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날자 : 2012-05-06

설교자 : 김학중 목사

본 문 : 로마서 1장 18~23절

오늘은 지난 3주간 우리가 다루었던 ‘악’이라는 현실적이면서도 사뭇 추상적인 주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존재 증명’이라는 좀 더 흥미로운 주제에 도전하겠습니다.

 

현대는 과학의 시대입니다.

과학은 본질상 모든 것을 직접 확인하여 ‘증명’하려고 합니다.

이 과학의 시대에는 인간의 감각을 통하여 증명이 되든, 이성적인 논리를 통하여 증명이 되든, 무엇이든 직접적으로 증명이 되어야 ‘진리’로 인정이 됩니다.

 

그런데 이런 증명을 통한 진리인증 방식은 사실 오래된 전통은 아닙니다.

17-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이전의 세계에서는, 증명보다는 보통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상식과 전통이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예를 들면, 옛 사람들은 유교전통인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즉 ‘임금과 스승과 어버이는 하나’라는 말을 놓고, ‘왜 그렇습니까?’하고 따지지 않았습니다.

옛 어른들이 ‘문지방을 밟으면 복이 나간다’고 야단치면, 거기에 ‘왜?’라는 토를 달지 않고 그저 순종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통과 상식을 그저 ‘당연한 진리’로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계몽주의 시대 이후의 사람들은 무엇이든 직접적으로 증명되지 않으면 도무지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스마트폰이 흔해지면서, 젊은이들은 조금이라도 의심이 생기면 곧장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시작합니다.

인터넷 검색을 하여 다행히 긍정적인 답변이 나오면 의심이 풀리지만,

아무 것도 나오지 않거나 오히려 부정적인 내용들이 등장하면, 젊은이들은 마음과 귀를 모두 닫아 버립니다.

 

그러므로, 이런 ‘과학적인 증명’의 시대에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은 하나님’을 무조건 믿으라는 말은 당연히 통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현대의 많은 지성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것’이 과거에 미신을 믿었던 것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도무지 보이지도 않고, 느낄 수도 없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오히려 현대 지성에 대한 모욕으로 느낄 정도입니다.

 

그래서 과거보다 현대에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자가 더 많고, 그 주장 또한 더욱 강력합니다.

<이기적 유전자>(2006), <만들어진 신>(2007) 등을 저술한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리처드 도킨스’ 교수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무신론자입니다.

이 설교 전 영상에 나온 것처럼, 그는 2009년 초부터 영국 런던의 대중버스 수십 대에 ‘신은 아마 없을 겁니다.

이제 걱정은 그만하고, 인생을 즐기세요’라는 대형광고를 부착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올해 초(2.23) 영국 캔터베리 대주교와 하나님의 존재를 놓고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대규모 토론회도 열었습니다.

물론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2011)를 펴낸 ‘알랭 드 보통’이나

<신 없는 사회>(2012)를 저술한 ‘필 주커먼’ 교수는 좀 더 온건한 무신론자들이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신이 필요하지 않다’는 주장에서는 일치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라’는 요구는 당연하면서도 상당히 버거운 문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라’는 질문은 비단 무신론자들만 던지는 질문은 아닙니다.

사실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극심한 어려움을 만나면 때때로 ‘정말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걸까?’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 증명’이라는 이슈는 무신론자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상당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감각을 통해 증명할 수도 없는 하나님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해보라’는 요구를 할 때마다, 우리는 그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침묵할 수밖에 없을까요?

 

오늘 여러분과 이 난제(難題)를 놓고 고민하기 위하여, 제가 한 가지 조건을 달겠습니다.

저는 이 세상의 온갖 신들이 아닌, 성경이 증언하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에 대해서만 말하겠습니다.

제가 세상의 온갖 다른 신들까지 옹호하거나 대변할 책임은 없지 않습니까?

즉 오늘 저는 유신론 대(對) 무신론이 아닌, 기독교의 하나님의 존재만을 놓고 여러분과 함께 생각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1. 하나님은 인간의 과학으로 증명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우선 저는 ‘하나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요?’라는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반대로 질문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능력이 있습니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이 세상만물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 즉 ‘누군가가 만들어 낸 존재’가 아니라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존재’인데 반하여,

하나님 외의 나머지 존재들은 모두 ‘만들어진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도 하나님께서 만드시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1).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한복음 1:3).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차이는 우리 인간과 인간이 만든 것들 사이에서도 나타납니다.

현대 도시인들은 직접 볼 기회가 거의 없지만, 농촌의 들녘에서는 아직도 허수아비들을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허수아비가 사람처럼 밀짚모자도 쓰고, 옷도 입고 있다고 해서 사람과 같은 존재로 생각할 수 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겉모습은 비슷할지 몰라도, 허수아비와 사람은 그 구성성분 및 능력이 완전히 다른 존재입니다.

 

최근에는 로봇기술이 놀랍도록 발달한 결과, 피부감촉은 물론이고, 생각이나 감정표현까지 사람과 유사한 로봇들이 개발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로봇들은 사람과 같은 존재로 인정할 수 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비록 로봇의 일부 능력은 사람을 능가할 수 있을지 몰라도, 로봇은 생명이 없는 기계인 반면, 사람은 엄연한 생명체입니다.

 

비록 허수아비와 로봇이 인간과는 비교될 수 없는 존재들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허수아비, 로봇, 인간은 모두 다 같은 ‘피조물’, 즉 ‘만들어진 존재’들입니다.

하지만 같은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인간과 인간이 만든 피조물들 사이에는 이렇듯 비교할 수 없는 차이가 생깁니다.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의 일부인 우리 인간들 사이는 어떻겠습니까?

하나님과 우리 인간들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는 우리가 감히 상상조차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본질적으로 우리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증명할 수 있을까요?

 

사실 현대과학은 현재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우주만물조차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2012.3.28, 3.29, 4.5.) KBS가 영국 BBC 방송이 제작한 3부작 <우리가 알아야 할 과학> 시리즈를 방영하였는데,

저는 그 중에서 2부 <우주의 신비>를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그 프로그램에서 과학자들은 우주의 생성과 소멸, 블랙홀 등의 우주의 역사에 대하여 마치 눈으로 직접 본 것처럼 쉽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과학자들의 설명 중 한 대목에 귀가 솔깃했습니다.

‘현재 우주에 존재하는 물질의 약 95%는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과학자들은 아직 이것들에 대하여 전혀 모른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가 아는 우주는 최대 5% 정도 밖에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까?

‘아니, 불과 5%의 지식으로 우주의 역사에 대하여 그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다니 …!’

이것은 여러분들이 아침에 버스정류장에서 처음 본 사람의 일생을 전기로 쓰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결국 현대과학이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도, 현대과학이 제공할 수 있는 지식은 아직 전 우주에 비하면 최대 5%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현대과학이 우리 인간 자신들에 대해서는 얼마나 설명할 수 있을까요?

현대과학은 지난 2001년 인간의 유전자 지도를 완성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과학자들은 이 ‘인간 유전자 지도’의 완성으로 인간의 질병연구에 대혁신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현대과학은 아직도 그 유전자들의 특성을 다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유전자 2만5천개 중 아직도 절반 가까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체역학이 생각 외로 복잡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당뇨병 발병에 관련된 유전자만 해도 무려 1,500여 개나 되는데, 이것들을 어떻게 통제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전문가들도 막막할 뿐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너무나 친숙한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현대과학의 현실을 보며, 저는 김국환 씨의 유행가 가사를 떠올렸습니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

 

이렇게 하나님께서 만드신 온 우주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조차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이해하거나 증명할 수 있을까요?

또는 그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이라도 설명하거나 증명할 능력이 있을까요?

이것은 땅을 기어 다니는 지렁이가 우리 인간의 유전자를 분석하고, 우리 인간의 감정과 이성까지 완전히 이해하겠다는 말보다 더 황당한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물질이 아닌 ‘영(靈)’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요한복음 4:24).

 

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나 그리스어에서, ‘영’은 ‘바람’이나 ‘숨’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분명히 실제로 존재하지만 인간의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존재가 바로 영입니다.

 

인간은 물질적인 동시에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 존재를 과학적으로 온전히 증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러분이 느끼는 ‘사랑’을 과학적으로 어떻게 증명하겠습니까?

여러분이 사랑을 느낄 때, 여러분의 몸 속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을 사랑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호르몬은 화학식으로 나타낼 수 있어도, 사랑 자체는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사랑을 느낄 때, 여러분이 하게 되는 다양한 행동들을 사랑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하지만 사람들마다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 다르지 않습니까?

이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사랑조차 인간의 언어나 과학으로는 다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을 이런 사랑 같은 존재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1서 4:16).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물질적인 부분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영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더욱 무지합니다.

현대과학은 인간의 영적 부분이 겉으로 표현되는 현상만 관찰할 수 있을 뿐, 그 영적 본질을 증명할 능력이 없습니다.

하물며, 본질적으로 영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현대과학이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무신론자들이 ‘도무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고 떠드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존재하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을 증명할 능력과 방법이 없다는 것이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많은 신학자들과 철학자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증명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결국 실패한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일찍이 ‘우리 인간의 순수이성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결국 ‘영원무한(永遠無限)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라’는 말은 ‘눈먼 사람에게 아름다운 그림을 보여주라’는 요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2. 하나님은 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여러분들 중에는 이렇게 반론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 그럼, 우리 인간이 하나님에 대하여 증명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무조건 믿으라는 말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은 무턱대고 믿는 맹목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만일 그렇게 맹목적으로 믿는다면, 무속종교나 미신을 믿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맹목적인 신앙은 독선적인 아집(我執)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을 이해할 방법이 없으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여주시는 만큼’만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숨겨진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시는 것’을 신학적 용어로 ‘계시(啓示)’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드러내십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만물을 통해 드러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특별한 말씀을 통해 드러내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세상만물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다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1:20절 말씀을 다시 읽어 봅시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그리고 그 세상만물 속에는 우리 인간 자신도 포함됩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로마서 1:19).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만물들을 통하여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실까요?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0절에서, 하나님께서 세상만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분명하게 보이신다고 말씀합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온 우주만물을 바라보며, ‘이 모든 것을 설계하고 만드신 위대한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들의 마음 속에 기본적으로 심어놓으신 깨달음입니다.

 

여러분이 새 자동차를 구입할 때 보통 두 가지를 살펴보게 되는데, 바로 기본 사양과 선택 사양입니다.

기본 사양은 여러분이 그 자동차를 사면 무조건 제공되는 품목 서비스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자동차든 핸들, 백미러와 사이드미러, 브레이크, 엑셀 등은 기본적으로 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자동차의 지붕을 여는 썬루프, 자동차 오디오, 좌석 시트재질, 자동차 색깔 등은 여러분의 취향에 따라 결정해야 하는 선택사양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다양한 재능과 성품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생긴 것도, 생각하는 것도, 사는 방식도 다 다릅니다.

하지만 그런 개인적인 특성과는 상관 없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 이 세상을 만드시고 움직이시는 위대한 존재가 계시구나!’하는 깨달음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 위대한 존재를 ‘신’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바로 시간, 공간, 문화를 초월하여 사람이 사는 곳에는 항상 종교가 생기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대다수 종교들의 문제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의 물건들을 가지고 창조주 하나님을 대신한다는 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에 불과한 데도, 그것들을 ‘신’이라고 부르며 섬깁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이 세상의 다른 물건들이 더 믿음직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욕할 때, 보통 인간보다 못한 동물들을 갖다 붙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욕설에 주로 등장하는 동물이 ‘개’나 어린 짐승을 일컫는 ‘새끼’라는 단어가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의 물건들을 놓고 ‘신’이라고 부르며 섬기는 것은 사실상 하나님께 상스러운 욕설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 물건들을 ‘신’으로 섬기는 우상숭배에 대하여 특별히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로마서 1:18, 23).

하지만 이 세상만물을 통하여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위대한 신이 있다’는 것뿐, 더 자세한 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한 ‘위대한 신’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그의 특별한 말씀을 통하여 나타내십니다.

우리가 읽는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특별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자신이 어떤 분인지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지 않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자세히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을 설명한 글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신 글이다 보니, 보통 글과는 읽는 방법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일반 글들은 우리가 진리인지 거짓인지를 확인하고 검증하며 읽어야 하지만, 성경은 ‘믿음’을 가지고 받아야 합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우리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우리의 이성과 지혜로는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깨닫도록 도와주는 ‘영적 사다리’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의 복음서들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계속하여 사람들에게 ‘네가 믿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특별히 성경은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혜를 가득 담은 글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사랑고백을 담은 편지를 받는다면, 그 편지의 문법을 따지고, 문맥의 논리를 분석하고, 수학적으로 계산하며 읽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연애편지를 읽으면, 그 편지를 쓴 사람의 진정한 사랑은 파악할 길이 없습니다.

사랑고백을 담은 연애편지는, 그 편지를 쓴 사람의 진정한 사랑을 믿으며, 활짝 열린 마음을 가지고 온 가슴으로 느껴야 그 진정한 뜻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경말씀을 읽을 때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며, 활짝 열린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존재를 제대로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3.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의 행실을 통하여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어떤 분은 이렇게 질문하실 것입니다.

‘그럼, 성경을 못 읽은 사람은 하나님을 알 방법이 없잖아요?

이건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맞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특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런 점에서 특혜를 받았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우리 역시 다른 사람들보다 특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특혜를 입은 사람들은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서양 전통에서는 사회의 특권층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자신들의 특권에 걸맞는 책임과 의무를 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귀족들은 일반 평민들보다 더 모범적이고 도덕적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특혜를 받은 우리에게도 특별한 책임과 의무가 주어지는데,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우리의 삶 가운데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원칙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대신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이 보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에게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인들을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불렀습니다.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고린도후서 3:3).

 

또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인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하였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린도전서 12:27).

다시 말하면, 세상 사람들은 교회를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고, 느끼고, 체험합니다.

결국 인간의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는 이 세상의 교회를 통하여 나타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행실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막중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세상에 어떤 모습을 보여주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이미지도 바뀌게 됩니다.

 

결국 오늘날 무신론자들이나 이단들이 득세하는 것도, 결국 기존 교회가 하나님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기존 교회 속에 거룩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이 아닌, 일반 사람들보다도 더 몰상식적이고 이기적인 사람들만 들끓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단지 하나님을 증명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기존 교회 속에서 거룩하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기에 실망하며 교회로부터 발걸음을 돌립니다.

사람들이 교회로부터 발걸음을 돌린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에게 등을 돌린다는 뜻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등에 업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모두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명하는 증거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살지 말고, 여러분의 삶 가운데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하여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태복음 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