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2023.08.24 09:02

박상형 조회 수:0

만남(26:13-23)

 

 

1. 빛과의 만남

 

예수님과의 만남은 빛과의 만남이다.

일반적인 빛이 아니라 해보다 더 밝은 빛과의 만남이었다.

 

(13)정오쯤에, 오 왕이여, 길을 가고 있는데 하늘로부터

해보다 더 밝은 빛이 저와 제 일행을 둘러싸며 비추었습니다.

 

 

예수님이 바울과 그 동행들에게 해보다 더 밝은 빛으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 빛을 본 사람들은 모두 땅에 엎드러졌다.

 

 

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처럼 부드럽게 다가오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이 엎드러질 정도의 강렬한 빛을 비추시며

무섭게 다가오신 것일까?

 

 

2. 가시채와의 만남

 

예수님은 엎드러져 있는 바울에게 왜 나를 핍박하느냐며

그것은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것이기에 네게 고생이라고 말씀하신다.

 

(14)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말로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15)내가 대답하되 주님 누구시니이까 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가시채는 밭을 가는 소로 하여금 딴 짓을 하지 못하도록 때리는

채찍이라고 한다.

소는 주인의 의도대로 앞으로 나아가며 밭을 갈아야 하는데

가시채를 뒷발질 한다는 것은 주인의 의도에 반하는

뒷걸음질을 한다는 말이다.

 

 

그럼 사람이 소 정도 밖에 안 된다는 말일까?

맞다. 예수님 앞에 사람은 소 정도도 안 된다.

그것을 먼저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나타나심이 빛 보다 더 밝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만난 모든 사람이 엎드러진 것이다.

예수님 앞에 사람은 엎드려져서 만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임을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이 찾아오시면

그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밝히 알게 되고

그 분 앞에 내가 누군지도 확실히 알게 된다.

 

 

3. 주님과의 만남

 

세상의 것으로 대신할 수 없는 분, 그 분이 바울을 찾아오셨다.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니까 경고를 주시려고 오신 것일까?

아니면 죽이시려고?

아니다. 죽이실 거면 벌써 죽이셨을 것이고

경고는 직접 나타나셔서 주시지 않아도 된다.

 

 

예수님이 바울을 찾아오시고는 혼을 내 주시던지 사과를 받아내시는

일을 하시지 않고 자신을 더 이상 박해하지 말라고 하시며

할 일을 알려 주신다.

 

 

주님의 방식은 사람과 많이 다르다.

사람은 억울한 일을 당하면 사과를 받는 것이 먼저인데

주님은 당신의 일을 하라고 하신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당신의 일을 하는 것으로 사람의 죄를

퉁 치신다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일을 하다보면 전에 안한 회개, 전에 못한 죄 고백을

당연히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다 용서받았기에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하면서 자신이 지은 죄를 더 깨닫게 되고

더 용서 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딤전1:14)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만약 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그는 주님의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주님이 직접, 그것도 빛 보다 더 밝은 빛으로 나타나셔서

나타나신 이유를 말씀해 주셨고 바울은 주님이 보여주신 그것을

거스르지 않았다고 말한다.

 

(19)아그립바 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

 

 

4. 내 존재와의 만남

 

어떤 유명한 스님이 티브이에 나오셔서 자신이 스스로의 인생을

아름답게 바꾸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했는데

나는 내 존재를 그렇게 과대평가하지 않는다.

 

 

내 존재는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지금의 이런 내가 된 것은 예수님을 만나서

그렇게 된 것이지 내가 나를 만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나를 가족으로 삼아 주셨고 그 분을 믿는

믿음으로 내가 이렇게 된 것이고 되어가는 중이다.

그러므로 그 믿음에는 책임이 있다.

하나님과의 가족 됨에 비하면 내가 부여 받은 그 책임의 크기는

너무나 작지만 말이다.

 

 

사촌 여동생이 가족을 데리고 내가 있는 동해시를 다녀갔는데

내게 연락을 하지 않고 갔기에 전화를 해 봤더니

내가 여기 있는 줄 몰랐다고 한다.

 

 

페이스북이나 이런 곳에 내 신상정보가 있는데

왜 몰랐느냐고 물었더니 페이스북에는 내가 말씀만 기록해서

몇 번 보고는 잘 안 보았다는 것이었다.

 

 

맞다 나의 페이스북에는 말씀만 기록되어 있다.

내가 말씀만 기록하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흔들리지 않고 주의 길을 가기 위해서 이다.

세상에는 흔드는 일이 너무 많으며

그 흔들림에 흔들리는 것은 가족이 아니니까 말이다.

바울이 감옥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이유 역시 그 것 때문이다.

 

 

두 번째는 태어났기에 자라나야 하는 책임이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성장은 더 커지는 것이 아니라 더 깊어지는 것이다.

성장은 마음을 가득하게 두고, 끝까지 똑 같이 말씀을 따라갈 때에

일어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나에게는 어두운 세상을 비추는 책임이 있다.

어두운 세상에서 살지만 어둠에 물들지 않고

빛으로 사는 책임이다.

 

 

해보다 더 밝은 빛을 받았기에 빛을 비출 수 있다.

해보다 더 밝은 빛을 못 받는 세상에게 은혜를 전해야 한다.

 

 

세상은 구별하고 따라가야 할 대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미워해야 할 대상도 아니다.

 

 

세상에는 없는 밝은 그 빛, 나에게 먼저 비추고

세상에 비추어가며 흔들리지 않고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2023. 08. 24.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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