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聖地)를 말하지만 정말 문자 그대로 ‘거룩한 땅’은 어디일까? 예루살렘일까? 시내산일까? 로마일까? 성경은 “네가 서있는 그 곳이 거룩한 땅”(출 3:5)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는 모든 곳이 그의 나라이고, 거룩한 땅일진대 내가 발딛는 곳 어디나 성지가 아닐까? 그러나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난 실제 장소들이 갖는 영적 의미와 가치가 클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특별히 성지라고 구별하여 부르는 것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신구약 성경상의 주요무대였던 터키

기독교의 성지로 불리는 곳들이 가장 많은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 한복판에 자리한 이슬람 사원의 금빛 찬란한 돔만큼이나 곤혹스러운 것이 신구약에 등장하는 수많은 지명들이 실재하는 회교국가 터키의 존재가 아닐까 싶다. 노아의 방주가 걸렸을 것이라 믿어지는 아라랏 산부터 아브라함의 고향 갈대아 우르까지. 특히 사도 바울의 고향 다소(다마스커스)와 최초의 선교공동체가 설립되었던 안디옥, 계시록에 등장하는 소아시아의 7대 교회까지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들이 이 회교국가의 수중에 들어가있다는 사실…

회심한 사도 바울이 선교여행을 다니며 남긴 수많은 발자국이 지금도 터키 전역에 남아있는데, 소아시아를 넘어 로마와 서바나(스페인)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한 그가 남긴 생생한 서신들이야말로 어쩌면 원조 ‘유럽선교통신’이었는지도 모른다. 예루살렘을 출발한 복음의 역사가 아시아에 머무르지 않고 에게해를 건너 유럽땅으로 뻗어나가도록 ‘와서 도우라!’는 마케도니아의 환상을 본 것도 바로 이 터키 땅이었고 그 길목에 비시디아, 밤빌리아, 버가, 앗달리아 등의 현존하는 터키 지명들이 등장한다.

이중에서도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돌에 맞아 죽을 위기를 겪으면서도 목숨을 건 선교여행을 계속하다가 출항하기 위해 들렀던 앗달리아(행 14:19∼28)엔 지금도 그 선교의 영성이 충만하게 살아있음을 발견한다. 오늘날 안탈리아(Antalya)라고 불리는 이 고색창연한 지중해의 항구도시에 세워진 사도바울 연합교회(St Paul Union Church)는 2000년의 세월을 넘나드는 생생한 선교의 영성을 느끼게 해준다. 아무리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는 세속적 이슬람 국가라고 하지만 지금도 선교사들이 참수를 당하는 끔찍한 사건들이 벌어지기도 하는 터키에서 초대교회의 모습 그대로 뜨겁게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가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유럽인들이 유럽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길 불편해하는 나라 터키는 그 엄청난 영토의 크기와 인구수 ,그리고 성장 가능성으로 인해 무시할 수 없는 유럽의 교역상대국임에도 불구하고 늘 유럽으로부터 홀대를 받아왔다. 아무래도 기독교 문명권인 유럽으로서는 순도 99%에 가까운 회교국인 터키가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을 것이고, 지리학자들 뿐만 아니라 유럽인들이 유럽의 심리적인 경계선으로 삼고있는 보스포러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전국토의 97%가 아시아에 있는 것으로 분류되고, 단지 3%만이 유럽땅에 걸쳐있어 ‘애정남’조차도 확실하게 정해주기 힘들기 때문이리라.

유럽이기를 원하지만 아시아로 취급

오스만 터키제국의 수중에 들어간 이후 지난 500년간 기독교 문명의 보고에서 이질적인 유럽의 변방으로 위상이 바뀌어버린 터키가 달라지고 있다. 퇴락한 돌무더기만 남아있는 소아시아의 일곱교회터를 밟는 성지순례지가 아닌 생생한 신앙고백과 찬양이 올려지는 예배의 회복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터키를 중동선교의 전초기지로 보는 사람들은 이러한 변화가 비록 작은 불씨일지라도 큰 불길로 치솟아오를 날을 기대하며 기도하고 있다. 수천년간 동서양 문명의 교차로이자 실크로드의 중심에 있던 터키가 21세기에 영적 회복과 함께 생명의 복음이 흐르는 채널로 다시 쓰임받게 되길 기도할 때가 아닐까 싶다.

서태원 유로코트레이드앤트래블 대표·유럽 한인 CBMC 총연합회 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