. 이제는 그들을 떠나 보내라. 그의 손을 놓아라.

 

우리가 그렇게 기도할 때 성령께서 우리를 계속 인도해 주시죠. 우리가 어떤 표적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우리가 무엇을 파쇄해야 되는지,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해줘요. 우리가 이땅에서 무엇을 묶든지, 하늘에서도 그것이 묶는다고 했어요. 우리가 이땅에서 무엇을 풀든지 하늘에서 그것을 풀어준다고 했어요. 그러한 때가 올 것입니다.

아! 우리가 이제 승리를 얻었구나‘ 느끼는 때가 오게 되요. 그리고 이제는 이러한 멍에가 파쇄 되었구나. 그 다음에, 우리가 그들을 돌이키도록 부를 수 있어요.

 

이사야 14장에서 이렇게 말해요.

북을 향해서 너가 선포해라. 그리고 남을 향해서 선포해라. 그리고 그들을 돌이키도록 불러내라.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러내라‘ 그랬어요.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그 마음을 향해서 그때 선포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들의 인생을 향해서 예언을 선포하기 시작하는 거에요.

 

이럴 때 여러분에게 이 말을 하기 원합니다. 여러분이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그때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인생이 완전히 변화되게 되는 것을 여러분이 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시간문제에요. 성령을 근심케 하는 모든 요소들로부터 그들이 자유케 되는 것을 보는 것이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완전히 마음을 여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66:42)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 앞에 마음이 깨어지게 되요.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갈망하는 마음이 생겨요. 그리고 도움을 구하기 시작해요. 그럴때라야 이제는 우리가 가정에서 부흥을 체험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이것을 한번 테스트 해 봤어요. 이것은 좋은 가르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목사님들이 그들의 교회 돌아가서 성도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들의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서 싸울 수 있도록 도왔어요. 그랬더니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가정에서 모든 역사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어요. 많은 가정들에서 .

 

그런데 그 일을 하는 과정에서 목사님들이 그들의 성도님들이 이러한 과정을 거치도록 가르치고 그 과정을 통과할 때 또 다른 질문이 우리에게 왔어요.

그러면 우리 교회에 회중안에 무엇이 성령님께 근심을 하게 하고 거절하게 하는 요소가 있는가! 그 말뜻은 우리가 이렇게 함께 모일 때, 우리가 교회에 와서 더 많은 신선케 함을 얻고 힘을 얻어서 이제 우리 가정으로 가서 그런 영적인 싸움을 싸우기 원하는데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모였을 때 여기 어떤 요소들이 있는가!

한 교회 회중으로서 우리가 어떤 사람에게 손가락질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 모일 때 우리 가운데 어떤 요소가 성령의 마음을 근심케 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가 그것을 내려놓자. 성령님의 불을 끄거나 성령님을 거부하는 어떠한 요소들이 우리 모일 때 회중에게 있다면 하나님 우리에게 이것을 볼 수 있도록 눈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자‘ 했어요. 그래서 그것을 다 적었어요. 우리가 이것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갑시다. 그리고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함께 공동체로서 그렇게 하자고 했어요. 이 모든 요소들이 우리의 회중에서 완전히 제거되고 사라질때까지 그렇게 하자고 했어요. 그리고 주님 앞에 이렇게 함께 고백하자.

 

하나님! 우리의 회중 가운데는 연약한 자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직도 포로된 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죄가운데 갇혀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유케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우리가 함께 이렇게 주님 앞에 고백합니다.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시옵소서. 한 회중으로서 우리에게 임하도록 하시옵소서. 한 회중으로서 우리에게 임하게 하옵소서. 주님 앞에 우리가 그렇게 나아갈 때, 주님! 주님 앞에 죄를 범했습니다. ‘라고 고백?하는 거에요. 주님의 길로 우리가 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등을 주님께 돌렸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령의 불을 꺼트렸습니다.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옵소서. 그리고 우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우리를 변화시켜 주옵소서. 우리가 변화될 수 있는 은혜를 부으소서. 그래서 그러한 동일한 과정을 또 한 것이에요. 우리의 회중으로서 무엇이 포로로 머물게 하는가! 이 상태로 머무르게 하는 거에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요소가 무엇인가! 그러한 과정을 우리가 또 공동체로서 하는 거에요. 그리고 깊은 진통하는 회개의 기도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가는 거에요. 아주 깊은 진통하는 중보를 하면서 주님 앞에 가는 거에요. 우리는 아무도 판단하지 않고 정죄하지 않는 거에요. 우리가 그들의 죄의 짐을 함께 지겠다는 자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는 것이죠.

 

주님! 그 짐을 우리게 지게 하소서. 공동체로서 그렇게 하는 거에요. 하나님께서는 첫단계를 우리로 통과하게 하시고 그리고 다음 두 번째 단계를 또 통과하게 하세요. 그 두 번째 단계에서 이제 우리가 이제는 모든 멍에를 파쇄하고 싸우는 그리고 모든 소경된 것을 깨트리는 그러한 단계로 가는 거에요. 그리고 모든 미혹을 깨트리는 단계로 가는 것이죠. 이제는 그것으로부터 또한 돌파하게 되는 것이죠.

그 다음에 우리가 선포하고 예언하고 그것을 공포하는 그런 단계로 우리가 옮아가는 거에요. 그래서 그 단계에 이르를 때야 우리가 모든 회중의 사람을 불러 낼 수 있는 거에요.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는 그 단계에 모두 설 수 있도록 . 그래서 주님 앞에 주님, 의도하셨던 그런 교회 모습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주님의 교회가 성취하기를 원했던 그

목표를 우리가 다 성취할 수 있도록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이런 과정이 왜냐면 모든 성도들은 다 어딘가에 와서는 성령을 깊이 마셔서 힘을 얻어서 가정으로 돌아가서 또 싸울 수 있는 힘을 얻어야 되기 때문에 그런 다음에라야 그들이 가정으로 돌아가서 가족을 위해서 싸울 수가 있어요. 그리고 주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아멘.(74:19)

 

그래서 온 회중으로서, 교회 한 회중으로서 이 과정을 통과한 이 교회는 그리고 또한 그들의 가족들이 이 주님의 심방을 체험하는 그러한 일이 역사될 때 이제는 그 교회는 이제는 도시를 감당할 수 있는 교회가 되는 것이죠.

바로 그럴 때 공동체로서 회중이, 주님! 우리가 무너진 벽 사이에 우리가 서겠습니다. ‘라고 주님 앞에 설 수 있는거에요. 주님 이 나라를 위해서 그 무너진 틈 사이에 우리가 서겠습니다.’ 하는 거에요. 그런데 그 과정도 비슷한 과정을 거치는 거에요.

우리가 주님의 제단에 우리의 삶을 다 내려놓고 이렇게 말하는 거에요. 이 도시에서 범해진 모든 죄들을 주님! 우리에게 돌리소서. 그리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소서. 이것을 우리에게 가지고 올 수 있는 은혜를 우리에게 부으소서. 그리고 돌파할 수 있는 은혜를 주소서. 그리고 이 도시를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우리에게 부으소서. 이 도시의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부으소서. 절대로 그들을 판단하지 않고 그들을 정죄하지 않고 그리고 그들을 포기하지 않는거에요.

주님! 우리가 구합니다. 저들을 주님의 피로 덮어 주옵소서. 그래서 도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것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소서. 그들의 행한 행위들의 결과가 우리에게 임하게 하소서. 매일 매일 그렇게 주님 앞에 나가는 것이에요. 그리고 부르짖는 것이에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이 도시에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우리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우리를 변화시켜 주옵소서.

 

그리고 다시 한번 주님께 이렇게 구하는 겁니다. 주님! 이 도시를 포로로 머물도록 하는 요소가 무엇입니까? 주님 그 뿌리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슨 대가를 우리가 지불해야 되는지, 주님 우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우리가 나눌 수 있는 많은 다른 요소들이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방금 그 영역만 하더라도 우리가 깨닫는 것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부흥을 기도합니다. 우리가 부흥을 위해 우리 도시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 부흥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 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냥 단순히 ‘우리에게 부어 주옵소서’ 하는 식이에요. 우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요.

하나님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이 아닙니다. 주님의 귀가 듣지 못함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가 주님과 우리 사이에 거리를 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로부터 주의 얼굴을 숨기시는 것이죠. 그리고 우리의 기도를 듣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의미하는 바가 이것이에요. 겔22:30절에서 내가 그들 가운데 이런 사람을 찾는다 하셨어요. 이 땅을 대신해서 무너진 틈 사이에 설 자를 찾는다 하셨어요. 내가 이 진노를 붓지 않아도 되도록, 그런데 아무도 찾지 못했다‘ 그랬어요. 그 말뜻은 아무도 대가를 지불할 사람이 없다는 뜻이에요. 나의 진노로부터 이 도시를 구원할 그 대가를 지불할 사람이 없다는 거에요. 그리고 나의 심판이 이 나라에 임하는 것으로부터 이 나라를 구원할 대가를 지불할 사람이 없다는 거에요. 그래서 그냥 나의 심판으로 놔두었다. 그리고 그 죄에 그냥 맡겨놓았다. 그들의 범죄가운데 그냥 놔두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 매일 매일 행하신 것이 이 일이었어요. 설교하신 후에 그분은 산으로 올라가셨어요. 그리고 주님 앞에 부르짖는 기도를 했어요. 우리의 죄를 지시고 그가 또한 십자가에서 하신 일이 그 일이죠. 그리고 아버지 앞에 그가 말했죠.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자신이 행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가 그것이에요.

 

우리가 이제 마감하기 전에 이 구절을 함께 읽기 원합니다.

요일3:16절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성경에서 우리에게 이것을 하라고 지금 우리를 부르고 계신 것이에요.

그래서 고린도후서5장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과 화해를 하시고 그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았다. 말씀하셨어요.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그 죄를 그 세상에 돌리지 않고 화해를 하실 수 있었습까? 왜냐면 그분이 자신의 아들을 내어 주셨기때문이죠. 그 세상의 죄를 다 아들에게 임하게 하셨어요. 그리고 모든 포로들을 자유케 하셨어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것처럼 내가 너희를 보내노라‘했어요. 그리고 다 가서 화해케 하는 사역자들이 되어라’ 그랬어요.

 

우리가 세상으로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죠. 바로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자에요. 그리고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는 거에요.

우리가 그냥 하나님! 우리에게 부흥을 보내 주소서. 그것 가지고는 절대 될 수가 없어요.

많은 사람이 당신은 대가를 지불할 마음이 있습니까? 그래요. 그런데 그들이 그 대가가 무엇인지 알지 못해요. 우리가 나누었던 그것조차도 모든 대가를 말해준 것이 아니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나눈 것이 핵심적인 대가죠. 바로 그것이 구속하는 보여주는 모델이에요. 우리는 그것을 구약에서도 볼 수 있고 신약에서도 볼 수 있어요.

 

여러분 에스겔 아시죠.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 네 옆으로 누우라’ 그랬죠. 아주 오랜 날 동안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그가 그 자세를 바꿀수 있는 것도 허락지 않으셨어요. 왜그랬어요. 다른 사람의 죄를 지고 가는 그 일이 바로 그 일을 통해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구속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어요.

 

그것은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의 가족들이 부흥을 체험하는 일은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가능합니다. 도시가 부흥을 체험하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가능합니다. 한국의 부흥을 체험하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대신해서 무너진 틈 사이에 설 그들을 찾고 계신 것이에요. 이렇게 기도할 그런 사람들을 찾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도록 하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가르치길 원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길 원하세요.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셨어요. 그리고 이 세상을 구원하셨어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의 제자가 되길 원한다면,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그러셨죠. 여러분 이웃(옆사람)에게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십쇼’ 라고 하세요.

여러분의 옆사람에게 그렇게 말하세요.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십시오.

 

우리가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구하겠는데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세요. 여러분의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세요.

그런데 첫 번째로 여러분이 기도하기를 원하는 것은 여러분의 옆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세요. 옆사람이 성공하면 이것을 하는 일에 옆 사람이 성공하게 되면 여러분이 홀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요. 그래서 우리 옆사람과 손을 잡겠습니다. 그리고 옆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겠어요. 우리가 목소리를 높여서 주님께 부르짖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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