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 : 김학중 목사

본 문 : 욥기 13장 3절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

 

지난 주일(4.15) 우리는 ‘악의 문제’ 중에서도 ‘죄(악)의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악의 문제’ 중에서 ‘불행의 문제’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불행’은 자연 재해, 사고, 질병, 죽음, 사업 실패, 가정불화처럼 ‘우리 삶의 평온을 깨뜨리는 모든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즉 불행 속에는 우리의 행복과 평안을 막는 모든 일들이 대부분 포함됩니다.

 

여러분의 주위를 둘러 보십시오.

불행을 겪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는 모두 다양한 불행 속에서 살아갑니다.

뜻하지 않은 질병, 실패, 사고 등을 수시로 당하고 살아갑니다.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2010년 한 해 동안 약 23만 건의 교통사고가 발생했는데, 이는 인구 1천 명당 5건꼴로 교통사고를 당한 셈입니다.

또한 같은 기간 동안 5,505 명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는데, 이는 인구 1만 명당 1명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뜻입니다.

또한 같은 기간 동안 약 35만 명이 교통사고로 부상을 입었는데, 이는 인구 1천 명당 7명이 교통사고로 다쳤다는 의미입니다.

이 비율로 계산하면, 우리 꿈의교회 가족들 중에도 상당수가 매주 교통사고로 크고 작은 피해를 입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실, 보통 사람들이 불행을 만나면,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다지 큰 고민거리는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불행을 당한 사람의 주변 사람들은 ‘평소 그 사람에게 무슨 문제가 있었겠지’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보통 주변 사람들의 반응도 ‘애당초 그 사람이 그럴 줄 알았어!’라고 나옵니다.

하지만 소위 ‘법 없이도 살 사람’이 큰 불행을 당하면,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습니다.

‘저렇게 착한 사람이 어쩌다가, 저 사람이 무슨 잘못이 있어서 …’하며 안타까워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때때로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로서, 교회 안팎에서 덕망이 높고,

평소 교회에서는 온갖 궂은 봉사들에 앞장 서고,

기도, 말씀, 헌금, 예배 등의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훌륭한 본보기가 되었던 분들이 큰 불행을 당하면, 우리는 말할 수 없이 큰 충격에 빠집니다.

‘도대체 정의와 사랑의 하나님이 왜 이런 불행을 그 분에게 주셨을까?’

 

오늘 우리가 읽은 <욥기>는 보통 사람들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큰 불행을 당했던 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욥은 한때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자’(욥기 1:3)로 인정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많은 재산과 하인들 그리고 10 명의 자녀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도 자랑스럽게 여기시는 ‘의인’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모든 면에서 완벽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의 삶은 불행의 깊은 낭떠러지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하루 아침에 모든 재산과 하인들, 하다못해 자녀들까지 다 잃었습니다.

그리고 졸지에 길거리에 나앉게 된 욥의 몸에는 잠시도 견딜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피부병도 생겼습니다.

결국 한때 동방에서 가장 위대했던 인물이, 순식간에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불쌍한 거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불행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에게 ‘나가 죽으라!’라고 고함치며 구박하고, 그의 가장 친한 친구들은 그를 ‘천벌 받은 죄인’으로 몰아붙였습니다.

마침내 욥은 재산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잃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욥의 불행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의와 사랑의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이 세상 속에 엄연히 존재하는 ‘불행’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시간 여러분 모두가 이 말씀을 들으며, 이 세상의 불행을 바르게 이해하는 지혜를 얻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1. 죄와 불행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일단 사람들은 불행을 당하면 그 원인을 찾습니다.

‘왜 이런 불행이 우리에게 닥쳤을까?’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에서, 욥도 이렇게 말합니다.

“참으로 나는 전능자에게 말씀하려 하며, 하나님과 변론하려 하노라”(욥기 13:3).

즉 욥도 하나님께 자신이 왜 이런 불행을 겪어야 하는지를 따져 묻고 싶었습니다.

 

성경은 이 세상의 불행이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여 범죄한 결과, 사망을 비롯한 각종 불행과 고통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단 인간 세상에 들어온 각종 불행들은 모든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덮쳤습니다.

즉 불행이 이 세상에 들어온 것은 인간의 범죄 때문이었지만, 불행은 죄와 별개로 활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결과 특정 범죄에 대한 형벌로서 불행을 겪는 사람들도 있지만, 범죄와는 상관도 없는 착한 사람들조차 극심한 불행을 겪게 되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인류 최초의 살인 피해자는 ‘아벨’이라는 의인이었습니다.

결국 아벨은 이 세상에서 최초로 죽음을 맛본 사람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의 주인공인 ‘욥’도 자신의 범죄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모진 불행을 겪어야 했습니다.

야곱의 사랑 받던 아들 요셉은 성적 순결을 지키다가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죄 없는 예수님도 십자가라는 당시 최악의 극형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 분들은 모두 자신의 죄와는 상관 없이 큰 불행을 겪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인들은 성공하여 떵떵거리며 사는데, 오히려 의인들은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결국 우리는, 죄와 불행이 원칙적으로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와 불행을 구별하여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불행 당한 사람들을 근거 없이 비난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불교에서는 원칙적으로 현재의 모든 불행을 전생의 ‘업보(業報)’로 설명합니다.

즉 그 사람이 아득한 과거에 죄를 지었기에, 현재에 그 죄값을 치른다는 뜻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사상은 현재 불행을 당하는 모든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비난하는 셈입니다.

 

또 다른 종교인들은 모든 불행을 악령과 마귀의 소행으로 이해합니다.

예를 들면, 무속신앙에 빠진 사람들은 불행만 생기면, 아니 때로는 불행이 생기기도 전에 악귀를 쫓아내겠다고 굿판을 벌입니다.

 

과거 한때는, 적지 않은 교회들이 일상적인 모든 불행에 ‘마귀’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기도 했습니다.

가난 마귀, 싸움 마귀, 질병 마귀 등등.

이러다 보니, 불행을 당한 사람은 모두 귀신이나 마귀가 들러붙은 사람으로 취급 받게 되었습니다.

특히 질병, 그 중에서도 정신적인 질병을 앓는 사람들은 모두 ‘귀신 들린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십시오.

각종 불행을 당해 안 그래도 슬프고 힘든데, 기껏 교회에 와서 ‘귀신에 짓눌린’ 또는 ‘귀신 들린’ 그래서 ‘영적으로 불결한 사람’으로 낙인 찍힌다면,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그렇게 되면, 교회는 세상의 희망이 아니라 절망의 원인이 되고 맙니다.

 

요즘에도 믿음 있는 사람들은 모든 질병을 물리칠 수 있고, 또한 물리쳐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논리 아래에서는, 질병이 낫지 않으면 믿음이 없거나 하나님께 버림 받은 사람이 됩니다.

적지 않은 사이비 종파들은 같은 이유로 질병을 일으키는 귀신을 내쫓는다며 무고한 사람들을 때려죽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주장하던 사람들도 결국 질병으로 고생하는 경우를 수도 없이 보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순이요 자가당착(自家撞着)이 아닙니까?

질병을 놓고 기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근거 없는 정죄와 판단을 멈추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흑백논리의 함정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적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 즉 권력자, 부자, 유명 인사들은 하나님께 사랑 받는 사람들이고,

이 세상에서 주목 받지 못하는 사람들, 즉 가난하고 병들고 실패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불행을 당한 사람들을 볼 때, ‘저 불쌍한 사람을 어떻게 도와줄까?’를 연구하기보다,

‘저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을까?’를 궁금해 하며 그 죄목을 캐내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자기 멋대로 남의 불행의 이유를 판단하며, 불행을 당한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비난합니다.

그것이 바로 큰 불행을 당해 슬퍼하는 욥에게 욥의 친구들이 한 짓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평생 동안 앞을 보지 못했던 시각 장애인을 만났을 때, 그들은 대뜸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한복음 9:2)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 물음에 대하여 단호하게 대답하셨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요한복음 9:3).

 

여러분, 불행을 당한 사람들을 여러분의 마음대로 정죄하기를 멈추십시오.

그 대신 그들에게 예수님의 위로하는 손과 발이 되어 주십시오.

그들과 함께 울고, 그들과 함께 아파해 주십시오.

이것이 바로 누가복음 10장에 등장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이 불행을 당했을 때에도, 그 죄인을 정죄하고 비난하기보다, 먼저 그들의 상처와 아픔부터 감싸주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불행을 당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죄와 비난이 아니라 위로와 관심입니다.

 

2. 불행은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극복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씀 드리면, 많은 사람들은 더 답답해합니다.

‘죄가 불행의 원인이 아니라면,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힘들게 살아야 합니까?’

 

물론 현재 우리가 당하는 불행들을 설명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현재 지구상에서 발생하는 온갖 기상이변과 환경재앙들은 상당부분 우리 인간들이 초래한 것들입니다.

공장과 가정에서 배출되는 수많은 환경오염 물질은 자연을 훼손하는 단계를 넘어, 자연을 회복불능상태로 만들고 있습니다.

현대과학기술 문명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만큼이나, 인간의 행복과 생존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최근 몇 년간 쏟아져 나온 공상과학 영화들이 경고하듯, 지구의 존립을 위협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현대문명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원자력 발전소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비록 원자력 발전이 현존하는 발전 방식 중에 가장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라고는 하지만,

원자력 발전소를 관리하고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태를 통하여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래서 세계 곳곳에서는 원자력 발전소 건립을 반대하는 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 결과, 현재 54기의 원자력 발전소를 운영하고 있는 일본은 올해 초(2012.1.) 원자력 발전소 운전기간을 40년으로 제한하였고,

2050년경에는 일본이 사실상 무(無)원전 국가가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또한 유럽에서는 독일이 오는 2022년까지, 스위스가 2034년까지 모든 원자로를 폐쇄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런 거대한 규모의 불행들 외에도,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당하는 불행들 역시 상당부분 우리 인간들의 잘못된 습관, 부주의, 실수, 교만, 무지(無知) 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교통사고들입니다.

대다수의 교통사고들은 사람들이 조금만 더 주의했으면 막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수많은 음주사고들 역시 ‘난 술 먹고도 운전을 잘할 수 있다’는 교만만 버렸어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설명한다고 해도, 인간의 불행을 완벽하게 해명할 수는 없습니다.

첫째, 불행을 일으킨 가해자와 피해자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음주운전은 A가 했는데, 그 피해는 B가 봅니다.

결국 피해자 입장에서는 ‘하필 내가 왜 이런 불행을 당해야 하느냐?’고 항변할 수 있습니다.

 

둘째, 말 그대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지는 경우’와 같은 황당한 불행도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누구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고, 원인도 알 수 없는 불행’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누구보다 훌륭한 생활을 했던 분들이 불행을 당해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면,

그 누구도 함부로 불행의 원인을 지목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해명 불가능한 불행을 만난 사람이 바로 욥이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이런 큰 불행을 당할 만큼 죄를 짓지는 않았는데, 왜 이런 불행을 겪어야만 하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제발 대답 좀 해주세요!’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답답하니까, 누가 하나님과 자신의 중간에 서서 중재라도 해주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은 욥에게 불행의 원인을 알려 주셨을까요?

안타깝게도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끝까지 그 이유를 설명해주시지 않고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욥의 시련의 끝날 때쯤에 오히려 거꾸로 질문만 한참 하셨습니다.

그 많은 질문들을 간추리면, ‘너는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줄 아니?’였습니다.

얼핏 보면, 하나님은 욥의 질문에 대답하기는커녕, 동문서답하며 질문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욥기>가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욥뿐만 아니라 우리들에게도 불행의 원인을 속 시원히 말씀해 주시지 않을까요?

뜻밖에도 그 답은 욥의 대답 속에 있었습니다.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기 42:3).

 

그렇습니다. 우리의 이해력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우리의 지적 능력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사실 같은 인간들이라도, 언어가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는 서로 이해하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또한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들끼리라도 대화하다 보면 많은 오해를 하게 됩니다.

특히 시간과 공간 그리고 문화를 초월하여 대화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스마트폰을 약 5천 년 전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과거 조선시대에 미국을 방문했던 수신사들이 엘리베이터를 처음 보았을 때, 그들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조선으로 돌아와 자신들이 본 엘리베이터를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집이 막 하늘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더라.”

하지만 그들의 설명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쯧쯧, 저것들이 오랜 여행을 하다 보니 돌았구나.”

 

이처럼 같은 인간들끼리 대화하기도 쉽지 않은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대화는 어떻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무리 알아듣게 설명해주셔도, 현재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지성인인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은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2011.12.)에서, 예수님의 하늘나라 비유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사람들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하늘나라를 땅에 사는 사람들도 알아듣도록 말해야만 하는 예수님의 입장은 어떠하셨겠습니까? …

비유란 … 아는 것을 가지고 모르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모르는 천상의 것을 언제나 지상의 것으로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비유 역시 우리 인간의 지적 한계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무리 지상의 언어로 하늘나라를 설명해도,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불행의 원인을 묻는 우리에게 침묵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무뚝뚝하시거나, 우리가 겪는 고통에 대하여 무관심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주셔도, 우리가 다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이사야 55:9-10).

 

그렇다면, 우리는 현재의 불행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불행의 원인도 모르면서 불행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불행의 원인’을 묻는 하박국 선지자에게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4).

이 말씀은 불행의 원인을 묻기보다, 일단 하나님을 ‘믿고 따라와 보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이 세상의 불행에 대한 이성적인 답변을 요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우리에게 ‘신뢰의 관계’를 요구하십니다.

왜냐하면 불행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할 ‘불행의 원인’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당장 죽어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당신이 왜 그런 불행을 당했나’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신속하고 정확한 응급처치인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모든 문제를 가장 효과적이고 정확하게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인생길을 가다가 각종 불행을 만났을 때, 온전하게 이해하지도 못할 ‘불행의 원인’을 찾기보다는,

여러분 각 사람을 직접 창조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깨지고 망가진 삶을 온전히 주님의 손에 맡겨 보십시오.

여러분의 생명을 직접 만드신 하나님만큼 여러분의 삶을 잘 아는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창조자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면,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가장 훌륭한 치료자가 되어 주십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출애굽기 15:26).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간절히 찾는 사람들에게 상상도 못할 놀라운 능력을 주십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이사야 40:28-31).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우리가 모든 불행을 극복하고 진정 사는 길입니다.

 

우리 꿈의교회에서 가까운 경기도 부천에는, ‘휠체어 성악가’로 유명한 테너 황영택(44)씨가 살고 있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곧 ‘신의 직장’이라고 불리던 <포항제철>에 입사했지만,

자신의 회사를 세워보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형이 운영하던 건설회사로 직장을 옮겼습니다.

하지만 25살이 되던 해에, 건설현장의 콘크리트 기둥이 무너지며 그를 덮쳤고, 그 결과 그는 하반신 마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그는 결혼을 앞둔 상태였습니다.

즉 곧 결혼을 할 신랑이 만신창이가 된 것입니다.

너무나도 비참한 자신의 삶을 바라보며, 그는 반년 동안 술에 취해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 때 이미 신부는 임신한 상태였고, 마침내 그가 술에 빠져 지내는 동안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하반신 마비 장애인면서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버린 그에게 아들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는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가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냥 교회만 다닌 것이 아니라 교회 중창단 활동을 비롯한 봉사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그에게 꿈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재활운동으로 그때까지 제대로 해본 적도 없는 테니스를 선택하였습니다.

얼마나 열심히 재활운동을 했는지, 테니스를 시작한 지 2년만인 1998년에 그는 휠체어 테니스 국가대표까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방콕 아시안게임> 휠체어 테니스 부문에서 남자단식 동메달을 따고, 2001년에는 대통령표창까지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테니스를 통하여 육체적 재활은 성공했지만, 그의 마음 속은 아직 치유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자신과 같은 장애인들 위해 봉사하고 싶다는 생각에,

35세에 혹독한 수험생활을 시작하여, 2003년 <성결대학교> 성악과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앉아 있는 상태에서 발성을 해야 하는 어려움도 견뎌내며 무사히 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현재 그는 ‘희망나눔콘서트’에 100회 넘게 출연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선물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불행을 놓고 한탄만 하는 사람에게는 불행이 불행을 낳고, 그의 삶은 끝내 의미 없이 비참하게 끝나고 맙니다.

하지만 극심한 불행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불행을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소중한 자산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저는 이 시간 여러분들이 불행을 만나 하염없이 신세타령만 하거나,

‘왜 나만?’이라는 좌절 섞인 의문만 허공에 던지지 말고,

이 시간 여러분들을 위하여 무한한 복과 은혜를 예비하고 계시는 능력의 주님을 바라보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 안에서 인생의 불행이 인생의 다이아몬드로 바뀌는 기적을 체험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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