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English]
설교날자 : 2012-04-15
설교자 : 김학중 목사
본 문 : 하박국 1장 13절
제목 : 이병철, 길을 묻다 시리즈 1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요]

오늘부터 우리는 새로운 말씀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이 말씀 시리즈의 목적은 교회 밖의 분들은 물론이고, 교회 안의 신앙인들의 마음 속에도 존재하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고민과 궁금증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제 경험에 따르면, 신앙생활을 수십 년간 했던 분들조차도 기독교신앙의 기초가 든든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고민거리는 신앙이 없는 분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말씀 시리즈를 교회 안팎의 모든 분들이 던질 수 있는 질문에서 시작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특별히 저는 기독교 신앙이 없었던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일생을 마치기 전에 기독교를 향하여 던졌던 24가지 질문을 선택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질문들 속에 여러분들의 질문도 대다수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로는 이 말씀 시리즈를 통해, 기독교에 대하여 부정적이던 분들은 기독교에 대한 새로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고,
이미 기독교 신앙을 가졌던 분들은 더 확실한 신앙의 기초를 다지게 되기를 원합니다.

저는 오늘 고 이병철 회장이 던졌던 질문들 중에서, 가장 핵심적이면서도 가장 어려운 질문들을 선택하였습니다.
오늘 제가 선택한 질문들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고 이병철 회장의 질문>
Q.1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Q.2 신은 왜 악인을 만들었는가? 예: 히틀러, 스탈린, 흉악범들
Q.3 신앙이 없어도 부귀를 누리고, 악인 중에도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많은데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지금 여러분들이 들은 질문들은 각각 다른 질문들 같지만, 사실상 한 가지 질문입니다.
‘왜 이 세상에는 악이 있는가?’라는 바로 ‘악(惡)의 존재’에 대한 질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악은 단순히 ‘도덕 또는 윤리적으로 나쁜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삶을 고통스럽고 슬프게 만드는 모든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악이라는 말은, 전쟁, 범죄, 재해, 사고, 질병, 고통, 그리고 죽음까지 포함하는 매우 포괄적인 개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 내용도 사실상 고 이병철 회장의 마지막 질문과 같습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거짓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하박국 1:13).
즉 간단히 줄이면, ‘왜 나쁜 사람들이 더 잘 살지요?’하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악의 문제는 기독교인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다른 종교인들뿐만 아니라 무신론자들조차 계속하여 던지는 질문입니다.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지성인들이 이미 수천 년간 이 질문을 가지고 씨름했습니다.
그렇다고 이 질문이 지성인들만의 고민도 아닙니다.
‘왜 이렇게 살기가 힘들지?’라는 푸념 섞인 질문은 우리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하소연입니다.
그만큼 악의 문제는 신앙의 유무, 시간과 공간의 차이와는 상관없는 인간사회의 공통적인 문제이며, 지금까지도 인간사회가 풀지 못하는 가장 큰 난제(難題)입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악이라는 단어는 상당히 폭넓은 뜻을 가진 단어입니다.
따라서 악이라는 큰 개념으로 복잡한 악의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악의 문제를 효율적으로 다루기 위하여, 악을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하였는데,
바로 죄, 불행, 그리고 고통입니다.
물론 이 세 가지 형태는 서로 완전히 구분된 개념들이 아닙니다.
실제 우리 삶에서는, 일반적으로 이 세 가지 형태 중 두 가지 이상이 결합되어 나타납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 세 가지 형태가 모두 한꺼번에 결합되어 발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효율적인 답변을 위하여, 오늘은 죄의 문제에 집중해보겠습니다.
바라기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들이 평소에 고민하던 ‘죄의 존재’라는 문제가 해결되기를 축원합니다.

1. 죄의 책임은 인간에게 있습니다.

저는 요즘 보도되는 흉악범죄 사건들을 들으면 머리끝이 쭈뼛해집니다.
지난 4월1일 발생한, 한 20대 수원 거주 여성에 대한 성폭행 및 토막살인 사건은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길가던 여성을 집안으로 끌고 가 성폭행하고 살인한 것도 모자라, 그 여인을 무려 280 조각으로 토막 낸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의 범인은 더 이상 사람이기를 포기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흉악범죄 사건이 터질 때면, 사람들은 ‘왜 정의의 하나님이 이 세상 죄악을 보고만 계시는가?’하고 따집니다.
하지만 이 질문을 자세히 들어보십시오.
말로는 하나님을 ‘정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지만, 실제 내용상으로는 하나님이 정의롭지 않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자의 눈에는, 하나님께서 온갖 죄가 활개치고 다니도록 내버려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은,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범죄의 주체는 바로 인간이라는 점입니다.
각종 도덕 또는 윤리적 범죄는 인간이 저지르는 것이지, 하나님의 행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본질상 선하고 거룩하여 죄가 없는 분이시기에 죄를 짓지 않으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가 범죄하도록 유혹하거나 조종하는 분도 아닙니다.
결국 죄는 인간이 저질렀는데, 그 책임을 하나님께 묻는 것은 앞뒤가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의 책임이 죄를 범한 사람 자신에게 있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야고보서 1:13-15).

또한 성경을 보면, 사실상 하나님도 우리 인간의 범죄에 대한 피해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만드신 세상을 인간이 온갖 흉악한 범죄로 망가뜨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구약의 사상에 따르면, 인간의 범죄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까지 더럽힙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에는,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소유물에 입힌 손해를 배상하기 위하여 ‘속건제(贖愆祭)’를 드려야 했습니다.

작년(2011)에 한창 인기 있었던 코미디 프로들 중에 ‘적반하장’이라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이 코너에 나오는 주인공들의 특징은 하나같이 뻔뻔스럽다는 것입니다.
잘못은 자신이 해놓고 오히려 상대방에게 큰소리칩니다.
자신의 구두뒷굽에 밟힌 사람에게 ‘왜 거기 있다가 밟히고 그러세요?’하고 따집니다.
자신에게 부딪힌 사람에게 ‘왜 부딪히고 그러세요?’하고 목청을 높입니다.
열 받은 피해자가 따지면 ‘괜찮아요. 제가 괜찮다는데 왜 그러세요?’하고 악을 씁니다.
그래도 피해자가 자꾸 따지면 아예 동물소리를 내며 들을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인간범죄의 피해자인 마당에, 하나님께 인간 범죄의 책임을 묻는 것은 말 그대로 ‘적반하장(賊反荷杖)’입니다.
오히려 우리 인간들은 인간의 모든 범죄에 대하여 연대책임(連帶責任)을 지고, 하나님 앞에 머리 숙여 진실하게 사죄해야 합니다.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인간 범죄의 책임은 인간에게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닙니다.

2. 하나님은 죄인을 위하여 참고 계십니다.

비록 죄의 책임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왜 정의의 하나님이 이 세상 죄악을 보고만 계시는가?’라는 질문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죄악을 허용, 묵인, 또는 방관하시지 않느냐?’고 비난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발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애초에 이 세상에 악을 허용하시지 않았으면 될 것 아닌가?’라는 근본적인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께서 과연 이 세상의 죄악을 ‘허용’하고 계시는 걸까요?

여기서 중요한 말은 바로 ‘허용’입니다.
허용은 ‘허락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에 죄를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죄는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죄인들을 위하여 ‘끈질기게 참고 계십니다.’
우리가 자주 들었던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라는 문구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의 죄의 문제에 대한 본질이 드러납니다.
이 세상에 ‘죄’가 만연한 이유는 바로 인간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처럼 ‘죄로 들끓는 세상’을 지켜보고 계신 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허락하고 계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은 죄인들에 대하여 우리가 감히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의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하고 계실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그토록 참고 계실까요?
하나님은 한 사람의 죄인이라도 영원한 형벌의 길로 떨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신약성경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잃은 양, 잃은 아들’의 비유들처럼, 하나님은 한 명의 죄인이라도 더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어찌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에스겔 18:23)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에스겔 33:11).

그러므로, 죄악으로 넘쳐나는 이 세상을 보며, 우리는 오히려 ‘끈질기게 인내하고 계신’ 하나님께 감사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거룩하고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조차 참기 힘든 ‘죄악으로 들끓는 세상’을 견뎌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노아의 홍수 때처럼 이 세상을 단숨에 청소하셔도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고 구원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로마서 2:4).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베드로후서 3:15).
그러므로 이 세상에 죄악이 존재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반증하는 것입니다.

3. 우리 모두가 죄인입니다.

물론 어떤 분들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참고 계시다’는 말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 죄인들 때문에 착한 사람들이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쁜 사람들만 골라 모조리 없애 버리시면 되잖아요?’
얼핏 보면, 이 질문은 죄의 문제에 대하여 매우 간단하고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쁜 사람들을 제거하는 문제는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처벌기준’, 즉 ‘얼마나 나쁜 사람부터 처벌해야 하는가?’를 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작년(2011) 6월 8일, 당시 96세의 ‘바이저’라는 할머니가 65년 전에 자신이 저지른 살인 범행을 털어놓았습니다.
젊은 시절 그녀는 독일의 ‘나치’정권에 대항하여 싸우던 <네덜란드>의 ‘레지스탕스’였습니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레지스탕스는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입니다.
한창 레지스탕스로 활약하던 어느 날, 그녀는 ‘굴리’라는 사업가가 나치정권과 손잡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1945년 독일 나치가 세계대전에서 패망하자, 굴리 씨도 체포되었습니다.
하지만 굴리 씨는 체포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곧 풀려났습니다.
그러자 매국노 굴리가 제대로 처벌 받지 않은 것에 분개한 그녀는,
1946년 3월 1일, 굴리 씨를 ‘정의의 이름’으로 직접 암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암살사건은 작년까지 영구미제 사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굴리 씨가 사망한 후, 그의 진짜 모습이 밝혀지기 시작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는 나치 정권 하에서 유대인들을 보호해주고, 그들에게 생활비도 보태주었습니다.
금지된 카톨릭 종교 모임도 그의 집안에서 열렸습니다.
굴리 씨는 숨겨져 있었던 진정한 애국자였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바이저’ 할머니는 65년 만에 자신의 살인범죄를 고백하였고, 굴리 씨의 손자들에게도 뒤늦게 사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네덜란드>의 현행법으로는 처벌할 방법이 없습니다.
<네덜란드>는 얼마 전(2006) 중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없애버렸지만, 65년 전의 살인사건에 대하여는 소급적용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살인사건이더라도 너무 오래된 사건이어서 처벌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과연 무엇이 정의일까요?
독립운동가인 동시에 살인자인 이 할머니를 처형하는 것이 정의일까요?
합법적인 방법으로는 처형할 수 없으니, 누군가가 암살해야 하겠지요?
그렇다면 그 암살은 정당한 걸까요?
만일 이 할머니를 그대로 살려둔다면, 굴리 씨의 억울한 죽음은 누가, 무엇으로 보상할까요?
여기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누는 것, 무엇이 정의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분은 ‘이 예가 너무 극단적이지 않느냐?’고 따질 것입니다.
하지만 수많은 역사적인 사건들에서도,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를 단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 이병철 회장이 악인으로 지목했던 독일 나치정권의 히틀러의 손에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희생되었습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큰 피해자들 중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팔레스타인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현재 팔레스타인 원주민들을 가혹하게 압제하고 있는 가해자들입니다.

지난 2001년, 미국에서 9.11 사태가 벌어져 약 1만 명이 죽거나 부상하였습니다.
미국은 그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곳에서 수십만 명의 민간인들이 생명을 잃었습니다.
미국은 과연 피해자입니까, 가해자입니까?

역사적인 인물들도 판단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나라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고 이승만 전 대통령이 좋은 분입니까, 나쁜 분입니까?
결국 모든 것이 드러난 역사적 사건들이나 인물들에 대해서도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을 내리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또한 실제 우리의 삶에서도 ‘의인과 죄인’을 분명히 나누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현대 드라마에 등장하는 ‘출생의 비밀’이나 ‘과거의 진실’만큼, 실제 우리 인간의 삶은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 많은 경우, 우리 모두가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입니다.
따라서 ‘죄인’의 기준을 어디에 세우든, 항상 억울하다는 항변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옛 속담에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여러분을 히틀러, 스탈린, 하다 못해 수원 여성 살인범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겠지요?
하지만, 완전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기준에서 볼 때에는 약간의 정도 차이가 있을 뿐,
히틀러이든, 흉악범이든, 여러분이든, 죄인인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데이비드 그레고리’가 지은 소설 형식의 기독교 변증서인 <예수와 함께 한 저녁식사>(2005)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인도의 수많은 빈민과 병자들을 위하여 헌신한 마더 테레사와 수백만 명을 학살한 독일 나치 정권의 히틀러, 이 두 사람을 비교할 수 있을까요?
물론 우리 기준에서 생각할 때에는 이 두 사람의 삶은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하지만 완전하신 하나님과 비교하면 어떻게 될까요?
마더 테레사와 히틀러가 명함 한 장 높이의 차이라면, 이들과 하나님의 차이는 100층 빌딩의 바닥과 꼭대기의 차이입니다.
100층 빌딩 꼭대기에서 길바닥에 세워 놓은 명함을 바라보면, 그 명함의 높이가 느껴질까요?

그래서 그 책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히틀러는 지극히 악랄했고, 마더 테레사는 커다란 자비를 베풀었으니 같지 않죠.
그렇지만 마더 테레서가 행한 나름의 덕행 역시 하나님과의 격차를 메우기엔 히틀러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죄인이고, 각자 나름의 공과에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처럼 완벽하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우리 모두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죄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로마서 3:10).

결국 나쁜 사람들을 모두 없애 버리는 것은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입니다.
복잡하게 얽힌 인간들 사이에 공정하고 분명한 처벌기준을 세우는 것도 쉽지 않거니와,
완벽하신 하나님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살아남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즉 그 ‘없애버려야 할 나쁜 사람들’ 속에 여러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도 하나님께서 회개하기까지 참고 기다리시는 죄인들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끈질긴 참으심의 은혜는 흉악범들뿐만 아니라 여러분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넘쳐나는 죄악을 보며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회개하기까지 ‘끈질기게 참고 계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4. 우리는 서로 용서하고 관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위하여 끈질기게 참고 계시다’는 사실은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를 입고 있는 우리 모두는 서로에 대하여 용서하고 관용해야 합니다.
모두가 죄인인 마당에, 누가 누구를 정죄하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분법적인 사고’ 또는 ‘흑백논리’를 가장 경계해야 합니다.
‘나는 무조건 옳고, 남은 무조건 그르다’는 독선은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식의 위선만 만들어 냅니다.
이 세상에는 완전히 악한 사람도 완전히 선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가 착하기도 하지만 악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서로의 허물과 죄악에 대하여 용서하고 관용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용서 받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7: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그리고 이렇게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누가복음 11:4).

며칠 전(4.11.) 총선이 있었습니다.
제가 선거 때마다 보는 안타까운 점은, 우리 국민들이 극단적인 이분법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정당이든 사람이든, 이 세상에는 절대 선도 절대 악도 없습니다.
이 정당, 이 사람을 뽑으면 정의롭고, 반대편을 찍으면 모두 불의하고 나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합니다.
그런 편가르기는 우리나라의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서로 용서하고 포용해야 합니다.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들과 악의 문제, 그 중에서도 죄악의 문제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 들끓는 불의와 흉악범죄들을 보며 하나님을 원망하지만,
사실 책임을 져야 할 주체는 바로 우리 인간들이며,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인내의 은혜’에 대하여 감사하고,
서로에 대하여 용서와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 귀한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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