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목자병원이 선교활동을 펼치는 데 가장 큰 위기는 2008년에 닥쳤다. 그것은 돈 문제도, 세무조사도, 사회주의 국가의 법적 제재도 아니었다. 삶의 모델과도 같았던 아버지 이종찬 장로의 소천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우리 병원 고문으로 계시면서 2004년부터 시작된 선교활동에 동참하셨다. 앞서 말했듯 모든 과목의 진료가 가능하셨던 아버지는 네팔 라오스 파키스탄 미크로네시아 중국 인도네시아 등 선교 현지에서 훌륭한 의료선교대원이었다. 아버지는 신앙과 의술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원칙적이었고 정도를 걸으셨다.

2007년 9월 중국 선양 의료선교를 마치고 통화라는 곳에서 저소득층 주민들을 위해 진료활동을 펼쳤다. 그런데 그만 그곳에서 문제가 생겼다. 산악지역이다 보니 날씨가 쌀쌀했다. 음식마저 기름져 소화가 잘 되지 않았다. 아버지를 포함한 선교대원은 새벽 1시까지 진료활동을 펼쳤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안색이 안 좋아지셨던 것 같다.

귀국 후 며칠이 지나 아버지께서 나를 부르셨다. “창우야, 아무래도 내 몸 상태가 예전 같지 않구나.” “아버지, 무슨 말씀이세요? 어디가 어떠십니까?” “식도에서 출혈이 있는 것 같다. 너도 알다시피 내 꿈이 선교하다가 죽는 것 아니니.” “아휴, 아버지. 절대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그 일이 있은 뒤 아버지의 복수가 차기 시작했다. 서울 삼성의료원에 입원했는데 간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입원 기간이 길어질수록 아버지의 몸 상태는 점차 나빠졌다. 말씀을 못하고 눈만 깜빡거리는 상황을 거쳐 혼수상태가 지속됐다.

2008년 9월 1일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를 인천의 인하대병원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오랜 기간 인하대병원을 위해 헌신하셨던 아버지를 위해 해야 할 도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8일 후 아버지는 이 땅의 삶을 마감하고 천국으로 가셨다. 당신의 마지막 말씀은 간단했다. “고맙다. 감사하다. 그리고 사랑한다.”

‘아버지, 당신의 유업에 따라 평생 의료선교에 헌신하도록 하겠습니다. 삶으로 보여주신 그 길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 어머님 잘 모시겠습니다.’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인하대 병원에선 최대한의 배려를 해주셨다. 장례식장 리모델링을 마친 지 한참 지났지만 아버지의 빈소를 차리기 위해 특실 접수를 받지 않았다.

수많은 조문객이 몰려들었다. 수술비를 대신 내줬던 환자부터 의대 교수, 의사협회, 학회 관계자, 대한적십자사 지도부 등 그루터기 같았던 아버지의 삶을 기리고자 많은 분이 찾아왔다. 조화가 장례식장 계단을 타고 위층까지 가득 찼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한동안 현지를 직접 방문하는 의료선교는 잠시 휴식기간을 가졌다. 하지만 선교 현지의 무료진료소 5개는 그대로 운영했다. 하지만 그대로 머무를 수는 없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쟁쟁하게 울리는 듯 했다. “세상에 하나도 쓰지 못할 게 없더라. 하나님은 내 인생에 배운 것을 모두 쓰게 해 주셨다. 너도 그럴 것이다. 하나님께 충성 봉사해라.”

그렇다. 미국 존스홉킨스대 병원과 피츠버그의대 병원, 하버드의대 병원에서 세계 최고의 의술을 배울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은혜였다. 우리의 삶이 마이너스가 될지라도 믿음의 발자취를 남겨야 한다. 그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고 아버지가 원하셨던 삶이다.

아버지의 헌신적인 삶은 나뿐만 아니라 두 손자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할아버지와 함께 선교 현장을 누볐던 두 아이가 조부처럼 훌륭한 의사가 되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역경의 열매 선한목자병원장 이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