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냄새였다. 1960년대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남심을 흔들었던 박재란(71·안산 동산교회 권사)씨가 생애 2번째 큰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다. 3년 전 서울을 떠나 경기도 안산 동산고등학교 인근의 아파트에서 지낸다. 박씨는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가장 많은 음반을 낸 스타였다. 어려웠던 시절, 그녀는 희망가를 불렀다. ‘산 너머 남촌에는’ ‘님’ 등 무려 1000여곡이다. 57년에 데뷔해 17년간 화려한 시절을 보냈다. 그 사이 이혼의 아픔도 있었다. 그리고 73년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가 밤무대를 휩쓸었다. 하지만 결과는 허망함이었다. 거기서 결혼도 했으나 마흔 줄에 들어 또 이혼해야 했다. ‘3번째 남자’를 만났다. 예수 그리스도였다. ‘그와’ 함께 귀국한 것이 90년대 중반. 닳고 닳은 성경책을 품고서였다. 8월의 마지막 주 세월을 잊고 ‘노래하는 전도사’로 사는 박씨를 만났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가 되는 것이 있다면.

“첫 남편과 헤어진 것이다. 밥을 제대로 차려주지 못했다. 남편이 영화사업을 하며 허랑방탕한 생활을 했다. 지금에 와 돌이켜보면 남편의 잘못보다 서로에게 잘못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고 들었다.

“미국에 간 지 얼마 안돼 집에 큰 불이 났다. 사진 한 장 남김없이 다 타버렸다. 80년대 초반에 악성 위궤양과 신장염으로 쓰러졌다가 살아났다. 3년 전 부정맥으로 대수술을 받았다. 지난 4월엔 위에 난 종양(식도정맥류 파열)을 제거했다.”

-영화도 출연했다.

“‘산 너머 남촌에는’ ‘진주조개 잡이’ ‘맹꽁이 타령’ 등이 부르는 족족 떴다. ‘님’은 레코드가 나오자 시중에 품절될 정도로 최고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노랫말에 나오는 ‘창살 없는 감옥’을 타이틀로 영화도 찍었다. ‘천생연분’에선 주연을 맡았다. 당시 고급차 로얄살롱을 탄 사람은 연예인 중 가수 최희준과 나밖에 없었다.”

-미국은 왜 갔나.

“낙원일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불법체류 신세가 됐다. 그곳 밤무대에서 인기를 끌었지만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재혼을 해 영주권을 얻었지만 불행의 터널은 끝나지 않았다.”

-언제 크리스천이 됐나.

“지금도 수수께끼다. 80년대 초반, 어느 날 응급차에 실려 갔다. 난치성 신경성위궤양이란 진단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기진맥진해 소파에 누워서 텔레비전 채널을 돌렸다. ‘광야의 소리’라는 프로그램이었다. 한국말로 나오는 방송이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 또한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의학적으로 고칠 수 없는 불치병도 고치신다’는 말씀이었다. 그 순간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올랐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온 몸이 눈물과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나도 모르게 하나님이라는 외침이 나왔다.”

-왜 가수를 포기했나.

“마태복음을 시작으로 성경책을 읽고 또 읽었다. 아무리 신나는 노래를 불러도 흥이 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밤무대도 멀어졌다.”

-고국엔 언제 들어왔나.

“90년 중반에 귀국했다. 서울 신림동 고시촌에서 하숙생 신세로 살았다. 하숙생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전국 방방곡곡 교회가 있는 곳을 찾아 다녔다.”

-피는 못 속인다고 하던데.

“둘째 딸이 가수 박성신이다. 지금은 목회자 사모가 됐다. 대전에 있는 ‘헤아릴수없는기쁨교회’다. 다행히 딸도 세상 노래를 접고 복음성가를 부른다. 앨범 2개를 냈는데 나보다 낫다.”

-숱한 역경을 어떻게 넘었나.

“다 놓아도 성경만은 붙잡아라. 거기에 놀라운 비밀이 있다.”

-예수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온몸이 오싹해진다. 예수님 없는 인생은 공허할 뿐이다. 세속적인 기쁨은 움켜질수록 허무한 것이다. 얼마나 많은 스타들이 비극으로 생을 마쳤는가.”

-주일 성수하기 어려우셨을 텐데.

“어린아이가 집을 나왔다고 치자. 돌아가지 않고 마구잡이로 밖에 나돌아 다니면 어떻게 되겠나. 교회는 집과 같다. 주일은 물론, 수요예배와 새벽기도 빠짐없이 나가야 한다.”

-데뷔한 지 50년이 넘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최근 ‘산 너머 남촌에는’(엔크리스트)이라는 책을 냈다. 다시 대중가요를 부르고 싶지 않지만 나만의 콘서트를 열고 싶다. 왠지 모르게 그 무대가 떠오른다.”

윤중식 기자 yun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