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English]
설교날자 : 2012-05-13
설교자 : 김학중 목사
본 문 : 요한복음 8장 32절
오늘은 여러분들과 함께 매우 민감한 문제를 생각해보겠습니다.
바로 현대과학과 기독교 신앙의 관계 문제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현대 과학문명을 즐기고 살지만, 그 과학문명과 기독교 신앙의 관계에 대하여 평소에는 깊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 ‘이것이 신앙적으로 옳은 일인가?’를 고민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까?
또는 최첨단 로봇을 이용한 수술을 앞둔 환자가 ‘이것은 내 신앙적 양심에 위배된다’며 수술을 거부하는 경우를 보셨습니까?
물론 이런 일들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결코 흔한 일은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과학과 기독교 신앙이 공존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현대과학이 주장하는 이론들을 자세히 살피기 시작하면, 현대과학과 기독교 신앙이 과연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찰스 다윈이 1859년에 발표한 진화론입니다.
전통적인 진화론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미생물로부터 진화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 역시 진화의 산물이며, 인간과 가장 비슷한 생명체인 유인원과 인간은 그 조상이 같습니다.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할 당시의 많은 사람들, 특히 기독교인들은 이 새로운 학설에 대하여 격렬하게 항의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씀하며, 인간 역시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생명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원숭이가 인류의 조상’이라는 주장은 당시 사람들, 특히 백인들의 강한 자존심을 건드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신앙과 감정의 문제가 겹치면서 다윈의 진화론은 기독교로부터 정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과연 ‘진화의 산물인가, 창조의 결과인가’에 대한 논란은 150여 년이 지난 현재에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논란은 한층 더 뜨거워졌습니다.
왜냐하면 현대 진화론은 단순히 생물학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학, 심리학, 법학, 문학, 종교, 예술, 여성 등 인간 활동의 전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윈의 진화론은 이제 현대 과학문명의 철학 및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는 논리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기독교계를 당황스럽게 만든 것은 진화론의 세력확장이 아니었습니다.
진화론이 아무리 그 세력을 확장한들 교회가 무시하면 될 것 아닙니까?
그리고 신실한 기독교 과학자들이 모여 만든 ‘창조과학회’가 지금까지 발표한 내용만으로도 얼마든지 전통적인 진화론을 논박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의 교회가 당황하는 이유는 기독교 내에서도 진화론자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진화론과 기독교 신앙이 결코 양립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예측과는 달리,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면서도 진화론에 앞장 서는 과학자들이 최근 부각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최재천 박사입니다.
그는 서울대학교, 미 펜실베이니아대학교, 그리고 미 하버드대학교를 거친 대표적인 진화론자이면서도, 성실하게 교회에 출석하는 분이기도 합니다.

또한 찰스 다윈 출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2009년에는, 천주교 ‘교황청’이 다윈의 진화론을 수용했고,
영국 ‘성공회’도 진화론에 대하여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 내에서도 최근의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여 창조론과 진화론을 결합한 ‘지적설계론’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진화론과 기독교의 역사적인 관계에 대한 설명을 들으니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현대 과학과 기독교 신앙의 관계가 결코 단순하지 않지요?
어느 한 쪽이 상대편을 무시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고, 그렇다고 양쪽을 똑같이 취급할 수도 없는 문제입니다.

과연 기독교 신앙은 현대 과학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이 질문은 단순히 한가한 철학자들의 질문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과학자들과 관련 산업종사자들의 입장에서는 늘 고민해야 하는 문제이며,
학생들의 입장에서도 학교와 교회에서 이중생활을 하게 만드는 문제입니다.
그 결과, 현재 적지 않은 과학자들과 학생들이 심각한 신앙적인 갈등을 겪고 있습니다.

과연 기독교 신앙과 현대 과학의 관계는 어느 한 쪽을 포기해야 하는 문제일까요?
이 둘이 서로 상생(相生)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1. 과학과 기독교 신앙은 같은 곳에서 다른 것을 찾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한복음 8:32)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거짓에서 벗어나 참된 것을 찾으면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과학과 기독교 신앙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진리’입니다.
양쪽 모두 무엇이 ‘참’인지를 알고 싶어 합니다.
따라서, 과학과 기독교 신앙 모두가 ‘진리’를 찾는다면, 양쪽 모두 자유를 누리고, ‘진리’에 대하여 서로 일치된 주장을 해야 하는데,
앞서 설명한 것처럼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둘 중의 하나가 옳고, 하나는 그르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둘 중의 하나는 ‘진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고 이병철 회장도 ‘진화와 창조, 둘 중에 어떤 것이 진리인가?’라는 취지의 질문을 하였습니다.
결국 이 과학과 신앙의 문제는 ‘과학과 신앙의 주장 중 어느 쪽이 진리인가요?’라는 질문과 이어집니다.

이왕 진화론 이야기가 나왔으니, 진화론을 주제로 이 문제를 풀어보겠습니다.

우선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인류의 시작은 창세기 1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太初), 즉 ‘까마득한 과거’에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창조가 시작된 후 제6일이 되던 날,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남녀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세기 1:27).
창세기 2장에서는 여기에 추가적인 설명이 더 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세기 2:7).

여러분이 이 설명을 들을 때,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던 모습이 분명하게 그려지십니까?
하지만 사실 이 표현들은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애매하기 그지 없는 설명입니다.

첫째, 여기 6일이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24시간을 기준으로 한 6일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시간의 단위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태양의 빛과 지구의 자전현상 때문에 ‘하루’라는 시간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창세기의 기록대로라면, 태양은 창조주간의 4일째가 되어서야 만들어졌습니다.
게다가 지구가 처음부터 이런 속도로 돌았는지도 의문입니다.
따라서 태초의 일주일이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7일인지, 아니면 7천 년인지, 7만 년인지, 7억 년인지 알 방법이 없습니다.

둘째, 아무런 형체가 없는 영이신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 흙을 재료로 인간을 만든다는 표현 역시 이해하기 힘든 표현입니다.
제가 지난 주에 ‘영’에는 ‘바람’이나 ‘호흡’이라는 뜻도 포함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제가 여러분을 ‘바람처럼 생겼다’고 말한다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흙으로 바람 모양을 만들어 보라’고 말하면, 여러분은 저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성경 표현의 모호함은 성경이 비과학적임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다만 성경이 밝히려고 하는 핵심내용이 ‘과학적 진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즉 성경은 과학과는 다른 차원의 ‘진리’에 대해서 말하는 책입니다.

성경의 ‘창조 이야기’가 정말 말하려는 것은 ‘이 세상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밀한 계획과 의도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세기가 설명하는 인간은 ‘분명한 삶의 목적이 있는 존재’입니다.
이처럼 기독교 신앙은 ‘우리가 왜 태어나 존재하고 있는지’를 설명해줍니다.

반면에 전통적인 진화론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우연히’ 만들어졌다고 주장합니다.
즉 전통적인 진화론이 그리는 인간은 ‘어쩌다 보니 생겨난 존재’, 따라서 사실상 ‘삶의 목적’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실상 존재가치로만 보면, 미생물이나 인간이나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진화론적 가치 아래에서는, 살인은 사실상 큰 죄가 아닙니다.
우리가 가축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나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나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습니다.

실제로 이런 전통적인 진화론적 가치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인종차별주의 및 인종청소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19세기 백인들이 호주를 점령할 때, 그들은 호주의 원주민들을 아직 진화가 덜 된 유인원 정도로 취급하여 대규모 학살을 자행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백인들은 유인원이 흑인, 황인, 백인의 순서로 진화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무려 100만 명을 넘었던 호주 원주민들의 인구는 7만 명까지 줄었지만, 호주를 점령한 백인들은 별다른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1900년대 중반 ‘풋남’과 ‘민츠’ 같은 진화론자들은 ‘흑인은 구제 불가능한 존재이며, 5만 년이 지나야 백인과 동등해질 것’이라고까지 주장하였습니다.
이처럼 전통적인 진화론은 인류의 대학살조차 정죄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전통적인 진화론의 핵심결론은 ‘하나님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시작되기 위해서도, 유지되기 위해서도, 그리고 발전하기 위해서도, 하나님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수억 년 전 우연히 발생한 미생물을 적절한 환경에 그대로 두기만 하면 저절로 사람까지 진화한다는 논리입니다.
그래서 전통적인 진화론은 오늘까지도 무신론자들의 중요한 사상적 근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진화론은 단순한 과학적 이론이 아닌 무신론적 철학과 신념의 산물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창조 이야기’와 전통적인 진화론이 첨예하게 부딪히는 부분은 단순히 ‘원숭이가 사람 되었다’는 점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과 전통적인 진화론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놓고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통적인 진화론이 ‘과학이 추구해야 할 진리의 한계’를 무모하게 넘어섰기 때문에 벌어진 불행입니다.

그렇다면, 신앙과 과학이 추구하는 진리는 어떤 점에서 서로 다를까요?
과학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온 세상과 그 작동원리를 이성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입니다.
따라서 과학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의 진실’에 대해서 알아내려고 합니다.
이에 반하여 성경은 이 세상만물을 만드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진실’을 밝히려고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은 성경이 말하는 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합니다.

이런 차이는 모세가 이집트를 떠나 홍해를 건널 당시를 상상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일 현대 과학자들이 ‘타임머신’을 발명하여 모세가 홍해를 건널 당시의 과거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찾아낼 수 있을까요?

우선 과학자들은 풍향, 풍속, 기압, 홍해의 깊이와 규모 등을 측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을 동영상으로 녹화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수집한 각종 자료들을 토대로, 특이한 기상변화의 원인에 대해서 갖가지 추측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원인불명의 기상이변에 의해 홍해가 갈라졌다’까지 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수집한 자료들은 눈 앞에서 벌어지는 현상만을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인들은 바로 그 장면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발견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기적의 손을 체험합니다.
그래서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민족들은 춤추고 악기를 연주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과학과 종교의 차이입니다.
이 세상에는 과학이 밝힐 수 있는 영역이 있고, 종교가 밝혀야 하는 영역이 있습니다.
지난 주일의 설교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 현대과학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겠다는 것은 자신의 능력을 망각한 교만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과학적 원리와 법칙을 일일이 간섭하는 것 역시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이런 서로의 영역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았기에 생긴 비극이 바로 17세기 초반에 벌어진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지동설(地動說) 정죄 사건입니다.
당시 천주교의 영향력 아래 있던 국가들은 우주의 중심을 지구로 보고, 태양을 포함한 모든 것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갈릴레이는 우주의 중심이 태양이며, 지구도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결국 1633년 당시 천주교는 종교재판소를 통하여 갈릴레이의 지동설을 정죄하고, 그를 가택연금 시키고 말았습니다.
갈릴레이가 죽은 지 350년이 지난 1992년,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갈릴레이 재판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인정하고 갈릴레이에게 사죄하였습니다.

최근 ‘리처드 도킨스’ 옥스퍼드대학교 교수의 강경한 무신론은 갈릴레이 사건이 정확히 뒤집어진 모양새입니다.
최근 발간된 <현실, 그 가슴 뛰는 마법>(2012.4.)에서도 그는 다양한 과학적 자료들을 토대로 자신의 무신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이미 과학자의 본분을 넘어선 종교적 발언이기에 그의 동료들은 난감해하고 있습니다.
그가 위대한 과학자일지는 몰라도, 그가 무신론을 주장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과학자가 아닌 ‘무신론’이라는 종교를 신봉하는 종교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현대 과학과 기독교 신앙이 각자의 영역과 한계를 분명히 인식한다면, 이런 불행한 충돌을 막을 수가 있습니다.

2. 과학과 기독교 신앙은 서로를 보완해줍니다.

하지만 제가 이런 식으로 현대 과학과 기독교 신앙을 구분하면, 적지 않은 분들이 이렇게 반문할 것입니다.
‘아니 그럼, 과학자들과 종교인들은 결코 대화할 수 없다는 뜻인가요?’

당연히 아닙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많은 대화를 해야 합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현실 자체도 과학과 기독교의 대화를 불가피하게 만들지만,
과학과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한계 자체도 서로가 서로를 필요하게 만듭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과학의 본분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의 진실을 최대한 합리적으로 밝히는 것입니다.
반면 기독교 신앙은 이 세상만물을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습니다.
따라서 현대 과학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움직이시는 ‘원리’에 대하여 설명하고,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움직이시는 ‘목적’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과학과 기독교 신앙이 각자의 한계와 능력을 정확히 인식한 상태에서 서로를 도와주면,
마치 한 세트의 퍼즐조각들처럼 훌륭한 콤비를 이룰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차에 최신 정보를 담은 최고급 네비게이션을 달았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 네비게이션은 여러분이 어디를 목표지로 삼든지 안전하고 빠르게 인도할 능력을 충분히 갖추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네비게이션의 능력은 여러분이 네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해야만 나타납니다.
여러분이 목적지를 밝히지 않는 이상, 네비게이션은 여러분들의 여행에 별다른 도움을 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훌륭한 네비게이션을 탑재하고도, 운전자는 길을 못 찾아 사방을 헤매는 엉뚱한 고생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 제공하는 ‘목적’을 상실한 현대 과학의 모습입니다.

반대로 여러분의 네비게이션이 GPS 신호도 제대로 수신하지 못하는 불량품에다가, 지리 정보도 전혀 업데이트 되어 있지 않았다면,
여러분이 아무리 목적지를 정확히 입력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네비게이션을 믿고 운전하다가는 엉뚱하고 위험한 곳으로 질주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네비게이션은 차라리 없는 편이 낫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차량 네비게이션이 보급되던 초기에는,
네비게이션을 따라 운전하다가 낭떠러지에 이르거나,
주택가의 담벼락으로 돌진하는 웃지 못할 사태도 벌어지곤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대로 된 과학적 소양 없는 맹목적인 신앙이 초래하는 재앙입니다.

현대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현대과학은 매우 위험한 곡예를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최근 조류독감 바이러스를 연구하던 미국과 네덜란드의 생물학자들은 양국 정부의 강한 제재를 받았습니다.
미국과 네덜란드의 생물학자들이 사람에게도 옮는 조류독감 바이러스를 공기 중으로 감염시키는 법을 연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작년 8월 그 연구결과를 <네이처>와 <사이언스>지에 제출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순수한 ‘과학적 탐구’의 결과였습니다.

그러자 미국과 네덜란드 정부는 치사율이 60%에 이르는 조류독감 바이러스를 공기 중으로 감염시키는, 너무나도 위험한 연구결과가 발표되는 것을 황급히 막았습니다.
이 기술이 테러집단에게 넘어가거나 실수로 유출될 때에는 엄청난 재앙이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상당히 편집된 형태이지만, 결국 이 논문은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지난 5월2일 <네이처>에 발표되고 말았습니다.
앞으로 이 기술이 인류 대재앙의 원인이 될지, 백신과 치료제 개발의 기폭제가 될지, 인류는 가슴 졸이며 지켜보고 있습니다.

사실상 현대과학이 제공하는 모든 결과물은 이런 양날의 칼입니다.
분명한 이점도 있지만, 거기에 따르는 부작용도 상당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제가 여러 번 언급한 적이 있는 원자력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현대과학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 과연 바른 길인지 그른 길인지, 행복의 길인지 불행의 길인지, 현대과학은 함부로 예측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궁금하다고 무조건 달려드는 것이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님을 바로 ‘선악과 사건’이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없는 현대과학은 자신의 무덤을 파는 비극을 맞게 될 것입니다.

반면 세계적인 첨단 IT 강국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아직도 어처구니 없는 사건들을 벌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직도 일부 목회자들과 중직들 중에는 근거도 없는 과학상식을 늘어놓으며 건강보조식품을 만병통치약인양 선전하거나,
함부로 섭취하면 위험한 약재를 유통하거나,
아무런 과학적 근거도 없는 민간요법을 유포하는 데 앞장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순진한 성도들은 목회자들과 중직들이 하는 말이므로 ‘아멘’하고 순진하게 받아들입니다.
마침내 그런 사이비 과학과 무식한 신앙이 만나 큰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는 사태까지 벌어집니다.
그 결과, 한국 기독교는 또 다시 무지몽매한 집단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게 됩니다.
기독교는 결코 그런 사이비 과학의 희생양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행전 27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과학적 상식을 갖춘 그리스도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지중해 지역의 기후를 잘 알고 있었기에, 가을 ‘대속죄일’ 이후에는 배를 운행하는 것이 매우 위험하다고 경고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승선한 배의 선장과 선원들은 괜찮다며 항해를 강행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배는 사도 바울의 예상대로 큰 폭풍을 만나 좌초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오히려 사도 바울은 두려움에 떠는 승객들을 안심시켰습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사도행전 27:22-25).
그리고 사도 바울의 말대로, 그와 함께 그 배에 올랐던 사람들은 그 폭풍 가운데서도 다 살아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과학적 지성과 영성을 겸비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지난 2009년 다윈의 진화론 발표 150주년을 맞아, 영국 성공회는 이런 성명을 발표하였습니다.
‘종교의 신비로움과 과학 발견의 경이로움 사이의 건강한 균형은 필수적이다.’

우리 꿈의교회가 소속된 감리교는 이성과 영성을 모두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단입니다.
인간에게 과학적인 이성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며,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영성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현대과학과 기독교 신앙은 서로 앙숙이 되어야 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돕고 보완하며 ‘하나님의 진리’를 탐구하는 사이 좋은 파트너가 되어야 합니다.
현대과학은 기독교 신앙을 통해 겸손을 배우고, 기독교 신앙은 현대과학을 통해 건강한 영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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