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English]
설교날자 : 2012-04-29
설교자 : 김학중 목사
본 문 : 야고보서 5장 13절
오늘은 이 세상의 ‘악의 문제’를 다루는 마지막 시간입니다.
오늘은 ‘악의 문제’ 중에서도 ‘고통’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구약성경의 <창세기>는 인간의 고통이, 최초의 인류였던 아담과 하와의 범죄 때문에 시작되었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이 타락하기 전에는 노동과 출산도 고통스럽지 않았지만,
이들이 타락한 이후에는, 농사도 출산도 모두 ‘고통스러운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인간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 되고 말았습니다.
불교 역시 이 인간 세상을 ‘고해(苦海)’, 즉 ‘고통의 바다’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고통은 죄인이나 큰 불행을 당한 사람들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제 말을 못 믿으시겠거든, 큰 대(大)바늘로 여러분의 손가락 끝을 한번 찔러 보십시오.
아무리 착하고 의로운 사람이라도, 그리고 부족함 없이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라도, 정상적인 사람은 그 손가락 끝에 상당한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 중에 고통의 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고통(苦痛)의 사전적 의미는 ‘몸이나 마음의 괴로움과 아픔’입니다.
즉 우리의 몸과 정신을 포함한 우리 삶 전체가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고통이 찾아오면 원칙적으로 육체와 마음은 함께 괴로워합니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사람의 육체와 마음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대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스’는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유명한 문장을 남겼습니다.

현대 뇌과학 분야에서 손꼽히는 권위자인 ‘라마찬드란’ 박사가 2011년 펴낸 책이,
며칠 전(4.16) <명령하는 뇌, 착각하는 뇌>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을 보면, 왼쪽 팔의 절반이 잘려나간 ‘빅토르’라는 환자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환자는 이제는 존재하지도 않는 왼쪽 팔 부위에서 통증을 느끼기도 하고, 때때로 가려움도 느꼈습니다.
하지만 검사결과, 빅토르의 뇌손상이나 지적 장애가 있는 환자는 아니었습니다.
빅토르는 다만 ‘환상통(幻想痛)’, 즉 ‘환상 속의 통증’을 앓고 있는 환자였습니다.
이 환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라마찬드란’ 박사는 특수한 거울 상자를 고안하여, 이 환자의 눈에 왼쪽 팔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빅토르의 고통은 사라졌습니다.
이 실험은 인간의 육체와 마음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실험이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고통은 육체의 문제인 동시에 마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우리의 신앙도 고통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 평안할 때는 신앙생활 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몸이 고통스러울 때는, 우리의 신앙도 흔들리기 쉽습니다.

누구보다도 영성이 깊었던 신약성경의 사도 바울도 자신의 몸에 있는 ‘가시’를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씩이나 간구하였습니다.
이처럼 신앙이 아무리 깊은 사람에게도, 고통은 힘들고 괴롭습니다.

지난 주일 우리가 살펴본 욥의 이야기에서도 사탄은 이 점을 부각시켰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주신 모든 복을 거두어 들이면, 그의 신앙이 깊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하여, 마침내 사탄은 욥의 온 집을 풍비박산으로 만들고, 욥의 몸까지 병들게 했습니다.
결국 고통스러움을 참지 못한 욥의 입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불평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처하느냐는 우리의 인생관 및 신앙과도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즉 우리가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의미와 목표가 달라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세상의 고통에 대하여 잘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고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1. 고통은 인간에게 한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의 말씀 야고보서 5:13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봅시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여기 ‘고난’은 ‘나쁜 일을 견뎌내는 것, 고통 당하는 것’을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고통을 경험하면 불평을 쏟아냅니다.
고통이 심할수록 쏟아내는 불평이 거친 욕설이나 저주로 변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자기 감정을 다스리지 못해 폭력을 휘두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잊고자 마약이나 술독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생물학적으로 볼 때, 인간의 고통은 그렇게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고통은 원칙적으로 우리가 육체적이나 정신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한계점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고통은 우리를 생명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안전장치입니다.
우리의 몸에 위험이 닥치면, 우리 몸의 각 부분은 고통을 통하여 우리의 뇌에 위험신호를 보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이 어떤 위험으로부터 어느 부분을 보호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위험을 피해야 하는지를 판단하게 해줍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뜨거운 냄비를 만지면 손의 감각기관들은 통증이라는 비상신호를 재빨리 뇌로 보냅니다.
그러면 뇌는 재빨리 손을 냄비에서 떼도록 지시합니다.
만일 손끝의 감각기관들이 통증 신호를 제대로 뇌에 전달하지 않으면, 우리는 손이 심한 화상을 입을 때까지 냄비를 붙들고 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고통 역시 우리가 정신적 한계에 부딪혔다는 것을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이제는 당신의 마음과 머리를 쉬게 해줄 시간입니다’하는 경고방송입니다.
하지만 많은 현대인들이 이런 정신적인 고통을 무시하고 생활하다가 결국 정신적인 장애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처럼 고통은 우리가 육체적이나 정신적으로 더 무리하면 건강도 나빠지고, 더 나아가 생명에도 지장이 있음을 알려주는 ‘위험 경고등’이며,
우리의 몸이 더 이상 위험한 상황에 빠지지 않도록 막아주는 일종의 ‘브레이크’입니다.

하지만 실제 우리 주변에는 이런 몸의 ‘위험 경고등’이 망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선천성 무감각증(CIPA)은 감각신호를 뇌로 보내는 신경섬유가 발달하지 못하여 통점, 냉점, 온점 등의 감각을 뇌에서 깨닫지 못하는 질병입니다.
그래서 선천성 무감각증 환자는 피곤함, 허기, 배설본능, 성욕 등은 정상인과 같이 느끼지만 고통, 뜨거움, 차가움과 같은 것은 느끼지 못합니다.
따라서 선천성 무감각증 환자는 심각한 상처가 나도 금방 깨닫지 못하기에, 항상 생명의 위협에 시달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오히려 감사할 일입니다.
고통이 있기에 오히려 우리의 삶이 더 안전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은, 우리의 고통을 단순한 ‘생존을 위한 안전장치’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우리의 고통을 ‘기도의 기회’라고 가르칩니다.
즉 고통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시간’이 되었음을 알려주는 자명종이라는 뜻입니다.

왜 우리는 행복할 때보다 고통 당할 때 하나님을 찾게 될까요?
그것은 고통을 당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하나님이 없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존재, 더 나아가 하나님만큼이나 똑똑하고 힘이 있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고통을 당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이 ‘한계가 있는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인간은 고통을 당할 때 자신이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아닌, 부족하고 미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그제서야 인간은 자신의 지혜와 힘만으로는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일으켜 세워줄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극심한 환란을 받은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고린도후서 1:8-9).

20세기의 위대한 기독교 변증가 C. 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라는 책에서, 고통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쁜 일들 속에서 우리에게 속삭이시고, 우리의 양심 속에서 말씀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 속에서는 고함을 치신다.
고통은 귀 먹은 세상을 깨우시기 위한 그분의 메가폰이다.”

이처럼 우리 주변에 있는 신앙이 좋은 분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도저히 감당치 못할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고통 가운데서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며, 무한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고통이 생겼습니까?
이제는 여러분이 기도의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만날 시간입니다.
이 세상을 향한 눈을 감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눈을 열어 보십시오.
여러분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곁에 늘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2. 고통은 이웃과 공감(共感)하게 도와줍니다.

앞서 저는, ‘고통은 육체의 문제인 동시에 마음의 문제’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표현 속에는 상당히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 의미들 중에 하나는 ‘고통은 생각만으로는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책을 보고 연구하거나 각종 과학실험을 한다고 고통의 실체를 알 수는 없습니다.
고통은 자신이 직접 체험하지 않으면, 그 실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남자 산부인과 의사와 여자 산부인과 의사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사실 의학적 지식이나 경험에서는, 남자 산부인과 의사가 여자 산부인과 의사보다 훨씬 더 앞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자 산부인과 의사가 ‘내가 더 잘 안다’고 하며 큰소리 칠 수 없는 부분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출산의 고통입니다.
출산의 고통은 실제 아이를 낳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감히 ‘안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물론 남자 산부인과 의사들의 경우, 수많은 임산부들의 비명소리와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며, 임산부들의 고통을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짐작’일 뿐 실제로 출산의 고통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에서 최고로 가난한 나라들이 밀집한 아프리카 대륙에서는 요즘 하루에도 수백 명씩 굶어 죽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프리카 사람들이 다 그렇게 가난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가난한 나라일수록 빈부의 격차는 더 극심해서, 잘 사는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만큼 부귀영화를 누립니다.
그런데 그런 나라의 부자들이 바로 옆 동네에서 굶어 죽어가는 자신의 동포들의 고통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그 부자들은 가난한 동포들의 고통을 관찰할 수는 있어도, 그들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통은 관찰한다고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자 하나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것, 그리고 마침내 가장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죽으신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 위에서 우리 인간들을 팔짱 끼고 지켜 보시며, ‘살기 꽤나 힘들겠군’ 하시며 혀만 차고 계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만일 그렇게 세상을 구경만 하고 계셨더라면, 예수님의 사랑은 여러분이 TV 드라마를 보며 눈물 흘리는 수준을 넘지 않았을 것입니다.
TV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고통 당하는 모습을 보며 여러분이 아무리 많은 눈물을 흘려 보았자,
그것은 일시적인 감정몰입일 뿐, 실제 그 배우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값싼 동정심이나 베푸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실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셔서 인간들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실제로 몸소 다 겪으셨습니다.
하늘 위에서 인간들의 고통을 단순히 관찰만 하지 않고, 직접 인간의 육체를 가지사 그 모든 고통을 직접 체험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브리서 4:15).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인정하시고, 공감하시고, 짊어지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의 방관자(傍觀者)가 아닌, 고통을 함께 짊어질 참 친구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고통을 이웃을 진심으로 이해하는 기회로 선용(善用)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웃을 말과 혀로만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기회로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손발이 잘리는 고통을 겪어 본 사람이 손발이 없는 장애인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암을 겪어 본 사람이 암투병하는 환자들의 애환(哀歡)을 제대로 공감할 수 있습니다.
어린 자식을 잃어 본 사람이 자식을 잃고 애타는 부모의 심정을 헤아릴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많은 고통을 겪은 만큼, 더 많은 사람들과 진심으로 교제하고,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이 겪은 고통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그는 …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린도후서 1:3-4).

고사성어 중에도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 서로 가엾게 여긴다’는 뜻으로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가엾게 여긴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자신과 같은 경험을 가진 사람, 특히 같은 고통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마음 문을 엽니다.
같은 고통을 느껴 본 사람들끼리는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위로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고통이 없으면 진실한 사랑도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의 고통이 우리의 이웃을 향한 진실한 사랑의 씨앗이 되길 원하십니다.

3. 고통은 ‘하늘나라’를 소망하게 만듭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고통은 모든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즉 이 땅에서 아무리 많은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도 보통 사람들이 받는 고통들을 대부분 겪어야 합니다.
최근 끊임없이 보도되는 유명 인사들의 이혼 보도들은, 아무리 대단한 스타들이라도 역시 인간으로서 사는 모습은 비슷하다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지난 2010년 10월, TV에서 행복론을 열강(熱講)하던 ‘행복전도사 최윤희’ 씨 부부가 동반자살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최윤희 씨는 그 동안 정부와 기업체는 물론 여러 TV 프로그램들에서, 암울한 환경에서도 ‘행복하게 사는 법’을 강연하던 ‘행복 디자이너’였습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폐와 심장질환이 찾아오자,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남긴 유서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2년 전부터 여기저기 몸에서 경계경보가 울렸습니다 …
2년동안 입원 퇴원을 반복하면서 많이 지쳤습니다.
그래도 감사하고 희망을 붙잡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추석 전주 폐에 물이 찼다는 의사의 선고.
숨쉬기가 힘들어 응급실에 실려갔고 또 한 번의 절망적인 선고.
그리고 또다시 이번엔 심장에 이상이 생겼어요.
더 이상 입원해서 링거 주렁주렁 매달고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
저는 통증이 너무 심해서 견딜 수가 없고 … 그래서 동반 떠남을 하게 되었습니다 …
그 동안 저를 신뢰해주고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죄송 또 죄송합니다.
그러나 700가지 통증에 시달려본 분이라면 저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이처럼 고통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해줍니다.
그래서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큰 부귀영화를 누렸던 솔로몬 역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도서 1:2-3)
그러므로 고통은 우리가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목표로 살면 ‘허무한 인생’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고통 가운데서 허무하게 죽어가는 우리들에게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결국 모든 것이 허무하게 끝날 수밖에 없는 이 땅이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비하신 ‘영원한 행복의 나라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를 여러분의 삶의 최종 목표로 놓고, 여러분의 삶을 다시 한 번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의 한 순간, 한 순간이, 비록 힘들고 고통스럽더라도, 하늘나라를 향한 의미 있는 발걸음이 됩니다.
여러분의 고통도 허무한 괴로움이 아닌 하늘나라를 향한 디딤돌이 됩니다.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우리는 고통의 순간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하늘나라까지 동행할 친구들을 사귀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사람들의 인생 목표는 무작정 장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사람들은 단 하루를 살더라도 하늘나라에서 상급 받는 삶을 택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고통을 두려워하며 피해 다니지만,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오히려 담대하게 고통 속으로 뛰어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더 큰 상급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로마서 8:18).
이처럼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더 큰 상급을 받을 수 있을까?’를 연구하며, 더욱 적극적이고 담대하게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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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까지 3주 동안, 우리는 악의 문제를 죄, 불행, 고통으로 나누어 간단하게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람도 ‘악의 문제’를 비껴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 땅 위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가 만들어 낸 결과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당하신 가장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장소였습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의 모든 악이 집결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무한한 용서와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손을 끝까지 붙들고 계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와 함께 고통 당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의 곁에 계신다’는 약속의 보증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악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완전히 끊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를 단단히 하나로 묶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님과 함께 죄를 이기고, 불행을 견디고, 고통을 뚫고 일어서는 승리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디모데후서 2:11-12).

예수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의 악을 이긴 승리의 깃발입니다.

이 ‘악의 문제’에 대한 설교를 마치며, 저는 여러분들에게 책을 몇 가지 소개하고 싶습니다.
복잡하고 광범위한 이 세상의 ‘악의 문제’를, 이 짧은 설교들로 다 다루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너무 부족합니다.
여러분들이 이 책들을 시간이 날 때 한번 읽어 보시면, 악의 문제에 대하여 좀 더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오스 기니스, 고통 앞에 서다> (오스 기니스 저, 생명의 말씀사, 2008)
2.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 (톰 라이트 저, IVP[한국기독학생회], 2008)
3. <악의 문제 바로 알기> (랜디 알콘 저, 두란노, 2011)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