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4월 20일, 한 부부의 유해가 엄숙한 의식이 거행되는 가운데 프랑스 팡테옹으로 이장되었다. 팡테옹은 프랑스의 국가적 위인들만이 묻힐 수 있는 국립 묘지다. 아내 마리 퀴리는 남편의 업적이 아니라 자신의 업적만으로 팡테옹에 묻힌 최초의 여성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볼테르, 루소, 에밀 졸라, 빅토르 위고 등 남성들의 전유물이 되다시피 한 바로 그곳에 여성이 묻혔다는 사실만은 아니다. 마리 퀴리는 이민자 출신의 과학자였다. 그리고 과학자 집단은 그녀가 활동하던 시절만 해도 남성들의 전유물이나 마찬가지인 배타적이고도 공고한 사회였다.

 

 

마리 퀴리는 1867년 11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스크워도프스키 브와디스와프와 어머니 스크워도프스카 브로니스와바의 다섯 아이 중 막내(폴란드 이름은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로 태어났다.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러시아는 폴란드의 문화와 전통을 무시했고, 폴란드어로 수업하는 것까지 탄압했다. 폴란드인들에게는 참으로 어둡고 슬픈 시절이었다.


마리 퀴리의 부모는 교사였다. 어머니는 마리가 열 살 되던 해인 1878년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마리는 공립학교에 들어가 열심히 공부해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당시 폴란드에서는 여성은 대학에 입학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집안 형편도 넉넉하지 못했다. 마리는 언니와 다짐했다. 언니가 먼저 파리에 가서 공부를 하고, 그 사이에 자신은 가정교사를 하며 돈을 벌어 학업을 돕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런 다음 언니가 학업을 마치면, 이번에는 언니가 동생을 뒷바라지하기로 한 것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물론 허드렛일까지 해야 하는 힘든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생활비가 따로 들지 않았기 때문에 마리는 언니에게 돈을 보낼 수 있었다.

 

실험실의 피에르 퀴리(가운데)와 마리 퀴리(오른쪽)
마리 퀴리는 소르본 대학 교수이던 남편이 숨진 후 그의 교수직을 이어받음으로써 이 대학 최초의 여성 교수가 됐다.

 

 

1891년, 드디어 마리는 파리로 갈 수 있게 되었다. 남학생은 9000명 정도나 되었지만 여학생이 200명 정도인 그곳 소르본 대학에서 마리는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물리학 박사 학위를, 그것도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받았다.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먹을 것조차 제대로 못 먹고, 열심히 공부한 결과였다. 원래는 학위를 받은 후 아버지가 계신 조국 폴란드로 돌아오려 했지만, 그러기에는 조국의 상황이 너무 암울했다. 그래서 프랑스에 남기로 했다.

 

 

마리는 대학에서 평생의 동반자를 만났다. 물질의 결정을 연구하는 피에르라는 과학자였다. 두 사람은 1895년에 결혼했다. 결혼하기 전 마리가 피에르에게 보낸 편지 중 한 통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우리 두 사람이 마음 속에 같은 꿈을 살 수 있다면, 너무나 멋진 일이겠지요. 당신이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과 우리가 인류를 생각하고 과학을 사랑하는 꿈 말입니다.”


두 사람이 결혼한 해인 1895년은 독일의 과학자 빌헬름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한 해였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프랑스의 앙리 베크렐이 우라늄이 포함된 광석의 특이한 성질, 즉 인광(燐光) 방출 현상을 발견했다. 이 두 가지 발견에 자극을 받은 마리는 그런 특이한 성질에 관해 연구하기로 마음 먹었다. 남편 피에르의 도움을 받아가며 우라늄의 성질을 연구하고 실험하던 중, 마리는 우라늄보다 훨씬 강한 빛을 방출하는 원소를 발견했다. 마리는 이 새로운 원소에 조국 폴란드의 이름을 따서 ‘폴로늄’이란 이름을 붙였다. 1898년 7월, 플로늄에 관한 논문을 쓰면서, 마리는 ‘방사능’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그 해 12월, 강력한 방사능을 방출하는 새로운 원소를 또 발견하고, 그것에 라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순수한 라듐을 분리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1911년 마리 퀴리에게 수여된 노벨 화학상 원본

 

순수한 라듐을 분리하는 일은 엄청나게 고된 일이었다. 피치블렌드란 광물 몇 톤을 화학적으로 정제해야 했다. 부부는 비가 새는 헛간을 실험실 삼아 밤낮없이 열심히 연구했다. 그리고 1902년 4월 20일, 마침내 순수한 라듐 0.1그램을 분리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 공로를 인정 받아 이듬해인 1903년 부부는 앙리 베크렐과 공동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피에르 퀴리는 노벨상 수상 기념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라듐은 범죄자들의 손에 들어가면 위험한 물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바로 이 자리에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자연의 비밀을 캐는 것이 인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그 비밀을 안다고 하더라도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 만큼 인류는 성숙한가, 아니면 오히려 해로운 지식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닌가”

 

 

1906년 4월 19일, 마리 퀴리는 남편을 잃었다. 피에르가 마차에 깔려 순식간에 목숨을 잃은 것이다. 마리는 남편을 잃은 슬픔에 젖어 ‘서글프고 끔찍한 나날’을 보냈다. 살아 생전 남편이 했던 “어쨌든 계속해나가야만 한다”는 말을 떠올리며 다시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마리는 남편이 맡았던 소르본 대학의 자리를 이어 받았다. 소르본 대학 최초의 여교수가 된 것이다.

 

구 소련에서 1987년 발행한 마리 퀴리 기념 우표(위)
퀴리의 조국 폴란드에서 그녀를 기려 유통되고 있는 지폐(아래)


1911년 1월, 마리 퀴리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회원 후보가 되었지만 두 표 차이로 떨어졌다. 여성인데다 폴란드 이주민이라는 출신 배경에 과학계 인사들의 보수성이 더해진 결과였다. 그리고 같은 해 마리 퀴리가 폴 랑주뱅이라는 과학자와 불륜 관계라는 기사가 언론에 실렸다. 이 기사의 영향은 일파만파로 퍼져 나갔다. 필요 이상의 엄청난 비난이 마리에게 퍼부어졌다. 심지어는 “프랑스 여인의 남편을 빼앗아간 외국X”라는 비난까지 들어야 했다. 이 일들로 마리는 건강까지 나빠졌다. 자살까지도 시도했지만, 마리에게는 ’계속 해나가야 할’ 일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다. 같은 해 12월, 노벨 화학상을 받은 마리는 1914년에 라듐 연구소를 열었다. 하지만 그 해 8월 1차 세계 대전 때문에 연구 계획은 어긋났다. 젊은 남성 연구자들이 모두 군에 소집된 것이다. 마리도 X선 장치를 실은 구급차를 마련해 전쟁터로 나섰다. 딸 이렌도 동참해 장비 다루는 일을 맡았다.


전쟁이 끝난 후, 마리 퀴리는 직접적인 연구보다는 연구소의 재원을 마련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마리는 당시 1그램당 10만 달러나 되던 라듐 구입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미국으로 모금 활동을 떠나기도 했다. 연구소에는 1그램의 라듐 밖에는 없었다. 한 여기자가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당신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마리의 대답은 간단했다. “실험실에서 쓸 라듐 1그램이에요!” 마리는 50만 달러가 넘는 기금을 모아 라듐을 더 구입할 수 있었다.

 

 

1920년대에 접어들면서 라듐 연구소의 연구원들이 악성 빈혈이나 백혈병으로 목숨을 잃는 일이 발생했다. 마리의 몸도 정상은 아니었다. 방사선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결과였다. 그리고 1934년 7월 4일, 마리는 세상을 떴다. 아인슈타인이 “유명한 사람들 중 명예 때문에 순수함을 잃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라고 찬사를 보낸 폴란드 출신 유대계 프랑스인 여성 과학자의 사인은 백혈병이었다. 동료 물리학자인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과학 저널 <네이처>에서 마리 퀴리를 이렇게 애도했다. “퀴리 부인은……과학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오랫동안 우리 시대 최고의 여성 연구자로 인정받았다……라듐의 발견과 분리는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다…… (라듐은)……일반적으로 원자의 내부 구조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늘리는데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해왔다. 더욱이 라듐은……암을 치료하는 데 뛰어난 효능이 있음이 증명되었다……과학적 재능뿐 아니라 순수한 성격과 개성을 지닌 그녀를 존경하는 전세계의 많은 동료들은 지식의 성장과 과학적 발견을 통해 인류 복지에 커다란 공헌을 한 사람의 때 이른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하지만 마리 퀴리 자신은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삶을 이렇게 요약한 적이 있었다. “전 폴란드에서 태어났어요. 피에르 퀴리와 결혼했고, 두 딸을 두었지요. 연구는 프랑스에서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