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려 [張起呂]
1909 평북 용천~1995. 12. 25 서울.
의사·사회사업가.
 
 
1932년 경성의학전문학교를 마치고 일본 나고야대학[名古屋大學]에서 의학사학위를 받았다. 1950년에 월남하여 6·25전쟁중 발생한 전상자와 극빈환자에 대한 무료치료를 시작으로 인술을 통한 인간애를 실천해왔다. 1951년부터 무료진료소인 복음병원 원장으로 일했고 그뒤 1953년부터 20여 년 동안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및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산 복음간호대학,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등에서 의학을 가르쳤다. 1968년에는 국내 최초로 의료보험협동조합인 '청십자운동'을 창시하여 가난한 환자들을 구제했다. 또한 1976년 한국청십자사회복지회, 1985년 장애자 재활협회 부산지부를 창설해 영세민과 장애인의 복지향상에 힘썼으며, 간질환자 치료모임인 장미회, 생명의 전화 등 사회봉사단체를 창설·운영하는 등 평생 사회봉사와 의료사업 발전에 헌신했다. 한국청십자사회복지회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대통령상, 국민훈장 동백장과 1979년 막사이사이상(공익봉사 부문)을 받았다.
 
 
생애와 삶

장기려(張起呂, 1911-1995) 선생님은 1911년 음력 8월 14일 (호적상으로는 1909년 7월 15일) 평안북도 용천군(龍川那) 양하면(揚下面 입암동(立岩洞) 739번지에서 한학자였던 장운섭(張雲燮)과 최윤경(崔允柳)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여섯 살 때인 1918넌 부친이 설립한 의성학교(義聖學校)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에서 5년간 교육을 받은 그는 1923년 졸업하였다. 목사가 된 김치묵(金致默), 전 대법원 행정처장을 지낸 김병화(金炳華)는 동기동창이었고 테너 가수인 이인범(李仁範)은 3년 후배였다. 의성학교를 졸업한 그는 송도(松都)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고 이 학교에서 5넌 간의 과정을 마치고 19B년 졸업하였다. 한 때 모교인 의성학교 교원으로 일할 것을 고려하기도 했으나 상급학교에 진학하기로 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專)에 지원하였다. 이때에는 가정 사정이 좋지 못했으므로 단순히 학비가 싼 학교를 선택한 것이라고 했다. 이때 그는 이 학교에 들어가게만 헤 준다면 의사를 한번도 못보고 죽어 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아마 이것이 ‘선한 의사’로서의 생에를 결단했던 첫 출발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 학교에 입학한 그는 5년간의 과정을 마치고 1932넌 3월 졸업하였고, 그해 4월9일 김봉숙(金鳳淑)과 결혼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그는 장인이 된 김하식(金夏植)의 권유로 백인제(白緣濟) 선생 문하에서 외과를 전공하였다. 그후 그는 후복막 봉과직염(後煩模 峰案織失) 과 패혈증(敗血在)에 관한 연구를 하였고, 1940년 3월에는 "충수염 및 충수복막염의 세균학적 연구"라는 제목의 의학박사 학위 청구논문을 나고야 대학에 제출하였고 그해 9월에 통과되어 의학박사가 되었다. 그동안 경성의전 외과에서 봉사했던 그는 이용설의 소개로 1940년 3월의 평야의 연합 기독병원 외과 과장으로 갔다. 이 병원은 1981년 의료선교사로 내한한 감리교의 윌리엄 홀(Dr William Hall, 1860-1895)이 1984년 11월 34세의 나이로 한국에서 사망하자 그의 미망인에 의해 1%년 설립된 기흘병원(The Hall Memorial Hospital)으로 시작되었는데, 1923년 평양의 장로교병원과 병합한 후 평양 연합병원으로 개칭된 평양지방의 기독교 병원이었다. 이 병원을 연합병원이라고 한 것은 감리교 선교부와 장로교 선교부가 연합하여 운영하던 병원이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이 병원으로 옮겨 간지 두달 후인 그해 11월에는 원장이었던 북감리교 선교사 안도선(安道宣, Albin. Garfield Anderson, 재한기간 1911-1941)이 귀국하게 되자 장기려는 박사학위 소지자라는 이유 때문에 병원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인사에 불만을 가진 이들의 질시와 텃세때문에 불과 두달만에 원장직에서 물러나 외과과장으로 강등되었지만 변함없이 성실히 봉사한 일은 아름다운 일화로 희자되고 있다. 그는 이 때를 회고하면서 “환자 치료에만 전념할 수 있는 강등 자체는 조금도 서럽지 않았으나 텃세는 서러웠다”고 술회하고 다시 외과 과장직으로 돌아와 일한 10개월 동안은 그의 생애를 통해 “7}장 밀도 있는 신앙생활을 했다고 했고 이곳에서 믿음으로 사면초가를 극복한 일은 “평생을 통해 신앙생활로서 가장 보람이 있었을 때였다"고 회고했을 만큼 시련의 기간을 통해 영적 성숙을 이루는 경건한 자세가 있었다.

평양 연합기독병원에서 일한 기간인 1942년에는 후학인 민광식(閔批植)과 함께 “농흉(嗤商)에 관한 세균학적 연구”라는 논문을 조선의학회지(朝雜醫學會誌)에, 단독연구인 “근염(第失)의 조직학적 소견”을 일본외과학회에서 발표한 일이 있다. 1943넌에는 간상변부에 발생한 간암의 설상절제수숭(複狀切除手術)올 실시하고 그 결과를 조선 의학회에서 발표하여 주목을 받은 일도 있다. 신경쇄약으로 휴양중에 해방을 맞은 장기려선생은 그헤 11월에는 평양도립병원장 겸 의과과장으로 약 일년간 일했다. 1947년 1월부터는 김일성대학의 의과대학 외과학 교수겸 부속병원 외과과장으로 일했다. 그는 주일에는 일을 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이 대학으로 갔고, 이 학교에 근무하면서도 주일을 지키고 환자를 수술할 때는 먼저 기도하는 등 일관된 신앙의 길을 갔다. 그의 성실함과 신실함, 그리고 검소한 생활때문에 이곳에서도 그는 인정을 받았고, 1948넌에는 북한 과학원으로부터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기도 했다.

1950년의 한국전쟁과 분단은 선생님의 가족에게도 큰 시련을 안겨 주었다. 그는 1950년 12월차남 가용(家勳과 함께 남하하여 그 달 18일 부산에 도착하게 되는데 평양 종로앞에서 마지막 본 아내와 다른 가족이 함께 남하하지 못한 것은 일생동안의 가장 가슴아픈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부산에 온 그는 곧 부산 제 3 육군병원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약 6개월간 봉사했던 그는 1951년 6월 경남구제위원회의 전영창(全永昌)선생과 한상동(韓尙東)목사의 요청으로 부산 영도구 남항동에 위치한 제 3교회 창고에서 무료의원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다. 이 때부터 그는 1976년 6월까지 25년간 복음병원 원장으로 그리고 의사로 일했는데 초기 복음병원 시절은 의사로서 가장 보람된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복음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동시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학 교수로(1953.3-1956.9),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및 학장으로 (1956.9 -1961. 10) 서울 카토릭 의대 외과학 교수로(1965-1972.12) 봉사하기도 했다. 이 당시 부산, 경남지방에는 의료기관이 많지 않을 때였으므로 복음병원은 이 지역 보건증진을 위해 큰 기여를 했다. 특히 그가 원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기간은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구호, 자선병원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선생님이 복음 병원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동안에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에 외과를 창설한 일도 이 지역 의료계를 위한 기여라고 볼 수 있다. 장박사님은 1959넌 2월에는 간의 대량절제수술을 성공하였는데 당시에는 간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던 때이므로 그는 이 분야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간암에 대한 연구로 그는 1961년 대한의학회 학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의료활동 의에도 그는 1956년 전도 및 성경공부를 위한 목적으로 “부산모임을 시작하였고, 1959년에는 일신병원 설립자였던 매켄지(Dr Helm Mackenzie), 내과의사인 이준철(李俊哲), 치과의사인 유기형(劉基亨) 등과 함께 ’부산기독의사회’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복음에 대한 그의 관심의 일단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특히 1968년 부산시 동구 초량동에 위치한 복음병원 분원에서 채규철(蔡奎哲), 조광제(趙光濟), 김서민(金瑞敏), 김영환(金永煥) 등과 함께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발족한 것은 그가 남긴 소중한 유산이다.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났을 때 도움받자” 라는 취지로 시작된 이 의료보험조합은 순수 민간단체에 의한 의료보험 기구로서 영세민들에게 의료 복지혜택을 주기 위한 기독교적 자애정신에 기초한 기구였다. 정부가 의료보험제를 실시하기보다 10년 앞서 시작된 이 의료보험조합은 1975년에는 의료보험조합 직영의 청십자의원 개원을 가능케 했고, 이듬해에는 한국 청십자 사회복지회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그의 지역사회 봉사활동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1979년 8월에는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선생님은 복음병원에서 은퇴한 후에도 청십자의원에서 진료하는 등 여러 사회봉사활동을 계속하였고 은퇴가 없는 일생을 살았다. 사랑, 생명, 평화는 그의 생애를 엮어간 주요어(Key Word)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삶의 기초로서의 기독교 신앙

장기려선생의 생애와 그의 삶의 여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 신앙이었다. 기독교신앙은 오늘 우리가 기리는 장기려선생의 삶과 인격을 주형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이타적(利他的) 삶,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인술은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신앙은 그의 삶의 근거이자 기초였고, 그의 삶의 과정에 의미를 주었던 동력원(power station)이었으며 그의 삶의 목표이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은 그의 84년간의 생애를 움직여왔던 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신앙의 자취를 살펴보는 일은 그의 생애 여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무교회주의의 영향

그는 어릴 때 할머니를 통해 신앙을 배웠고 교회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송도고등보통학교 재학중인 1925년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가 기독교 신앙의 진수를 깨닫고 신앙적 삶을 모색하게 된 것은 경성의전을 졸업한 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경성의전을 졸업한 후 그는 후지이 다께시(雅井武), 우찌무라 간조(內村錯三), 야나이하라 다대오(失內原忠雄), 김교신(金敎巨), 함석헌(威錫衛) 등의 저서를 읽었는데 일본의 무교회적 인사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특히 그는 김교신의 r성서조선」을 정기구독 하였고 1942년 3월r성서조선」 제 158호의 권두문인 “조와”(界姓)라는 글이 문제가 되었을 때 그는 정기 구독자라는 이유 때문에 김석목(金錫建), 유달영(柳達永) 등과 함께 평양경찰서 유치장에 12일간 구금된 일이 있다. 김교신이 일본 유학에서 귀국한 때는 1927 년 3월이었고 이들은 내촌의 영향을 받아 조국 의 복옴화를 가슴에 안고 “성경을 조선위에, 조선을 성경위에” 라는 일념으로 1927넌 7월 r성서조선」을 창간했었다. 장기려가 일본 무교회 인물들의 저작을 접했을 때가 경성의전을 졸업한 후였다는 점을 고려해 불 때 아마도 1930년대 초부터 r성서조선」을 구독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선생님은 김교신, 함석헌 등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선생님은 “김교신은 내가 가장 영향을 받은 사람 중의 하나이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또 10년 연배였던 함석헌으로부터 도 적지 않는 영향을 받았는데 그를 처음 만난 때는 1940년 1월초 서울 정릉에 있던 김교신의 집에서였다. 이때부터 선생님은 함석헌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를 존경하였고 깊은 교우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장기려는 당시 대표적인 무교희주의자들과 교제하였고·깊은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자신은 교희주의자로 머물러 있었고 1949년 8월에는 평양의 산정현 교회에서 장로로 장립받았다. 말하자면 교회주의자로 제도교회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무교회주의자들의 성경연구와 그 가르침을 수용하는 입장이었다. 그는 교리적 일관성보다는 영적 유익을 추구했던 경건주의적인 성향을 지닌 19세기 스위스 태생의 미국교회사가인 필립 샤프(Philip Schaff, 1819-1893)와 흡사했다. 장기려선생은 어느 양극단에 안주하여 다른 하나를 무시하는 편협성에 빠지지 않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같은 그의 입장은 함석헌과 여러면에서 생각을 달리하면서도 그와 깊이 교제했던 사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남하한 이후 장기려선생은 이이라장로, 박덕술권사와 함께 1951년 10월 부산 중구 동광동에서 북에 두고 온 산정현 교회를 재건하였다.

그가 남하한 이후 첫 주일인 1950년 12월 24일 한상동목사가 시무하던 초량교회에 참석하여 예배드렸고 그날 정보기관에 끌려가 일주일간 조사를 받은 일이 있는데 이때 한상동목사와 미국정통장로교(OPC) 선교사인 치과의사 최의손(崔鼓現 Dr William H. Chisholm)이 그의 신원을 보증해 주어 풀려 난 일이 있다. 분명치는 않으나 그 이후부터 산정현교희를 재건하기까지 초량교회에 출석한 것으로 보인다. 한상동목사와는 평양에서부터 이미 교제가 있었고 그의 요청으로 복옴병원을 개원, 상호 협력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상동 목사가 당시 장로교총회 유지제단으로부터 초량교회 명도를 요구받고 1951년 10월 초량교회를 떠나 삼일교회를 설립할 때 한상동목사를 따르지 않고 전기한 인사들과 함께 산정현 교회를 재건한것은 아마도 제도 교회, 다시 말하면 교회주의의 문제를 극복하고자 하는 뜻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산정현 교회를 어느 교단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교회로 한 것을 보면 더욱 분명하다. 이렇게 볼 때 선생님은 비록 제도교회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무교회적 주장을 수용하고 있옴을 알게된다. 그래서 r성서조선」의 동인이었던 송두용은 장기려에 대하여 ”교회도 떠나지 않고 무교회의 신앙을 이해하며 그것에 대하여 변치 않는 태도가 좋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산정현교희 장로로 봉사해 온 그는 1981년 12월 시무장로에서 은퇴하였고 원로장로로 추대되었다. 그후 1987년부터는 ‘종들의 모임’이라고 흔히 불리는 비교파적, 비 조직적 신앙운동 단체에 관여하였고 그가 치료 차 서울로 옮겨가기까지 이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평소 제도교회의 모순과 문제점을 보고 지냈던 그는 모든 외형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는 순수한 복음운동에 관심이 많았고 따라서 그는 ‘종들의 모임’에서 영적 안식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과 같은 그의 신앙 여정을 종합해 볼 때 그의 신앙사상에는 무교회주의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건전한 종교“라는 글에서 ”종교가 사람의 손으로 지은 회당에 서 있고 사람의 의식에 치중하고 또 신앙개조만을 고조하고 음악과 예술적 표현 및 통계만을 들어 평가하게 될 때에는 그 종교는 불건전하다.“고 말하고 이런 외형적인 것에 메이지 않는, 외적인 것으로부터 자유한 복음적 신앙이 참된 종교라고 강조한 바가 있다. 이렇게 볼 때 그는 교회의 전통이나 신앙고백,교리적 내용(doctrinal integrity)에 대한 관심 보다는 이런 것들에 메이지 않는 신앙운동, 신앙적 실천, 삶이 있는 신앙을 추구했다고 불 수 있다. 즉 그는 신앙의 정통성(Orthodoxy)의 문제보다는 신앙의 정체성(Identity)의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가졌던 분으로 평가된다.


경건주의적 성향

앞에서 언급했듯이 선생님은 김교신과 함석헌으로부터 적지 않는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김교신은 1945넌 4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함석헌과의 관계가 보다 깊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선생님과 함석헌 간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함석헌은 1970넌 4월 『씨알의 소리』를 발행하면서 민주화 운동의 선두에 서 있었으나 장기려는 이 일에는 직접적으로 간여하지 않았다. 함석헌이 민주주의와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한 점에 대해서는 경의률 표했으나 한국사회의 문제, 곧 민주화를 이룩하려는 정치적 활동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아마도 선생님은 함석헌의 사회참여 방식이 근본적 해결의 길이라고 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어떤 점에서 함석헌은 현실주의자였다면 선생님은 이상주의자였다. 그는 차라리 김교신처럼 신앙운동, 사랑의 실천을 통해 사회의 문제를 개혁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 장기려선생님이 함석헌의 입장을 수용하고 있는 점에는 약간의 의문이 있다. 함석헌의 신학 혹은 신앙사상은 변화가 많았고 또 종교상대주의자였는데 어떻게 기독교 유일사상의 신봉자인 선생님이 함석헌의 사상을 수용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함석헌은 1921넌 오산고등보통학교 3학넌에 편입하여 유영모(柳永模)를 통해 무교회 주의를 배우고 도일한 이후 김교신을 따라 내촌감삼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적어도1960년대까지는 무교회주의자였다. 그러나 1960넌대를 거쳐가면서 퀘이커교도(Quaker)로 전향하였다. 객관적 말씀 흑은 외적 말씀으로서 기록된 성경 보다는 내적 말씀 곧 내적 빛(Inner light)을 강조하는 주관주의적 성향이 짙은 반전주의적(反戰主養的)인 퀘이커는 함석헌에게 매력적이었고 결국 그는 형식적으로는 무교회주의에서 떠났다. 비록 그가 1964년 10월 일본의 무교회 인물인 마사이게(政抱仁)와의 대담에서 “나 자신은 무교회 신자라고 생각한다”라고 했으나 사실그는 퀘이커 집단의 일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함석헌에게는 변화가 많았다. 특히 함석헌은 제도교회의 무용론을 지나치게 역설했고, 심지어는 교희주의는 바리새주의라고 매도하고“조직적 교회를 시인하는 것은 분명히 비그리스도적이다“라고 하였다. 한숭홍교수는 ”함석헌은 교회란 마치 악마적 권위로서 신앙인을 위협하고, 협박하고 금전적인 것을 수탈하기 위해 인위적인 미신적 의례를 신성한 효험과 신의 본체로서 믿도록 강요하고 계속 복종을 강요하는 집단으로 분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함석헌은 교회주의를 이처럼 비판하면서도 타 종교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관용적인 측면이 있었다. 함석헌은 19犯년 r성서조선」사건으로 감옥에 있는 동안“불교경전을 조금 읽었다. ---그러는 동안에 불교와 기독교는 근본에서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고, 6.25 동란 중에 “인도교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됬고 읽을수록 종교는 하나라는 생각이 분명해 졌다.”고하였다. 또 1964년에는 “나는 지금 종교는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함석헌은 교회제도를 부인할 뿐만 아니라 신앙, 성례, 교의, 신앙고백, 교회조직까지 부정하는 극단적 무교회주의자였는데 후기에 와서는 기독교의 유일성까지 부정하고 종교상대주의 흑은 종교 다원주의로 발전하였다. 그는 중세 신비주의와 매우 흡사한 주지주외적 신비주의자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그의 사상때문에 신비적 성향이 강한 퀘이커에로의 전향이 무리없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의 후기 행적을 보면 어떤 점에서 함석헌은 기독교 신앙인이라기 보다는 범종교주의자(凡宗敎主義者)였다. 모든 종교를 포용하는 듯하면서 동시에 타종교와의 경계선을 제거하였다. 말하자면 그는 종교상대주의 흑은 종교다원주의에 머물지 않고 범 종교주의적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김교신과는 분명히 달랐다. 그러나 선생님은 함석헌과의 교분을 계속하였다. 그가 함석헌과의 오랜 교분과 인간적인 우정을 유지한다는 것은 탓할 바가 못된다.

문제는 자신의 신앙정신과는 명백하게 다른 함석헌을 ‘부산 모임’의 월1회 정기 강사로 청하였고, 1968년부터 1988년 6월까지 20년간 그의 강의를 듣도록 한 일은 선생님외 ’오직 믿음’(sola frde)의 길dmf 이해하는데 혼란을 주고 있다. 이와같은 문제를 선생님의 개인적인 친분 관계로만 이해할 수 있겠지만, '오직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문제는 개인적 친분 그 이상의 것이다. 긍정적으로 보면 선생님의 대승적(大乘的) 포용성이라고 할 수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선생님 자신의 주장처럼 복옴전도를 위한 부산모임에 범종교주의자를 강사로 청했다는 점은 상당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을 보면 선생님은 교회의 전통이나, 신학 흑은 교의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선생님은 신앙 혹은 신학적 일관성에 대해서는 상당히 무관심했다. 선생님은 일평생 주님의 품안에서 오직 그분 안에 소망을 두고 천국을 대망하고 살았는데 범종교주의자인 함석헌과의 그리스도안의 교제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장기려선생과 같은 입장은 18세기의 경건주의적 입장인데, 장기려 본인에게는 아무 문제가 없을 수 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상당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정리해 보면 선생님의 신앙사상은 교희역사와 전통을 중시하기 보다는 현실적 응답을, 공동체적이라기 보다는 개인적인 성격이 짙으며 모든 기구, 조직, 제도로부터 떠나고자 했던 자유교회적이었다. 이런 점에서 선생님을 “자유한 믿음을 가진 분”이라는 김서민의 지적은 그릇되지 않다.


그가 남긴 것

이상에서 우리는 그의 생애와 신앙의 자취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는 비록 교리나 신학전통에 대한 무관심으로 경건주의적 경향을 띠고 있으나, 그의 순수한 신앙, 복음에 대한 순전한 열정, 기독자적 삶에 대한 일관된 생애는 그 모든 것을 덮을 만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생애 여정 속에 서 보여준 몇 가지 열매들에 대해 정리해 두고자 한다.

기독교적 가치(Christian Values) 고양

선생님은 일평생 동안의 삶을 통해 기독교적 가치를 고양한 인물이었다. 그는 일생동안 봉사자의 삶을 살았고 겸손하고도 소박한 삶을 살았다. 그는 자기를 드러내고자 시도하지 않았다. 그는 박사학위가 흔치 않을 때에 논문을 제출하고 박사학위를 얻었으나 박사로 불리기를 원치 않았고,그저 선생으로 불러 주기를 바랐다. 큰 업적을 남기고도 상 받기를 거절하였고, 시상식에 나가지 않는 일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어떤 것을 남기고자 하는 의도가 없었다. 비록 자신에 관한 몇 권의 책이 출판되기도 했으나 그것은 자신의 의사와는 반하는 것이었다·이런 점에서 그는 ‘무명(無名)에의 의지’로 산 분이었고, ‘오직 믿음만’으로 살고자 했다. 자신의 유언처럼 “오직 주를 섬기다가 간 사람” 이기를 원했다. 이것은 개인의 신앙적 인격이지만 이 한가지 사실만으로도 그에게는 신앙적 비범함이 있었다. 그에 대한 여러가지 호칭들은 이런 그의 삶의 편모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

장기려선생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그는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이것은 하나님사랑의 방법이었다. 그는 기독자 적 사랑을 강조하였고 그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특히 사랑을 강조한 요한서신을 강조하였다. 그는 “요한의 사랑의 철학”이라는 글에서, “사랑의 철학은 생명철학의 일대혁명이다”고 전재하고, “하나님은 사랑이다"라는 말에서 우리는 사랑의 본체를 발견한다. 사랑은 확실히 인생의 지상선이다. 사랑에 있어서 율법은 완성된다. 도덕의 도덕,생명 중 생명은 사랑이다.“라고 한 다음, 사랑의 유일한 원천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또 하나님과 결부되지 않고는 사람은 결국 사랑할 줄 알지 못한다. 그런데 한번 깊이 생각할 바가 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랑만 있다면 사람에 대한 사랑은 자연이 그것으로부터 일어나리라고 해서 사람에 대한 사랑의 부족을 변호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우리들에대한 사랑의 반향은 우리들의 하나님의 사랑보다도 차라리 형제들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된다.

고 했다. 또 “바울의 사랑의 찬미”라는 글에서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고, 사랑은 영원하며 사랑은 생명 그 자체라고 했다. 그는 사랑과 생명 평화 이것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여겼고, 그의 삶은 이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생애였다. 그는 신앙과 삶의 동일한 좌표를 가진 언행일치, 신행일치의 삶을 추구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굴절된 삶으로 비난받는 우리 시대에서 그는 기독교적 가치를 고양하여 주었다. 그가 끼친 가장 큰 공헌은 진정한 의미의 기독자적 삶(Christian Life)이 얼마나 큰 위력을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물론 신학이론이나 교의, 그리고 교회적 전통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삶에 의미를 주지 못하면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고, 교리나 신학 이론, 논리적 체계는 냉냉한 이성의 동의는 얻을 수 있으나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기는 어렵다. 장기려선생은 그의 삶에 뿌려진 열매를 통하여 한 사람의 기독자적 삶이 가져올 수 있는 그 큰 위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 진정한 기독자적 삶을 살 때 그 영향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보여 주었는데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교훈과 경고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그의 생애와 삶은 한국교회 현장에 떨어진 거룩한 폭탄이다.


삶을 통한 한국교회 개혁

둘째로 그의 생애는 한국교회와 사회를 개혁하는 삶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그는 한국교회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거나, 한국교회의 문제를 신랄하게 지적하고 비판하지는 않았으나 한국교회의 지나친 외적 성장운동이나 교회당 건물을 크게 짓는 것 등을 포함한 외형적 확장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졌던 것은 분명하다. 사실 한국교회는 1960넌대 박정희 정권의 ’잘살아보세’ 철학, 곧 경제상장 제일주의의 영향으로 성장(成長)을 제일의적 과제로 수용하였고 이런 과정에서 다른 가치들을 경시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선생님은 교회가 건물을 크게 짓는다던가 외형적 확장에 우선적인 관심을 쓰는 것은 신앙의 본질일 수 없다고 보았고, 이런 경향을 자본주의적 맘몬이즘으로 이해하였다. 한국교회가 외적 성장에 대해 골몰하고 있을 때인 1975년에 다음과같이 쓴 일이 있다.

밀톤의 r낙원상실(실락원)」올 읽어보면, 맘몬은 고충건물을 잘 짓고, 물질 세계의 발전을 잘 일으키는 재능이 있는 마귀로 묘사되었다. 이것을 읽은 뒤부터는 고충건물을 보면 맘몬의 힘을 연상하게 된다. 하늘을 찌를 듯한 고딕건물 예배당도 나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느껴지지 아니하고 사람의 예술품은 될지언정 맘몬의 재주인 듯한 느낌이 든다. 또 우리는 이 세상에서 권세와 지위와 명예 그리고 사업의 번영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축하한다. 그러나 그것들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여 살던 사람들에게 내려주시는 선물이었던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맘몬과 타협해서 산 결과로 된 것이 아니었던가?

그는 교회가 복음의 본질적인 활동보다는 외적 성장이나 외형적 확장을 중시하는 것에 대하여 비판적이었고, 그것은 맘몬이즘으로 강조하였다. 그는 또 “나는 한국의 기독교는 자본주의 기독교라고 해서 혹독히 비평했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이 맘몬과 타협하고 보조를 같이 하고 있옴을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도 않았었다.”고 말한 일이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검소하고도 청빈한 삶은 이런 자본주의적 가치에 대한 비판이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한국교회의 문제를 지적해 주고 그 문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우리사회나 교회의 문제와 모순, 부정과 부패를 비판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 일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방법은 기독교적 삶이다. 기독교적 삶, 곧 말씀에의 순종, 감사, 사랑의 실천은 가장 중요한 사회 비판이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혁명적인 방법으로 이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시도, 즉 체제와의 싸움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였을 뿐이다.

물질만능주의를 비판하는 최선의 방법은 검소한 삶을 사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물질과 재물에 대한 자유함, 그리고 가난하고 핍절된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 이것은 그스도인의 순종과 감사의 행위이며 물질주의적이며 배금주의적 삶의 방식에 대한 가장 확실한‘사회비판’이다. 선생님은 “나도 늙어서 가진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은 다소의 기쁨이기는 하나 죽었을 때 물레밖에 안 남겼다는 간디에 비하면 나는 아직도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무소유(無所有)의 삶을 이상으로 여겼고, 간디 옹을 닮아보려고 애썼다 그의 무소유의 삶 자체가 물량지향적인 우리 사회와 교회에 대한 비판이었다. 불의한 사회를 비판하는 최선의 길은 우리가 의롭게 사는 것이다. 이처럼 장기려는 자신의 삶을 통해 한국교회와 사회를 비판하고 개혁하고자 했다. 그의 사랑의 실천철학은 가장 효과적인 사회비판이자 사회개혁 운동이었다. 이것을 우리는 삶을 통한 개혁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적 사회참여 방식의 모델 제시.

선생님은 한국교회에 기독교적 사회참여 방식 혹은 기독교적 사회봉사의 한 모델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교회의 사회참여 방식은 양극화되어 있니 진보적 교회는 1970년대 이후 인권운동, 민주화운동 등 제도나 조직의 개선을 위해 싸웠고, 개인구원에 대한 무관심은 죄의 심각성을 간과하든 약점이 있었다. 또 보수적인 교회는 사회에 대한 관심보다는 개인구원에 일차적인 관심을 둠으로서 결과적으로 사회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처하였고, 기독교 이념의 사회화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따라서 사회변화와 개선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러나 선생님은 양극단을 지향하고 기독교 정신의 사회화를 추구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앞서 언급한바 있는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운동이다.

기독교적 사랑, 가난한 이웃에 대한 배려, 이타적 생활방식, 이것은 기독교 정신이며 개인의 생활을 통해 의미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독교적 정신을 개인의 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이를 조직화하고 제도화한 것이 바로 의료보험조합이다. 당시 한국에서는 의료보험의 개념이 인식되기도 전에 의료협동조합을 만들었고 담배값 일백원에도 못 미치는 월 70원의회비를 받은 것을 보면 그것이 가난한 서민을 위한 구빈원(救資院)의 성격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청십자 병원의 설립, 그리고 복지관 설립도 같은 맥락예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 운동은 기독교의 건실한 사회참여 흑은 사회 봉사 방식을 보여 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마치 초기 한국교희가 기독교학교를 설립함으로서 특수계층의 사람들만이 누리던 교육의 기회를 확대하고 학교교육을 대중화하여 기독교 교육을 가능하게 했던 것과 같다. 또 병원을 설립하여 현대의학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했던 것과 같다. 의료보험조합은 국가 주도의 의료 보험제도가 시작되기 앞서 자의적, 자발적 참여를 통해 영세민들에게 의료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길을 연 것으로서 이 운동은 가난하고 핍절된 이웃을 돌아보는 이상적인 사회참여 혹은 사회봉사의 한 모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교회의 부패를 지적하고, 사회개혁을 외친 일이 없다. 또 인권을 위해서나 민주화를 위해서 투쟁한 일도 없다. 그러나 그는 우리 사회률 개혁하고 개선하는데 누구보다도 더 큰 기여를 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일생동안 생명, 사랑, 평화를 소중히 여겼고 자신의 회생적인 삶을 통해 이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노예해방이나 사회개혁을 위해 정치적인 투쟁을 한 일은 없으나 그가 가르친 사랑은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사회를 개혁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던 것과 같다. 이렇게 볼 때 선생님은 기독교적 사랑에 기초한 사회참여 혹은 사회봉사의 모델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그는 선한 사마리아인으로서의 생애를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결혼의 신성함과 가정의 중요성 일깨워

끝으로 그는 이 시대의 조국의 분단과 이데올로기적 대립,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산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북에 아내와 자식을 남겨두고 일생동안 외로이 사셨다. 그도 이성에 대한 연민의 정이 있었고 인간적 고뇌가 있었을 것이다. 여러 사람들의 재혼 권유가 있었으나 ”결혼은 오직 한번하는 것이라”는 자신의 신념을 따라 40년이 넘도록 홀로 사셨다. 언제 재회할지 모르는 현실에서 혼자 사는 것이 최선의 방식이며, 최선의 윤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결혼의 신성이 파괴되고 분별없는 이혼과 재혼이 반복되는 오늘의 기준으로 볼 때 그의 생활의 방식 자체가 오늘 우리 시대에 교훈을 주고 있다. 장기려선생과 깊이 교제해 온 임능빈(林能彩)교수는 대부분의 사람은 단지 육적인 관계에 머물러 있지만 장기려의 부부관계는 영적인 결합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참된 사랑이 무엇이지를 깨닫게 해 준다고 말했다.

1990년 6월 그가 남긴 망향편지는 우리의 가슴을 적시기에 부족함이 없다·“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당신인 듯하여 잠을 깨었소. 그럴리가 없지만 혹시 하는 마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 봤으나 그저 캄캄한 어둠뿐 -. 허탈한 마음을 주체 못해 불을 밝히고 이 편지를 씁니다. 여보!”이 편지와 함께 남북대화가 있을 때마다 그가 잠 못이루는 밤을 지새며 두고 온 아내 만나기를 소망했던 것을 고려해 보면 그가 혼인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를 감지할 수 있다. 특히 1994넌 제 2차 고향방문단 일원으로 확정됐으나 교환 합의가 무산되었을 때 그가 겪은 실망과 아픔은 필자에게도 가슴 저미는 아픔으로 남아 있다 그 당시 장박사님과 필자는 어떤 교회 모임의 강사로 초청받고 하룻밤 씩 강의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북한 방문의 기대 속에 잠을 이루지 못헤 예정된 강의를 할 수 없어서 필자가 대신 이틀 밤을 강의한 일이 있다. 두고 온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가 좌절되었을 때의 아픔을 이해할 만 했다.일반적으로 기독교 윤리에서 볼 때, 일부 일처제 원칙(마19:4~6,고전7:10), 항구성의 원칙, 그리고 신실성의 원칙은 결혼과 가정생활의 3가지 원칙으로 알려져 있다. 결혼과 가정은 한 남자와 한 여자를 결합시키는 것으로서 죽음만이 그것을 갈라놓을 수 있는 전 생애적인 위임(Whole life Committement)이다. “살아서 아내와 만날 수 있기를 빌고 있지만 사실 나이 팔십이 넘었으니 살아서 못 만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더라도 우리의 사랑은 천국에서까지 영원할 것입니다.”는、그의 말은 감동적이다. 이렇게 볼 때 장기려의 자기 희생적인 삶은 오늘의 젊은 세대들에게 혼인의 신성함과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일화...

<아내는 남편 장기려가 남으로 떠나는 것을 보려고 차를 기다렸지만 오지 않자 아이들을 데리고 대동강으로 나갔다. 장기려를 데리러온 국군 의무대 수송버스는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기려의 집으로 왔다.

"아버님, 국군 버스가 왔습니다. 저는 버스로 내려가니 집사람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십시오." "여기 걱정은 말고 네 몸조심이나 해라. 중공군이 이 늙은이들을 어쩌겠느냐? 배편이 구해지면 어멈과 아이들을 보내겠다. 전쟁이 얼마나 가겠느냐. 머칠만 피해 있으면 다시 만날 걸 가지고... 어서 떠나거라." "예, 아버님 어머님 그동안이라도 건강하십시오."

그때 마침 밖에서 들어오던 둘째 아들 가용이 아버지가 든 무거운 가방을 받아들고 버스가 있는 곳까지 배웅해주러 왔다. "아버지 안녕히 다녀오십시오."어린 아들은 아버지가 가까운 병원에라도 출근하려는 줄 아는지 이렇게 인사를 했다."박사님! 아이를 어서 태우세요." "자리가....""시간이 없습니다. 어서요!" 군의관의 급한 목소리에 가용은 아버지를 따라서 얼떨결에 버스에 오르고 말았다. 평양 화신백화점 앞을 버스가 지나치는데 가용이 갑자기 소리쳤다. "저기 엄마와 신용이가...." 가용은 어머니와 누이동생이 손을 잡고 가는 것을 보았다. 버스 안에서 손을 흔들었지만 어머니의 모습은 사람들 속으로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렸다.>

이것은 사랑의 의사로 알려진 장기려가 가족과 생이별하는 장면이다. 그야말로 며칠만 지나면 다시 만나리라고 믿었던 이 헤어짐이 40년의 무정한 세월로 이어지고 만 것이다. 춘원 이광수의 대표작 '사랑'의 남주인공 안빈의 모델로도 잘 알려진 그는, 부산에 구휼병원인 복음병원, 청십자병원을 세워 40년 가까이 사랑과 믿음의 인술을 실현하여, 지난 '79년에는 막사이사이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처럼 월남 때 가까스로 차남 가용(현 서울의대 해부학 교수) 씨만 데료온 그는 '88년에야 미국에 있는 조카 며느리가 곳곳으로 수소문한 끝에 아내와 다섯 자식의 생존 소식을 처음으로 알았다고 한다. 그리고 '91년 북한을 방문한 조카며느리가 사진과 편지를 가져다줘 42년만에 '간접상봉'을 할 수 있었다. 그는 남한에 내려와 부산을 중심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치료해주고, 정부 주도의 의료보혐이 실시되기 벌써 10년 전에 그의 주도로 청십자의료보험을 창설하여 세인의 귀감이 되고 있다.


이제 그가 사랑의 인술을 편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그의 면모를 살펴본다.

돈없는 환자를 도망시키다..

어느날, 복음병원에서 회진을 하러 가던 기려는 벌써 머칠 전에 퇴원을 해도 좋다고 지시한 환자가 그대로 있는 것을 보았다. "아니, 당신 아직 퇴원 안하고 뭘하노. 수술 경과도 썩 좋았는데..." 환자는 기려를 보자 머뭇 거리다가 말했다. "서무과에서 퇴원을 못한다고 합니다. 모자라는 입원비를 가져올 때까지 신분증을 보관한다고 가져갔습니다." "뭐라고요?" 회진하던 발걸음을 서무과로 돌린 기려는 벼락같은 고함을 질렀다. "여기가 병원이지 세무서냐?" 화가 난 기려는 사무실의 책상을 엎어버렸다. 언제나 온화하고 인자한 원장이 이처럼 화를 내는 모습을 직원들은 처음 보았다.

엎어진 서랍 속에서 모자라는 입원비 대신 받아둔 반지나, 시계, 목걸이 들이 튀워나왔다. 기려는 그것을 보자 현기증을 느끼며 걸살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천막 무료병원에서부터 시작한 복음병원이 이렇게 변해 있었다지, 기려가 환자를 돌보는 일에만 열중해 있는 동안 병원은 무료의 뜻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당장 병원 문을 활짝 열고 가난한 사람들이 마음대로 드나들게 만들었다.

그가 청십자병원장으로 있을 때였다. 그가 돈을 돌보지 않는 버릇은 여전하여서 돈이 없다고 사정하면 누구든 무료로 치료해주었다. 환자 가운데에는 돈이 있으면서도 없다고 하는 사람도 더러 있을 정도였다.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와서 그렇게 사정을 해도 기려는 그의 말을 믿어 주었다. 옆에서 보는 직원들이 속고 있는 원장이 하도 답답하여 '원장님, 그 환자가 정말 돈이 없는 환잔 줄 아세요?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낀 걸 못 보셨어요?' 하면 '보았지, 하지만 그가 지금 돈이 없다고 하면 그대로 믿어야지'할 정도였다.

이런일 때문에 정말 딱한 지경에 처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경남 거창에 살고 있는 한 가난한 농부는 입원비가 밀려 퇴원할 수가 없었다. 생각다 못한 그는 기려를 찾아가 하소연 하였다. "모자라는 돈은 벌어서 갚겠다고 해도 믿지 않습니다." 환자의 사정을 들어본 기려는 마침 주머니에 돈도 없고 하여 한 가지 묘안을 알려주었다. "그냥 살짝 도망쳐 나가시오. 밤에 문을 열어줄 테니." 마치 남의 병원에 와서 큰 인심이나 쓰는 듯한 원장의 말이었다. 농부는 원장의 이 말에 깜짝 놀라 더듬거렸다. "그렇지만 어찌 그럴 수가..." "할수없는 일 아닌가? 낼 돈은 없고, 병원 방침은 통하지 않고, 당신이 빨리 집에 가서 일을 해야 가족들이 살 것 아니오." 농부는 기려의 말에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했다. 그날 밤 기려는 서무과 직원들이 모두 퇴원하고 난 뒤, 병원의 뒷문을 살그머니 열어놓았다. 밤이 이슥해지자 이불 보퉁이를 든 가족과 환자가 머뭇거리며 나타났다. 어둠속에서 기려가 가만히 농부의 거친 손을 잡았다. "얼마 안 되지만 차비요. 가서 열심히 일 하시오." 농부의 가족은 가슴이 막히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이었다. "원장님, 106호 환자가 간밤에 도망쳤습니다." 간호원의 말을 듣고 서무과 직원이 원장실로 뛰어왔다. "내가 도망치라고 문을 열어주었소." 기려는 겸연쩍은 듯 웃으며 말했다.

"다 나은 환자를 병원에 붙들고 있으면 그 가족들은 어떻게 살겠소? 빨리 가서 농사를 지어야 가족들 고생도 덜지. 지금이 한창 농번기인데....." 서무과 직원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원장실을 나왔다. 그러나 그의 얼굴에는 처음과는 달리 웃음이 번져 있었다. 여느 병원보다 월급이 적은데도 기쁘게 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거지에 수표를 주며...

어느날 장기려가 외출하기 위해 병원을 나섰는데, 한 나이 많은 거지가 그의 옷을 붙들었다. 기려는 그;의 측은한 얼굴을 보며, 여기저기 주머니마다 손을 넣어 돈을 찾았지만 비어 있었다. "아차, 미처 돈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거지 노인은 아주 실망하여 잡고 있던 옷자락을 놓았다. 몇걸음 옮기던 기려는 다시 돌아서서 '노인 거기 잠깐만 계십시오'하고 불러세웠다. 노인이 희망이 넘치는 얼굴로 다시 다가왔음은 물론이다. 기려는 양복주머니에서 월급으로 받은 수표를 찾아낸 것이었다. 막상 기려가 내민 수표를 보자 거지 노인의 얼굴이 다시 실망으로 그늘졌다. "이 종이 나부랭이가 돈이란 말이오?" 다시 돌아서려는 거지 노인을 기려는 다시 붙들었다. "이것은 수표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은행에 가지고 가면 돈으로 바꿔줄 겁니다." 수표를 처음 보는 노인은 놀라움으로 눈이 둥그래졌다. 기려는 마치 수표라도 있었기 망정이지 정말 큰 일날 뻔했다는 듯 가볍게 발걸음을 돌렸다. 그 며칠 후 병원 원장실로 전화가 왔다. "여기 은행입니다. 혹시 수표를 잃어버리신 일이 없으신지요?" "아닙니다. 그런 일 없습니다." "웬 거지 노인이 박사님 사인이 된 수표를 가지고 왔는데요." "아! 그것 말이군." 기려는 그제서야 며칠 전 거지에게 준 수표가 생각났다. "그 수표 내가 준 것이니 그리 알고 돈을 지불해 주시오." 기려는 거지 노인이 그가 일러준대로 은행에 찾아간 것이 고마웠다. "박사님께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이런 수표까지 거지에게 주시다니요." 은행원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거지에게 준 수표 한장.그 수표가 얼마짜리인지는 수표를 준 기려와 그것을 받은 거지, 그리고 돈을 지불한 은행원, 그리고 하나님만이 아시는 일이었다.


혼수로 가져온 이불을 고학생에게...

홀로 데리고 내려온 둘째 아들 가용이 결혼을 했을 때의 일이었다. 며느리는 혼자 사는 시아버지에 대한 정성으로 비단 이부자리를 마련해왔다. 하지만 기려는 푹신하고 편안해 보이는 이부자리를 보자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다니는 교회에서 가끔 만나는 고학생의 모습이 떠오르자 기려는 며느리에게 얼른 말했다. "얘야, 이 이불을 그 녀석에게 갖다줘야겠구나. 겨울에는 늘 감기를 앓는 아이거든..." "아버님 무슨 말씀이세요? 제 혼수가 아버님 보시기에 변변치 않다면..." 며느리는 남편에게서 입은 옷도 거지에게 잘 벗어주고 온다는 시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혼수까지 남에게 주자고 할 줄은 몰랐다.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뜻을 무조건 거스리기가 뭣해 '아버님께서 꼭 그러시기를 원하신다면, 제 성의를 보아 새 이불은 아버님이 쓰시고, 지금 사용하시는 걸 남에게 주면 어떻겠어요?'하고 말했다. 사리에 맞는 절충안이었지만, 기려는 오히려 며느리의 생각이 엉뚱하다는 얼굴이었다.'얘야, 이왕 남에게 주려면 쓰던 것보다는 새것으로 주는 게 예의가 아니겠니?' 며느리는 더 이상 고집을 부려봐야 이 시아버지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혼수 이불을 고학생의 자취방으로 보내주었다.


"책보다는 돈이 낫지 않겠나...?"

병원 경비원이 순시를 하다가 원장 사택쪽으로 숨어드는 그림자 하나를 보았다. 얼마 전 한복을 도둑 맞았다는 소문을 들은 경비원은 이번에도 도둑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경비원은 이 기회에 자기 손으로 꼭 도둑을 잡고 싶었다. 그는 그렇게 해서라도 원장 장기려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으려고 하였다. 경비원은 오랫동안 골수염으로 고생하던 사람이었는데, 3년째 누워 지내던 어느날, 외출했던 친척이 헐레벌떡 들어오며 병을 고칠 방법이 생겼다고 흥분하였다. "장박사가 사택에서 병원으로 오는 길에 자갈밭이 있는데 거기 누워 있다가 그분 눈에 띄어 돈 없어도 병 고친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군." 경비원은 친척의 말을 믿을 수 없었지만 시키는 대로 했다. 그리고 마침 출근하는 기려의 눈에 띄어 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받았다. 퇴원을 하던 날, 그는 부끄러운 나머지 장기려를 찾아가 사실대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걱정 마시오. 오죽하면 자갈밭에서 나를 만나려고 했겠소." 기려는 빙긋이 웃으며 오히려 그를 위로해주었다. "당장 힘든 일은 피하는 것이 좋겠소. 혹시 병원 경비원으로 일해볼 마음이 있으면 여기에 있어도 괜찮으니 생각해 보시오." 그래서 경비원이 된 그는, 고마움을 갚을 길이 없던 터에 마침 사택으로 숨어드는 도둑을 발견한 것이었다.

경비원은 구두를 벗어놓고 발걸음을 죽인 채, 서재의 창문을 살폈다. 그러나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원장이 이미 도둑을 잡아놓고 조용한 목소리로 타이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도둑은 서재 앞에다 가져온 보자기를 펴놓고 책을 사려고 한 모양이었다. "젊은이, 그 책 가져가면 고물 값 밖에 더 받겠소? 그러나 나에겐 아주 소중한 것이라오. 내가 대신 그 책 값을 쳐줄 테니 책을 두고 가시오. 무거운 책보다야 돈이 더 낫지 않겠소?" "원장님,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도둑의 떨리는 목소리였다. "이 돈을 가져가시오. 그리고 이 짓 말고 바르게 살 생각이 있으면 찾아오시오." "잊지 않겠습니다. 원장님." 도둑은 돈을 받아들고 허둥지둥 달아나 버렸다. 경비원은 사라지는 도둑의 뒷모습만 멍하니 보고 서 있었다. 다시 고양이 걸음으로 걸어나오면서 경비원은 벗어두고 온 것이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은혜를 갚을 기회는 놓쳤지만, 커다란 감동 하나가 가슴 가득 차올랐다.


병은 약이 아닌 사랑의 손길로...

거제보건원의 정희섭 원장은 기려가 월남해 왔을 때 부산 제 3 육군 병원의 원장으로 기려를 받아주었던 사람이다. 그런 인연으로 기려는 2주일에 이틀씩만 거제도에서 환자를 보기로 했다. 그가 오는 날은 병원이 장날처럼 붐볐다. 외딴 섬마을에서 오는 환자들은 바람이 불어서 배를 탈 수 없을까 걱정되어, 미리 병원 가까운 여관에 들기도 했다. 어느 할머니는 손자가 수술을 받고 퇴원하게 되는 날, 손수건에 달걀 3개를 싸와서 기려의 손에 쥐어 주었다. "선생님, 우리 삼대독자를 살려주셔서 참말로 고맙습니다." 기려는 순간 할머니의 얼굴에서 기도로 키워주신 할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할머니, 손자의 병은 제가 낫게 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조금 도와주었을 뿐입니다." "무슨 말씀을요. 선생님이 수술하여 우리 손자를 안 살렸습니까?" 기려는 웃으며 설명했다. "할머니, 우리 몸에는 자기 스스로 낫게 하는 힘이 있답니다. 그 힘이 없다면 의사는 아주 작은 수술도 못한답니다. 할머니는 칼을 쓰시다가 혹 손을 벤 일이 있었지요?" "암, 있고 말고요." 할머니는 유명한 박사님이 이렇게 친절하게 물어오는 것이 고마워서 자세하게 대답하였다. "어디 약을 바르고 할 틈이 있습니까? 피가 멈추게 꼭 싸매두고 일을 하다보면 언제 나았는지 모르게 말짱해졌지." 할머니는 손가락의 상처 자국을 찾아내려고 앙상한 손을 펴서 들여다 보았다. "알 듯도 하지만 그래도 이상하네요. 우리 손자를 선생님이 분명히 살려내시고도 그 공이 아니라고만 하시니...." 할머니가 두고 간 달걀 3개의 마음은 기려가 무의촌을 찾을 때마다 떠올랐다. "환자는 의사가 조금만 친절하게 해주어도 고마워한다네. 그 고마워하는 마음이 병을 빨리 낫게 하는데 큰 몫을 하지. 훌륭한 의사가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네. 의사로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네." 이것은 기려가 무의촌을 다니면서 깨닫게 된 것을 의사가 되려는 학생들에게 심어주는 말이었다.


40년 만에 편지로 만난 부부...

장기려는 이처럼 오늘까지 사랑의 의사로 살아온 사람이지만,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빛은 그치지 않는다. 40년 넘게 남쪽에서 살아오는 동안 그의 홀아비(?) 신세를 면케 해줄 몇 차례의 청혼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마다 기려는 '아내가 북에 살고 있습니다. 아내가 나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 기다림을 어찌 저버리겠습니까?'하며 완곡하게 거절하곤 하였다. 그렇게 청혼을 거절하고 돌아온 날 밤에는 아내가 꿈속에서 웃었다. 그런 그의 기다림은 헛되지 않은 것인지 장기려는 '88년 북한에 있는 그의 가족들이 모두 잘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한국전쟁 때 열일곱 어린 나이에 인민군으로 징집되어 간 큰아들 택용은 약학박사가 되어 국제회의에 가끔씩 참석한다는 소식이었고, 큰 딸 신용은 식품공학사, 성용은 핵물리학 박사, 인용은 이론물리학 박사, 진용은 교사로 일한다고 하였다.

나중에 미국에 살고있는 조카딸 장혜원이 여기저기 알아본 바에 따르면 그의 팔십이 넘은 아내가 아직도 건강하다는 것이었다. 기려는 이 소식에 접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이제껏 남쪽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면, 그 누군가가 북쪽의 가족들을 기려 대신 보살펴주리라는 소망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에 그는 한없이 감격하였던 것이다. 그의 조카딸은 가까스로 북에 있는 가족들의 편지도 가져다주었다. 그의 큰딸 신용은 편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었다.

<언니가 보내준 2장의 사진을 보고 저희들은 꼼짝할 수가 없었어요. 아버지의 사진과 가용 오빠의 사진을 만지며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언니, 더 슬픈 것은 어머니가 아버지를 못알보시는 것이었어요. '가용이구나. 너희 아버지 모습이 많이 들어 있어.하시는 어머니의 마음 속에는 가용 오빠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던지 아버지의 사진을 보시곤 가용 오빠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어머니는 또 한장의 사진을 가리키며 이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어요. 저희들이 이 사진이 가용 오빠이고, 처음 보는 사진이 아버지라고 했더니 어머니는 너무 놀라 한동안 말이 없었어요. 언니, 사실 아버지의 모습은 너무 젊어 꼬부랑 할머니가 된 우리 어머니가 못 알아보실 만도 하였어요. 어머니는 아버지의 사진을 말없이 바라보시더니 '우리가 사진으로 이렇게 만나다니요?' 그러시곤 한참을 우셨어요.>

기려는 이 편지 대목에서 아내가 울었듯이 한참 울었다. 아내보다 젊어 보인 것이 너무 미안했다. 장기려 가족의 헤어짐은 단순히 일가족의 이산을 넘어 민족 분단의 상처가 우리 민족 전체의 가슴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아로새겼는가를 생각케 한다. 그러나 우리의 가슴을 더욱 뭉클하게 한 것은 그가 북의 아내에게 띄운 편지다.

<40년을 남한에 살면서 재혼하라는 권유도 많이 들었다오. 그러나 당신에게 한 스스로의 언약, '우리 사랑은 영원하다. 만일 우리 둘 중 누가 하나라도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이 사랑은 없어지는 것인가. 아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육으로 있을 때뿐 아니라 떠나 있을 때에도 영원히 꺼지지 않는 생명의 사랑이다'라고 한 말을 상기하며 당신을 기다렸소. 여보, 몇년 전 남북한의 이산가족들이 몇명씩 남과 북을 방문하여 해후의 기쁨을 나누고 돌아온 것을 기억하지요. 난들 왜 가보고 싶지 않겠소. 당신과 자식들을 만나고 지금은 돌아가셨을 부모님 산소도 둘러보고 고향집과 평양 신양리의 옛집에도 가보고 싶소. 그러나 일천만 이산가족 모두의 아픔이 나만 못지않을 텐데, 어찌 나만 가족 재회의 기쁨을 맛보겠다고 북행을 신청할 수 있겠소. 나는 내 생전 평화통일이 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온 민족이 함께 어울려 재회의 기쁨을 나누는 그날 다시 만나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