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지금 ‘현상 유지’ 상태로 생기 없이 발걸음을 떼는 교회에 만족하고 있다. 나는 교회가 그런 식으로 되어가는 게 못마땅하다. 나는 그 이상을 원한다.”

 

“현대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라는 최고 우선순위를 상실하고 말았다. 우리는 빵 없는 빵집 신세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우리는 빵을 파는 것에 관심조차 없다.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단순하다. 교회에 빵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에 하나님의 임재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당신을 초월한 어떤 것, 오늘날 교회에서 들을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소식을 듣기 갈망한다면 당신은 ‘하나님께 굶주린 예배자’이다.”

 

토미 테니의 ‘하나님께 굶주린 예배자’(규장)에 있는 내용이다. 구구절절 오늘의 교회 현실을 돌아보게 한다. 이런 말도 있다. “오늘날 교회를 떠나거나 기피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빵을 얻기 위해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다는 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빵’으로 이 땅에 오셨다. 고난 주간. ‘빵 집’인 베들레헴에 생명의 빵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한다. 그리고 골고다 십자가에 달린 청년 예수를 떠올린다. 생명의 빵으로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예수에 환호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절망, 그 자체였으리라. 그러나 그것으로 끝났는가? 아니다.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뭔가 더 있었다!

 

빈 무덤이 있었다. 다시 오신 예수님이 계셨다. 부활과 승천도 있었다. 십자가에서 낙망한 제자들이 다시 오신 예수님을 만난 뒤 분연히 일어나 열방을 향한 위대한 사역을 펼치는 이야기도 있었다. 세대에서 세대를 이어 ‘생명의 빵’으로 인한 기적들이 전 세계에서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2000년 전의 그 사건을 실체로 믿고 있다. 골고다 십자가의 장면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더 있다!

 

토미 테니의 격정적인 말과 골고다 십자가를 연관 시켜 본다. ‘생명의 빵’과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은 그 당시 살던 모든 사람들의 사고를 초월한 어떤 것이었다. 당시 유대주의 사회에서는 들을 수 없던 어떤 것이었다. 그것이 상징하는 사실은 이 세상에는 우리 사고를 뛰어넘는 어떤 것이 ‘더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교회에서 맛 볼 수 있는, 교회를 통해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어떤 것이 더 있다. 그래서 우린 ‘현상 유지’ 상태로 생기 없이 발걸음을 떼는 교회에 만족할 수 없다. 소위 복음주의와 은사주의, 자유주의자 모두가 ‘더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인정해야 한다. 상대가 지닌 그 ‘어떤 것’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다. 우리에겐 ‘오늘날 교회에서 들을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소식’이 필요하다.

 

고난주간이 지나고 있다. 고난주간으로 끝이 아니다. 더 있다! 부활의 그 날이. 고난주간에 한국 교회의 위대한 부활을 기대해 본다.

 

종교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