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을 행복으로 바꾼 손태영 명지전문대학 교수

[미션라이프] 3세 때 걸린 소아마비의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기 시작했다. 약하고 짧은 왼쪽 다리 때문에 걸음은 흔들리고 뒤뚱거렸다. 초등학교 5학년 어느 날 하굣길이었다. 동네 꼬마들이 절름발이라고 놀리면서 돌을 던지고 달아났다. 숱하게 겪어온 일이지만 이날따라 유난히 서럽고 분했다. 가슴속에 켜켜이 쌓인 설움과 울분이 분출되면서 밤새 울었다. 급기야 부모에게 떼를 써 학교를 그만뒀다.

23세 때까지 초등학교 졸업장조차 없었다. 도저히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는 운명이었다. 세상을 탓하고 부모를 원망하기에도 지쳤다. 수많은 날들을 눈물로 베개를 적셨다. 죽음까지도 생각했다. 그러던 중 생각을 바꿨다.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생각을 몽땅 털어냈다. 대신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사고로 무장했다.

벤처기업인 ‘문헌정보’ 대표이자 명지전문대 교수인 손태영(55)씨의 인생은 한 마디로 극적이다. 절망의 끝에서 희망을 찾아내고, 패배의 바닥에서 승리를 채 올리고, 불행의 구렁텅이에서 행복을 건져내는 한 편의 드라마를 방불케 한다.

나는 절름발이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드라마 같다고 여기지 않을 이가 있겠습니까. 나도 마찬가집니다. 몸은 절름발이지만 인생까지 절름발이로 살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굳이 무슨 말이 필요하랴. 손씨는 장애인이다. 그것도 중증이다. 그런 그가 지금의 입지에 오르기까지엔 얼마나 많은 사연이 있었겠는가. 그의 이력서를 꼼꼼히 살피려면 제법 시간이 필요하다. 본격적으로 사회활동을 시작한 이래 20여 년 동안 힘든 걸음걸이로 남긴 족적이 만만찮다. 서울대 숙명여대 등에서 강사를 지내고 정부 부처와 삼성그룹 등 기업체 등에서 행한 특강만도 1500회가 넘는다.

그와의 첫 대면이 어찌 쉬웠겠는가. 동정과 연민, 안쓰러움과 미안함까지 있었다. 하지만 그런 감정들이 똑바로 걷는 자의 교만임을 깨닫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절름발이’라는 단어를 썼다. 장애 같은 건 이미 초월했다는 뜻이 아닌가. 밝은 표정과 쾌활한 말투는 상대방의 마음을 편하게 해줬다.

나는 행복하다

“사람들은 대부분 날보고 불행을 떠올릴 겁니다. 하지만 나는 결단코 행복합니다. 행복은 행복해하는 사람을 따라다닌다는 진리를 깨닫고 난 뒤부터 행복해졌습니다. 행운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행복은 이미 누구에게나 준비돼 있는 게 아닐까요.”

뜬금없는 대답이 나왔다. 살아온 과정을 이야기해 달라는 질문에 그는 행복하다는 말부터 꺼냈다. 가장 하고 싶은 말이었던 모양이다. 살아가는 이유이자 목표였던 모양이다.

그의 이야기는 그침이 없었다. 충북 충주의 평범한 집안에서 3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장애인으로서 인생길을 헤쳐온 그는 말 그대로 역전의 주인공이었다. 그의 살아온 과정 중 어느 한 부분도 예사롭지 않았다. 장애를 극복하는 과정, 가정과 가족사, 인생철학과 비전….

“청년기의 어느 날, 하나님을 원망하던 중 갑자기 생각 하나가 밀물처럼 머릿속으로 밀려들었습니다. 사는 방법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투정 비슷한 나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신 게지요.”

한 일간지 귀퉁이에 실린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중학교 입학자격 검정고시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한 자신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1978년 서울로 올라와 시험을 치러 당당히 합격했다. 이어 고입과 대입 검정고시를 1년 간격으로 통과했다. 82년 충북대 법대에 들어갔다.

선망하던 대학 졸업장을 받았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지는 일은 없었다. 좋아하는 컴퓨터 공부를 하면서 중졸로 속여 미싱사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다 정보 제공 인터넷 업체인 ‘문헌정보’를 설립했다. 승승장구하던 중 지방의 한 대학 정보통신과 겸임교수 초빙 공고를 보게 됐다. 우여곡절 끝에 채용돼 학교와 학생들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새로운 인생을 열게 됐다. 여기저기서 강사로 초대됐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강의와 강연에 임했다.

나는 꿈쟁이다

“한 번은 집창촌 여성들 앞에서 강연을 하게 됐습니다. 그들 앞에서 왼쪽 바지를 걷어 올려 가느다란 뼈에 가죽만 붙어있는 앙상한 다리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곤 예쁜 다리를 가지고 왜 몸을 파느냐고 반문한 뒤 내 인생과 꿈에 대해 말해주었습니다. 여기저기서 훌쩍거리더군요. 결국 많은 이들이 지금부터 새롭게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의 강연은 상당한 파장을 일으킨다. 때론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장애인의 강연이란 실증적 측면도 있지만 무엇보다 치밀한 준비로 임하기 때문이다. 대상은 교도소 수인들부터 정부 부처 고위공무원들까지 광법위하다. ‘걸음은 흔들려도 인생만은 똑바로 걷자’는 메시지를 상황에 맞게 풀어준다. 행복과 꿈, 희망, 리더십 등을 실감나게 전해준다. 그 내용을 정리해 최근 ‘위기는 타이밍이다’(도서출판 소망)라는 책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나는 빚진 자다

손씨는 지금도 돌아가신 부모를 생각하면 가슴 한 쪽이 시큰해진다. 뜻하지 않은 장애를 갖게 된 자신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신 두 분이다. 두 분에게 진 빚이 너무 크다.

특히 어머니의 처절한 기도가 없었다면 오늘의 자신은 있을 수 없다고 여긴다. 어머니의 기도는 온 가정을 구원으로 이끌었다. 충주성결교회에 다니던 어머니는 87년 돌아가시는 날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 제단을 쌓으셨다. 아버지는 아들의 다리를 고치기 위해 안정된 직장에 사직서를 내고 전국의 용하다는 병원과 한의원을 다 찾아다니셨다. 아들의 장애를 안쓰러워하며 혼자 눈물 흘리시던 아버지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대학생이 된 아들을 보신 아버지는 이내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조용히 눈을 감으셨다.

“어머니 때문에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죠. 학교를 그만두고서도 주일예배엔 꼭 참석했습니다. 검정고시 준비를 할 때도 교회 창고에 틀어박혀 공부했습니다. 교회는 유일한 나의 안식처였습니다. 이후 어머니로 인해 친가와 외가 모두 완전 믿음의 집안이 됐습니다.”

잘 나가던 공무원이었던 손씨의 남동생은 어머니의 서원에 따라 목회자가 됐다. 충북 제천 새생명전원교회 손태흥(53) 목사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장신대 신대원에 들어간 것이다. 여화여대 출신의 재원이었던 여동생도 연세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교회 교역자로 일하고 있다.

나는 개척자다

손씨는 개척자다. 자칫 운명론에 붙들려 평생을 정신적 노예로 살아갈 수 있었지만 그는 거뜬히 극복했다. 어차피 바꿀 수 없는 게 운명이라면 그것에 끌려가기보다 그것과 맞서 싸우자는 심산이었다.

그는 그런 자신의 인생관을 말하면서 기어코 토를 하나 달았다. ‘하나님의 은혜’다. 그분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오늘의 자신은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결혼을 하게 된 과정에는 그분의 깊은 개입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손씨는 서울 소망교회에서 부인과 만나 처가 집안의 극심한 반대 등 우여곡절 끝에 결혼했다. 그런 그에게 있어 하나님은 어떤 존재인지 더욱 구체적으로 알고 싶었다.

“나를 인생이라는 무대에 올리셔서 그분 자신의 능력과 살아계심을 증거하시는 분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살리셔서 영광을 드러내시고 승리하시는 분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연출하시는 드라마의 배우입니다.”

의미심장했다. 그는 요셉, 모세, 다윗, 다니엘, 모르드개 등 성경의 인물들을 거론했다. 하나같이 큰 위기를 극복하고 영광을 얻은 인물들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감옥에 보내기도 하고, 사자굴에 던지기도 하고, 많은 전쟁을 치르게도 한 뒤 마침내 승리를 얻게 하셨다. 그들의 극적인 삶을 통해 그분 자신을 증거하셨다.

손씨는 이야기를 하는 동안 ‘감사하다’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도대체 누구에게 감사하다는 말인가. 주체는 자기임이 분명한데 객체는 누구란 말인가. 그는 먼저 하나님을 꼽았다. 그리고 가족을 비롯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라고 했다. 이어서 그는 “걸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했다. 걷지도 못하는 이들을 보면 절로 감사가 나온다는 것이다.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 인생이란 무대에서 아직 내가 해야 할 역할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생무대에서 수고했다며 내려오라고 할 때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멋지게 살려고 합니다.”

이야기를 마무리할 때가 된 것 같아 세상 사람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을 청했다. 그는 주저 없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믿고 노력하라”고 말했다. 흔들리는 걸음걸이로 살아왔지만 그분은 언제나 중심을 보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 삶이 누군가에게 희망의 씨앗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또렷하게 밝혔다.

정수익 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