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 : 김학중 목사

본 문 : 사도행전 4장 12절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를 향하여 이런 질문들을 합니다.

‘어떻게 자신들의 교리만이 진리라고 말하는가?’

‘왜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받는다고 하는가?’

‘왜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보다 우월한가?’ 등 구체적인 질문들은 다르지만,

이 모든 질문들이 결국 의미하는 것은 기독교의 태도가 너무 배타적이고 독선적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독교는 어느새 다른 종교를 무시하는 안하무인(眼下無人)의 교만한 종교로 낙인 찍히고 말았습니다.

 

현대문명을 이끄는 사상적 기초는 ‘포스트모더니즘’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적인 주장 중에 하나는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입니다.

시간, 공간, 문화를 넘어서서 모든 사람들에게 예외 없이 적용되는 ‘변하지 않는 진리’는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세상의 모든 진리는 상대적인 진리, 즉 어떤 사람에게는 참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거짓이거나,

부분적인 진리, 즉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지만, 완전히 맞는 것도 아닌, 참과 거짓이 적당히 섞인 진리입니다.

결국 모든 진리가 참인 동시에 거짓인 셈입니다.

 

이런 사상적 기초 아래, 현대인들은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의 사상과 주장을 최대한 수용해야 합니다.

함부로 다른 사람의 입장이 틀렸다고 비난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의 삶에 끼여들 수도 없습니다.

최근 미국의 대중가수 ‘레이디 가가’의 내한공연으로 촉발된 동성애 논란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에서는 논란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어떤 성적 취향을 가졌든 우리가 문제 삼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주변 상황이 이렇다 보니, 기독교인들 중에도 기독교의 교리가 독선적이거나 배타적이라고 비난하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등장한 대안이 ‘종교 다원주의’입니다.

종교 다원주의를 아주 간단하게 표현하면, ‘모든 종교에 구원의 길이 있다’ 또는 ‘모든 종교는 하나의 진리로 통한다’는 주장입니다.

인간은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유교, 또는 하다못해 무속종교를 통해서도 구원받을 수 있으며, 모든 종교가 결국은 하나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현대 기독교인들 중에는 종교화합을 넘어서서 ‘종교일치’까지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과연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독선과 아집 속에 스스로 갇혀 있는, 앞뒤가 꽉 막힌 ‘불통(不通)의 대명사’들일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 여러분 모두가 기독교에 대한 오해를 풀고, 기독교가 정말 전하고자 하는 진리를 바로 이해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예수님은 가장 포용적인 구원의 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사도행전 4:12).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부활승천 하신 후에 처음으로 세워진 교회를 변호하기 위하여, 사도 베드로가 수많은 대중들 앞에서 외친 연설의 일부입니다.

 

물론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원래 말씀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옮긴 것뿐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요한복음 10:7-9).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

이처럼 예수님도, 그리고 그 말씀을 전하는 베드로도 예수님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다고 분명하게 단언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구절들의 메시지가 이처럼 너무 강하고 분명하다 보니, ‘포스트모더니즘’이나 ‘종교 다원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들을 싫어합니다.

그들은 기독교의 구원론이 너무 편협하다고 비난하면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예수님을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니, 구원의 조건이 너무 까다롭고 일방적이지 않는가?’

‘예수님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은 너무 독단적이고 배타적이지 않는가?’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배타적이고 유일한 구원의 길로 만드신 깊은 뜻을 헤아려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특권에는 ‘특별한 자격제한’이 있습니다.

특권은 말 그대로 아무나 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류대학에 들어가려면 뛰어난 고교성적이 있어야 합니다.

미인대회에 뽑히려면 뛰어난 미모가 있어야 합니다.

유명 연예인이 되려면 남다른 끼와 재능이 있어야 합니다.

하다못해 초등학생들의 생일잔치에 가려고 해도 초청받지 않으면 갈 수가 없습니다.

혹시 가더라도 불청객이 되어 매우 어색한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영국 황실의 차’라는 별명이 붙은 ‘롤스로이스’의 경우,

과거에는 고객이 아무리 많은 돈을 제시해도 자신들이 생각하는 명예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판매를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최근 기업들이 가장 크게 관심을 기울이는 시장이 바로 VVIP시장입니다.

VVIP는 일반적인 상류층을 뜻하는 VIP 앞에 ‘매우’를 뜻하는 베리(very)를 하나 더 붙여, ‘상류층 중의 상류층’, 즉 최상류층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 VVIP의 숫자는 전체 사회의 1%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구매력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업들은 경기가 불황일수록 ‘VVIP 마케팅’에 열을 올립니다.

 

최근 신용카드사들은 VVIP들에게만 제공하는 ‘VVIP 카드’를 만들었는데,

어떤 카드회사는 얼마나 그 기준이 엄격한지 국내 20위권 재벌가의 식구도 거절한 적이 있습니다.

 

최근(5.13.) 미국 보잉사는 VVIP를 위한 전용기 ‘BBJ’를 공개하였습니다.

이 비행기의 내부를 들여다 보면, 기존 여객기의 ‘비즈니스 클래스’나 ‘일등석’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BBJ의 내부는 마치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이 VVIP라는 최고급 고객의 자격을 갖추어야 누릴 수 있는 특권들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이라는 특권은 어떨까요?

이 세상의 모든 슬픔과 고통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면서,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

이 구원의 특권과 비교할 수 있는 특권이 과연 이 세상에 있을까요?

당연히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돈을 주어도 얻을 수 없는 특권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특권에는 어떤 자격제한을 두면 좋을까요?

최소한 VVIP보다는 훨씬 더 높은 자격제한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전세계에서 0.0001% 정도되는 사람들에게나 이 구원의 특권을 제공하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하나님은 이 엄청난 특권의 자격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로 제한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자의 자격조건은 돈 많은 재벌이 아닙니다.

최정상의 권력이나 명예를 차지한 사람도 아닙니다.

용모가 뛰어난 미남미녀도 아닙니다.

영리하고 똑똑한 사람이나 박식한 사람도 아닙니다.

인종, 민족, 국가, 출신배경도 구원의 조건에 들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자격조건을 다 물리치셨습니다.

그리고 구원의 문에 예수님이라는 단 한 가지 조건만 세우셨습니다.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구원의 문을 모든 인류에게 여신 것입니다.

구원의 특권 또는 혜택을 생각할 때,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라는 자격조건이 과연 그토록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것일까요?

오히려 우리가 인종, 지역, 문화, 계층, 이념 등을 구분하면서 서로를 차별하는 감정의 장벽들이 더 독선적이고 배타적이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종교들의 구원은 어떨까요?

다른 모든 종교들도 ‘이 세상의 슬픔과 고통에서 풀려나 영원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는 구원’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습니다.

하지만 다른 종교들은 그 구원을 얻기 위한 특별한 조건들을 제시합니다.

특별한 고행, 수행, 또는 도를 닦는 일을 해야 하거나,

대단한 선행을 해야 하거나,

엄청난 기부를 해야 하거나,

특별한 지식이나 체험을 해야 하는 등의 조건들이 따라 붙습니다.

 

오히려 이런 구원의 조건들이 훨씬 더 편협하지 않습니까?

까다로운 조건들 때문에 소수의 사람들만이 얻을 수 있는 구원에 대해서는 왜 반대의 목소리를 높이지 않을까요?

힘들고 어려운 조건을 내건,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구원을 허락하는 다른 종교들에 대하여 사람들이 비난하는 것을 보셨나요?

그런데 오히려 가장 쉽고 포용적인 구원의 조건인 ‘예수님을 믿는 것’에 대하여 배타적이고 독단적이라며 비난하는 것은 모순이 아닐까요?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이 세상 최고의 특권을 모든 인류에게 개방하신 분입니다.

이 세상에 ‘예수님’이라는 조건만큼 쉽고 포용적인 구원의 조건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유일한 구원의 길로 만드신 것은,

구원받는 사람들을 제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인류를 포용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2. 구원의 은혜는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장 포용적인 구원의 조건이라고 설명하면, 어떤 분은 역으로 이렇게 비판할 것입니다.

‘그렇게 기독교가 구원을 남발하니까, 아무나 교인이 되는 것 아닙니까?

저 따위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게 말이 됩니까?

하나님의 구원이 그렇게 싸구려입니까?’

 

물론 이 비판은 매우 일리 있는 비판입니다.

사실 신학자들조차 기독교가 너무 ‘값싼 은혜’를 남발한다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사실상 거저 받았다고, 하나님의 구원이 흔해 빠진 싸구려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 과정에서 상상도 못할 엄청난 대가가 치러졌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희생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시리즈 첫 시간에 말씀 드린 것처럼, 하나님 앞에 구원의 자격이 있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재산을 모은들, 아무리 큰 업적을 쌓은들, 하나님의 구원을 획득할 자격도 능력도 없습니다.

 

결국 구원이 절실히 필요한 인간과 구원을 베푸실 하나님 사이에 중재자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이 직접 구원의 대가를 치르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공의를 스스로 의지하사”(이사야 59:16).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류에게 구원의 선물을 주시기 위하여 자신의 친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기꺼이 내놓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

 

즉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거저 받은 것은, 하나님의 구원이 쉽거나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엄청난 특권을 얻을 능력도, 자격도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인간들에게 아무런 구원의 희망이 없기에 예수님께서 직접 중재자로 나선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경제학의 기본 원리가 작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제학의 기본 원리가 무엇입니까?

바로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아닙니까?

공급이 많아지면, 즉 해당 상품이 흔해지면, 그 가치는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엄청난 특권을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하자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시시하게 생각하는 부작용이 발생했습니다.

 

몇 년 전(2009), 세계적인 패스트푸드 체인점 ‘맥도널드’의 한국지부가 재미있는 광고를 방영하였습니다.

똑 같은 맥도널드 커피를 두 컵에 부은 뒤, 한쪽에는 2천원, 한쪽에는 4천원의 가격표를 달았습니다.

그리고 참가자들에게 두 커피의 맛을 비교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참가자들은 한결같이 4천원의 가격표가 붙은 커피가 ‘커피 향이 더 깊다, 향이 더 진하다, 더 부드럽고 향이 더 오래간다’면서 칭찬하였습니다.

하지만 실험을 마친 후, 두 커피가 사실 똑 같은 맥도널드 커피였다고 말하자 실험참가자들은 매우 겸연쩍어 했습니다.

동일한 품질의 상품이어도, 값을 내리면 왠지 싸구려로 보이고, 비싼 값을 받으면 왠지 더 좋아 보이는 인간의 착각을 보여주는 광고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명품에 몰리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구원을 쉽게 얻었다’는 생각이 들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VVIP 특권과도 비교할 수 없는 ‘구원의 특권’을 거저 받고서도 자신들이 얼마나 큰 은혜를 얻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가볍게 여기고, 끊임없이 세상의 잘못된 죄악을 벗삼아 살아갑니다.

구원의 은혜를 받기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이 전혀 구분되지 않습니다.

 

결국 이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의 구원 자체가 아니라, 구원의 본질적인 가치를 잊어버리는 인간의 잘못된 습성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구원의 가치를 회복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앞서 말씀 드린 경제학의 원리에 따라 ‘하나님의 구원’의 가치를 유지하려면, 구원의 조건을 극도로 까다롭게 해서 극소수의 사람들만 구원 받게 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구원의 가치를 유지시킬 경우, 또 다른 부작용이 생깁니다.

첫째,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푸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반대가 됩니다.

둘째, 구원 받은 사람들은 대단한 착각과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마치 자신들이 구원의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 또는 마땅히 누릴 권리가 있어서 구원받은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을 은혜로 이해하기보다 자신이 마땅히 받을 ‘보수’라고 생각하게 되고,

감사가 넘쳐나기보다 오히려 불평과 불만이 생깁니다.

 

기업마다 노사간 연봉협상을 해야 하는 시기가 오면, 파업과 시위가 줄을 잇습니다.

그런데 연봉협상 과정에서 재미 있는 현상이 생깁니다.

다른 직종들보다 훨씬 더 많은 연봉을 받는, 소위 ‘귀족노조’들까지 시위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2005년에 벌어진 모 항공사 기장들의 파업이었습니다.

억대 연봉을 받는 항공사 기장들이 근무조건이 열악하다며 파업을 강행하고 말았습니다.

일반 국민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파업 당사자들은 당당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자신들이 받아야 할 ‘정당한 대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서도, 우리 인간들이 조금이라도 공헌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이런 식의 황당한 불평이 터져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의 봉사와 헌신도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결과가 아니라, 자신이 넓은 마음으로 아량을 베풀고, 선심 쓰는 행위로 착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 드린 대로, ‘하나님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일 뿐, 우리가 내세울 자랑거리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앞에 자신의 공로를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감히 감당치 못할 구원의 큰 은혜를 거저 얻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구속의 십자가 앞에 모든 인간은 철저히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갈라디아서 6:14).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복음이 하나님의 구원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잘못된 습성이 그 가치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자세가 변하지 않는 한, 구원의 은혜를 왜곡하는 우리의 잘못된 습성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가치가 떨어지는 책임은, 그 은혜를 거저 주시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인간들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치르신 대가를 기억하며 우리는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3. 구원은 사랑, 온유, 인내함으로 전합니다.

 

비록 제가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를 겸손하게 만든다고 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가 ‘근거 없는 우월의식’을 가졌다고 비난합니다.

‘자기들은 구원받아서 천국 간다고 하고, 우리는 지옥 간다고 하는 것 자체가 교만 아닙니까?’

‘자기들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우리는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비판 역시 전혀 근거 없는 비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실제 ‘나는 하나님의 자녀, 너희들은 마귀의 자식’이라는 태도로 전도하는 분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 지하철역 같은 곳에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피켓을 들고 복음을 전하던 분들 중에도 이런 태도를 가진 분들이 간혹 있었습니다.

 

몇 년 전(2010) 길바닥에 앉아 불경을 읽는 승려의 머리에 안수하는 전도자의 사진이 인터넷을 달군 적이 있었습니다.

같은 해, 서울의 <봉은사>에서 기도하며 ‘땅밟기’를 하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전파를 타기도 하였습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의 공격적인 전도방식이 무례하다며 비난하였습니다.

 

과연 이것이 타당하고 적절한 전도방식이냐에 대해서는 기독교 내에서도 뜨거운 논란거리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외치는 사람들의 기본 태도라고 하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행위들이 정말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보여주지 못하고,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종교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서로 상대방의 종교를 물리적인 힘으로 짓누르려고 하기에 생겨난 비극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마음의 태도는 ‘공격적인 정벌’이 아니라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기독교의 교세를 확장하거나 교인수를 늘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의 영혼을 사랑하기에 복음을 전합니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님의 구원을 통해 참생명과 참기쁨을 얻게 하기 위하여 복음을 전합니다.

좌절과 고통 가운데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참능력과 참소망을 전하기 위하여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랑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고린도전서 13:5).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는 사람은 사랑하기에 무례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입장을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외치지 않습니다.

 

또한 성경은 다른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파하는 사람은 온유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베드로전서 3:15).

따라서 온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불필요하게 격동(激動)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감정을 가라앉히고 화평한 분위기를 만들어냅니다.

 

작년 11월, 서울 금천구에서 60대 목사님 한 분이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범인은 40대의 정신지체 2급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범행원인은 어처구니없게도 이 장애인의 어머니의 전도였습니다.

범인은 교회에 나가기 싫었지만 어머니가 교회에 나가야 한다고 강요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흉기를 미리 준비해 예배가 끝난 후 범행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얻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사랑과 열심은 충분했던 반면, 온유함은 부족했기에 생긴 참극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구원’은 끝까지 우리를 참으시는 하나님의 인내의 결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는 우리도 ‘인내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내의 사람은 어떤 사람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인내의 사람은 ‘희망이 없다고 버려진 사람’일수록 오히려 더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진실한 기독교인들 중에는 다른 사람들이 포기한 사람들을 찾아 섬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태복음 9:13)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심정을, 우리는 헤아려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랑과 온유와 인내로 구원의 복음을 전한다면, 기독교를 향한 오해 섞인 비판은 한층 가라앉게 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여러분 모두를 품기 위한 하나님의 깊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체험한 사람은 겸손해집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사랑과 온유와 인내를 통해 전해져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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