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국에서 주님을 보았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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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 여행길에 나타난 주님

중국에서의 생활은 많은 가운데 큰 누림이 되었다. 주님을 먹으면 먹을수록 주님을 닮아가는 삶이 이루어져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였다. 사람이 어떤 음식을 먹느냐에 따라 그 체질이 결정된다는 말이 실감이 되었다.

 

고기를 많이 먹으면 산성체질이 되고 어떤 이는 매일 귤을 먹었는데 몸이 노랗게 변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먹는 것이 중요하다. 세상 것을 먹으면 우리 몸은 세상으로 조성될 것이다. 반대로 매일 주님을 먹으면 어느 날 우리는 주님으로 조성되고 주님으로 변화된 모습이 될 것이다.

 

어느 곳에서 사느냐 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 보고 듣는 것 또한 먹는 것이다. 신앙생활의 환경은 그 사람의 어떠함을 만들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과 함께 하면 설사 그가 담배를 피우지 않더라도 그의 몸에서 담배냄새가 나는 것처럼 우리가 어디에서 신앙생활을 하느냐 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내가 아는 친구는 거짓말이 판치는 교회 안에서 수십 년을 보낸 탓인지 그 자신 거짓을 싫어하지만 분별력이 미약하고 그도 모르게 거짓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고 간증하는 것을 들었다.

 

우리가 세상에 산다고 하지만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주님은 우리가운데 거처를 정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형제가 연합하는 교통가운데서 신실한 주님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

 

마태복음 5-7장은 왕국복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이 당연히 살아야 하는 삶의 모습이다. 곧 교회생활의 법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기 전에 교회생활이 무엇인가에 대한 계시가 필요하다.

 

어느 날 내가 교회생활에 대하여 노 형제님께 물었을 때 그분은 방학을 이용하여 내몽고교회를 방문해 보기를 권하였다. 그 날은 바쁜 일이 있으셔서 말씀을 못해주시나 싶어 여가가 있어 보이는 날에 또 교회생활에 대하여 듣기를 원한다고 하니 똑 같은 말로 내몽고교회를 방문해 보라고만 하셨다. 다그쳐 물으니 내몽고에 가면 교회생활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하셨다. 마음속에 내몽고교회는 참 대단한가보다고 생각되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몇 형제분들과 함께 내몽고입구에 이르는 만주리(滿洲里)행 기차를 탔다. 9시간 이상 걸려 새벽에 도착한 만주리는 끝없는 초원가운데 있는 마지막 종착역이었다. 눈을 들어 아무리 보아도 망망한 초원과 풀을 뜯는 동물의 떼뿐이었다. 태양이 눈 아래에서 뜨고 눈 아래로 졌다. 지평선이 눈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태양이 마치 눈 아래에서 올라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말을 타지 못하는 나를 위하여 가까운 곳에 숙소를 정하고 한 이틀 말 타는 법을 배워야 했다. 보기는 쉬운 것 같은데 직접 말 위에 올라보니 쉽지 않았다. 말 위로 올라보면 얼마나 높은지 모른다. 2층 높이정도 된다. 형제들의 도움을 받아 어느 정도 말 타는 것을 배우고 난 후 방향도 모르는 어딘가를 향하여 말을 몰아갔다.

 

한없는 지평선 끝을 향하여. 내가 한국에서 교회 생활할 때 어떤 사람이 북대황(北大荒)이라는 책을 읽어보기를 권하여 많은 교회 사람들이 읽어본 기억이 있었다. 진짜 내가 그 책에서 본 북대황의 한 가운데를 가고 있는 것이다.

 

얼마를 갔을까? 길이 없는 초원에서 방향을 잡는 것은 높이 쌓아올린 돌무더기가 이정표였다. 돌무더기의 모양을 보고 어느 방향에 어떤 곳이 있다는 표식이 있는 것 같다. 길을 안내하는 형제(내몽고 출신의)가 돌무더기를 유심히 살펴 방향을 정하는 것을 보면 그러한 것 같다.

 

멀리 개미같이 작은 점들이 가까워지면서 점점 커진다. 멀리서 우리를 발견한 주변 목장 목동들이 행여하는 마음으로 달려왔다 돌아가는 것이다. 사람보기가 귀한 이곳에서는 몇 달에 한번 들르는 장사들도 반가운 손님이 된다.

 

어느 떼인가. 마찬가지로 검은 점 몇 개가 이쪽을 향하여 달려오는데 우리 주위를 몇 바퀴 돌면서 말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한번 크게 치면서 소리를 지르며 앞으로 달려나간다. 왜 그랬을까? 엉덩이를 친 말에는 다른 표식이 있었다. 이것은 그들만이 아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식이다.

 

북대황이라는 책에도 사람보기가 어려운 목장에 사는 목동들이 멀리서 오는 사람을 보고 달려 나오는 그림이 많이 등장한다. 그런 가운데 사나운 늑대들과 사투를 벌리는가 하면 끝없이 펼쳐지는 북만주 평원에서 양과 소를 기르는 목동들의 애환과 서정시에 젖어있는 인간들의 몸부림을 발견한다.

 

긴 여행 끝에 간신히 닿은 곳은 거리로 족히 100Km는 됨직한 곳에 있는 수십 개의 파오가 산재해 있는 곳이었다. 여기 말은 중국과 다른 내몽고 방언이다. 이 곳 저 곳에서 몰려든 청년들이며 아줌마며 아저씨 할머니 할아버지를 분별할 필요가 없다. 모두 부둥켜  안고 뛰며 춤을 춘다.

 

알아들 수 있는 것은 틀림없이 어느 찬송가 가운데 하나임 직한 노래 가락뿐이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하나로 만들 수 있는가. 무엇이 이들을 감격하게 하는가. 오 주님 감사합니다. 단지 나는 당신을 볼뿐입니다. 당신은 여기 계셨습니다.

 

파오 속에는 주님의 임재가 가득 차 넘쳤다. 20평이 조금 더 됨직한 파오 가운데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멀리서 온 시장한 손님을 위하여 정성스럽게 만든 양고기 요리(양고기를 얇게 쓸어 끊는 육수 물에 데쳐먹는 우리나라 샤브샤브와 같은 요리와 양고기 구이 등)는 일품이었다. 그 옛날 몽고의 징키스칸이 서양정벌을 할 때 먹었다는 양고기 요리이다.

 

그 곳 노인 형제의 우리와 함께 하는 기도는 감동이었다. 모든 이들이 옷깃까지 눈물로 범벅이 된 기도는 우리를 위해 유월절 양으로 먹힘을 당하는 주님의 고통과 고난을 표현하는 기도였다고 한다. 실감이 났다. 주님이 이러한 곳에서는 당신의순수한 형제들을 얻으셨다.

 

애굽이 아니지만 몽고의 대초원 장막가운데에서 가족수대로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양고기를 쓴 나물과 함께 먹는 경험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양을 먹은 사람은 모두 양이 되었다. 모든 사람이 양이신 주님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애굽에서 유월절을지낸 다음 날 양을 먹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양무리가 되어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 나선 것처럼 한 무리의 양의 모습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난 후 중국형제들과 연속되는 기도는 내 안에 임재한 주님을 찬양해 내는데 너무도 감동이었다. 우리가 먹은 양고기가 우리 몸 안으로 들어와 소화되고 우리의 살이 되는 방식으로 양과 우리 몸이 한 몸이 되는, 주님과 연합하는 새로운 몸이 되었다는 기도였다. 한 마리의 양이 모든 형제들의 몸으로 들어가 그와 함께 연합되었다면 우리는 한 몸에서 온, 한 피 받은 한 몸이라는 찬송시 또한 모두를 감격시켰다.

 

모든 사람들이 주님을 먹고 주님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우리 각자가 주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각사람 안으로 들어간 양이신 주님이 우리를 하나가 되게 한 것이다. 그 날의 모든 주제는 양(羊)이었다. 양을 먹고 양을 말하고 양을 찬양하고 양을 누리는 양의 날이었다. 양고기 요리도 가지가지였다. 어린 양고기, 늙은 양고기, 마른 양고기, 살진 양고기 등 각종 고기 맛을 다 보았다.

 

양고기는 물에 삶은 샤브샤브 요리보다 구운 양고기가 더 맛있었고 푸른 풀밭에서 자라는 살진 양고기보다 풀이 적은 사막에서 자란 마른 양고기가 더 맛이 있다. 주님은 이 세상에서 힘들고 고통 받으며 구워진 삶을 사시고 사막과 같은 어려운 삶을 사셨다는 것이다. 주님의 살이 그래서 맛이 있을까?

 

                
 

교회생활을 가르쳐 주신 주님

 

며칠을 먹고 마시며 간증하고 춤추고 말을 달리며 밤을 지세는 말씀들을 상고하면서 다시 길을 떠났다. 떠나는 슬픔이 없다. 난 천연적인 삶을 살아 그런지 헤어지는 것이 못내 서운한데 어느 한사람 서운해하는 모습이 없다. 모두 할레루야를 높이 외치며 “주님 함께 만나세”. “주님 몸 함께 지으세” 할뿐이다.

 

그리고 나서 다음 목표를 향하여 여행은 시작된다. 이렇게 여러 곳을 들러 보름 여를 여행하며 내몽고교회와 형제들을 돌아보았다.

 

그 가운데 기억에 남는 아주 특별한 놀이가 있다. 씨름이다. 몽고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놀이의 하나가 씨름이란다. 몽고의 씨름은 우리나라 씨름과 비슷하다. 삿바를 메는 것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두 사람이 힘을 다하여 상대를 눕히는 긴장과 박진감이 있어 좋다.

 

그런데 무슨 씨름이 이런 게 있는가 싶었다. 우리 같으면 어떤 방법으로든 빨리 상대를 눕히는 것이 제일인데 여기는 그렇지 않다. 아주 강한 사람과 아주 약한 사람을 골라 대결시키는 묘한 씨름판이다. 세상은 비슷한 사람끼리 대결을 시키는데 여긴 그렇지 않다.

 

강한 사람은 시종 방어를 하고 약한 쪽이 공격을 계속한다. 일정한 시간을 정해 두고 약한 사람의 공격을 끝까지 견디는 쪽이 승리하는 씨름이었다. 도저히 승산없는 씨름을 계속하는 사람의 모습에서 무엇인가 느끼고 싶어하는 모습이 보인다. 무엇일까?

 

형제 한 분이 가까이 다가와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가 고 묻는다. 난 그저 머리만 흔들었다. 내용을 모르는 나의 당연한 태도였는지 모른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씨름이라고 한다. 이름하여 야곱의 씨름이다.

 

압복강 가에서 날이 세도록 하나님과 씨름했다는, 주님과 씨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하는 씨름이란다. 웃어넘기기에는 남다른 형제들의 기지가 있다. 주여 나도 저들을 흉내내고 싶나이다. 우리 또한 평생을 주님을 대신한 자신과 아니면 다른 무엇과 기진하도록 씨름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초원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지만 주님을 섬기고 찬양하는 모습은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 우리는 너무 세상적인 애굽의 풍요를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주님이 필요한 곳이 없다. 이스라엘의 광야나 이곳 몽고의 광야나 비슷하다. 낮엔 타는 듯한 뙤약 볓과 밤에는 몸에 시린 차거움이 있다.

 

그래선지 내몽고에 오면 교회생활이 보인다고 했는데 여행이 거의 끝나가는 데도 내 눈에는 양고기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양에 대한 얘기는 수준급이 되었지만 다른 것은 모르겠다. “어느 때인가 노 형제님께 내몽고에 가면 교회생활이 보인다고 하셨는데 난 아직도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고 하자.

 

그 형제는 “이미 형제님이 다 보셨습니다. 그런데 주의해서 보시지 않았지 주님께서 이미 다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보여 주시지 않았다면 주님께 보여 달라고 기도하시라”는 것이다. 그리고 “형제님은 이미 교회생활을 매일 먹어보고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먹어본 것은 신물이 날 정도로 먹은 양고기 밖에 없는데 그러면 그것이 교회생활인가 하는 생각이 나서 “그러면 양이 교회생활인가요”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형제님 양을 자세히 보세요. 죽어있는 양고기 말고 살아있는 양 무리를 자세히 보시고 주님께 눈을 열어 보여 달라고 기도하세요” 하는 것이다.

 

 

그 이후로 틈만 나면 양 무리의 곁에서 양을 관찰하였다. 그리고 눈을 감고 주님께 양 무리를 통하여 교회생활을 보여 달라고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주님은 내 기도에 응답 하셨다. 중국어를 하는 내몽고 형제 하나가 내가 시간이 나면 양 무리를 살피는 것을 보고 무엇이 궁금한가 라고 물어왔다. 그 형제의 입에서 양 무리가운데의 놀라운 교회생활의 법을 들었고 보았다.


“형제님. 양 무리를 자세히 보세요. 양 무리는 타원형을 이루며 앞으로 행진합니다. 그러나 염소는 일 열 횡대로 갑니다. 양 무리의 제일 앞을 보세요”.

 

“형제님 앞서가는 양은 모두 늙은 숫양입니다. 늙어 식성이 적어 음식을 적게 먹습니다. 풀 제일 윗부분을 조금씩 먹으며 눈을 들어 멀리 풀이 많은 곳을 찾아 전체 양 무리를 인도합니다. 양 무리의 대장입니다. 목동들은 멀리 서서 늑대나 여우, 양을 해치는 동물들이나 지킬 뿐 가만 놓아둡니다. 앞 숫양들이 양 무리를 풀이 많은 곳으로 인도해 나갑니다.”

       

그렇다. 제일 앞의 양은 늙은 숫양들이었다. 나이 들어 늙은 탓인지 음식을 먹는 것보다 주위를 둘러보며 풀 위 마른 것만 조금씩 뜯어먹을 뿐이었다. 앞서가는 형제의 모습이다.


“그 다음은 암 양, 새끼 낳는 암 양들이 따르지요. 새끼를 낳아야 하기 때문에 좋은 풀을 많이 먹어야 합니다. 숫양이 하는 일은 암 양들이 보다 좋은 풀을 많이 섭취하여 많은 자식들을 낳아 번식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목축도 하나의 사업이기 때문에 출발 시 200마리로 시작하면 가을 도착지에는 1000마리를 이루는 목표가 있습니다. 그래야 먹고 살지요”

그렇다. 하나님의 경륜이 있듯이 양 무리를 치는데도 소위 경영함(경륜, 영어로는 Economy)이 있다. 마지막 도착 때 목동들이 예상하는 양 무리의 번식과 번식한 숫자가 있다. 주께서 생각하는 충만한 숫자가 차면 문을 닫는 마지막 날이 있는 것처럼 여기도 경영과 경륜이 있다.


암 양 다음 양 무리의 중앙에는 새끼 양이 따릅니다. 새끼 양은 어미 양이 먹고 남은 중간의 어리고 연한 풀을 먹습니다. 새끼 양을 항상 무리의 중앙에 넣어 바람과 추위에서 보호하고 따뜻하게 감싸줍니다. 제일 뒤에는 젊은 숫양들이 따릅니다. 어미 양과 새끼 양이 먹고 난 나머지 풀을 먹습니다. 식성이 강한 젊은 양들이기 때문에 무엇을 먹어도 소화를 잘 시킵니다.”

 

양 무리를 보면 교회생활이 보인다는 얘기가 실감이 났다. 앞서가는 숫양은 무리의 우두머리이다. 대가를 바라는 모습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군림하는 모습을 보이지도 않는다. 멀리 머리를 들어 무리를 좋은 풀과 양식으로 이끄는 양육하는 어른의 모습이다.

 

자기 것을 챙기는 모습도 아니다. 그런데 왜 세상에는 스스로 목자라고 하는 자들이 양들을 훼방하고 잡아먹고 양들에게 상처를 입히는지? 목자가 사람은 아니다. 목자는 멀리서 양 무리를 대적으로부터 보호하는 목동들의 모습이다. 우리가 말하는 목자는 목동들이 아니고 양 무리의 앞선 자이다.

 

그들의 모습에서 지혜를 배울 수 없을까. 앞서가는 숫양에서 양들 위에 군림하는 모습은 없다. 자기 몸을 드려 무리를 섬기는 모습이다. 숫양이 양 무리들에 꼴을 먹여 주는가? 아니다. 단지 풀이 많은 비옥한 초장으로 무리를 인도할 뿐이다. 먹는 것은 각자 스스로 먹는 것이다. 멀리 양무리를 지켜보는 목자의 모습에서 우리를 지키시는 주님이 보인다.

 

어린 새끼 양을 중앙에 둔다는 것도 의미가 깊다. 어린 지체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가. 사람도 그렇지 못하다. 사람은 제일 나이 든 어른이 가장 좋은 중앙에 위치한다. 우리는 어린 지체들을 가장 좋은 곳에 두고 제일 좋은 음식으로 먹이고 양육하는 양 무리의 본을 받아야 한다. 앞서 가는 자들은 어린 자를 섬기는 것이다.

 

중국 교회에서는 형제들이라고 부를 때, 꼭 제형(弟兄)들이라고 부른다. 형이 먼저가 아니고 아우가 먼저이다. 성경적이다. 교회는 아우가 먼저이고 약한 자들이 먼저이다. 먼저 된 자가 앞선 자는 아니다. 사악한 자들이 무리들의 재산을 늑탈하고 어린 지체를 약탈의 대상으로 삼는 세상교회와 다른 교회생활의 모습을 본다.



양과 염소를 가르시는 주님


“그런데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염소들은 일 열 종대로 갑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염소는 뿌리 밑 등까지 싹싹 뜯어먹기 때문에 뒤에 오는 다른 놈이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횡대로 가는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주님은 양과 염소를 분별하신다. 염소의 모습을 보면서 주님이 양과 염소를 분별해 놓는 이유를 알았다. 염소는 남을 위해 음식을 남기는 형제 사랑이 없다. 형제를 배려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주님의 새 계명이 무엇인가.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네 몸을 죽여 형제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었다. 자기 몸을 희생하여 형제를 사랑하는 사랑보다 큰 사랑은 없다고 말슴하셨다. 염소는 주님의 새 계명을 지키지 못하는 죄가 있다. 자기 이익과 자기 의를 자랑하는 자들이다. 주님이 배고플 때 돌아보았고 헐벗을 때 언제 우리가 모르는 채 하였느냐고 자기의 의를 내새우는 자들이다.

 

염소의 뿔과 양의 뿔을 비교해 보면 재미있다. 뿔은 자신을 보호하는 무기이고 호신장비이다. 그런데 양의 뿔은 안으로 꼬여 무기 모양이 아니다. 그런데 염소는 날카롭게 상대를 향하여 솟아있다. 전투준비가 되어있다. 양보가 없다. 

 

나는 목동들이 생활을 하면서 필요한 양식과 소용되는 돈을 위하여 어떤 양을 잡는가가 궁금하였다. 어떤 양을 잡아 팔며, 잡아먹는가 하는 의문이다. 양을 기르는 주인의 행정에 대하여 듣고 싶었다. 신앙생활에서 탈락하는 자들은 어떤 자들인지 알고 싶어졌다.


양을 팔거나 먹기 위해서 양을 골라내는데 기준이 있습니다. 보편적 기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새끼를 낳지 못하는 양을 골라내며 둘째는 설사를 하는 양을 골라냅니다. 번식능력이 없는 양은 필요가 없으며 좋은 음식을 먹고 설사를 하는 놈도 골라냅니다. 먹이를 오염시키고 다른 양의 먹이를 줄이기 때문입니다. 양을 잡으면 바로 가죽을 벗깁니다.”


그렇다. 새로운 번식이 없는 교회는 새끼를 낳지 못하는 양이다. 새끼를 낳지 못하면 젖의 생산이 없다. 새로운 생명이 탄생되지 않는 교회에 무슨 하나님의 말씀이 열리겠는가. 그런 양은 가죽을 벗긴다. 예복을 벗긴다는 뜻이다. 의의 옷을 입을 자격이 없다.

 

세상에는 새 생명이 탄생되지 않는 늙은 교회들이 많다. 모두 가죽을 벗기는 부끄러운 교회이다. 그러한 곳에 때를 따라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열릴 리 없다. 우리는 세상교회에서 구원받는 번식의 일을 보지 못한다. 주님의 목장에는 양들의 번식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주님의 상을 풍족하게 할 뿐만 아니라 주인의 기쁨이 된다.

 

그러나 번식이 없다면 주님의 기쁨이 없는 것이며 부끄러운 곳이다. 새로운 생명이 탄생되지 않는 교회는 옷을 벗기우는 부끄러운 교회이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없으니 그를 양육할 젖이 나올리 없는 것이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 없는 곳에는 말씀이 없다. 그런 곳에는 대개 오래 된 가루우유에 물을 타서 먹이는 젓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더 극치는 양들이 물을 먹는 모습이었다. 염소들이 물을 마시는 것과 너무 대비가 되는 모습을 본다. 양들이 물을 마시도록 작은 웅덩이로 몰아가자 앞서가는 양들이 5열이나 7-8열이었다고 하자. 사람 같으면 어떻게 할까. 틀림없이 사람들은 서로 먼저 물을 마시려고 웅덩이 전체에 둘러앉아 물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양은 그렇지 않았다. 5-8열이 10열은 되었을지 몰라도 앞선 양이 물을 다 마실 때까지 차분히 기다리는 것이었다. 설마 다른 양이 물을 마시러 대열을 이탈하여 나온다 해도 앞의 숫양이 머리를 들어 조용히 밀어내는 것이다. 사람보다 나은 질서가 있다. 한 마리 한 마리가 발을 적시지 않고 엎드려 물을 마시고 무리를 따라 나선다.

 

염소는 야단이다. 전체 염소가 웅덩이 속에 들어가 이리저리 뛰어 다니며 어쩔 줄 모른다. 물은 금새 흙탕물로 변하고 만다. 자기 오물과 함께 흙탕물을 마시는 것이 염소의 모습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 가슴에는 보이지 않는 희열이 솟구쳤다. 내가 무엇이관대 내 눈을 열어 교회생활의 그림을 보여 주실까 감사할 뿐이었다. 주여 감사하나이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생활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소서. 주여 그리하소서.

 

             

 가정을 온전케 하시는 주님


중국교회에는 고유의 집회소 건물이 없다. 정부가 인정하는 삼자애국(三自愛國) 교회가 아니면 법률적으로 집회소를 가질 수도 없다. 몰래 모이고 교통한다. 인적이 드문 한적한 곳이나 공장 지하실 등 허름한 곳을 빌려서 집회를 갖는다.

 

교회건물이 없다. 내몽고에도 500여 개가 넘는 집회소가 있다고 한다. 우리 나라처럼 십자가를 내건 교회 건물을 찾을 수 없다. 일정한 장소를 빌릴 수도 없다. 교회가 걸어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내몽고 형제들은 교회가 살아서 걸어다닌다는 표현을 쓴다.

 

처음에는 퍽 의아해 했지만 맞는 말이었다. 교회란 살아있는 주님의 생명들로 이루어진 지체들의 표현이다. 양 무리를 따라 파오를 옮겨가듯 교회가 발이 달려 양 무리와 함께 걸어가고 있다. 어느 파오든 그들이 모이는 곳이 곧 교회였다.

 

중국교회는 가정교회를 표방한다. 가정집에서 집회를 가지기 때문에 가정교회라는 의미가 아니다. 가정의 원칙을 교회의 원칙으로 하는데서 온 이름이다. 중국교회는 무엇보다 가정을 매우 중시한다. 온전한 가정이 아니면 가정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온전한 가정이란 전 가족이 구원받은 가정을 말한다. 중국 형제들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라는 말씀을 중히 여긴다. 가족 구성원가운데 한 사람이 구원을 얻으면 나머지 가족의 구원을 위하여 전심전력하는 모습을 본다.

 

주님이 믿는 이의 집에 주시는 약속을 온전한 가정의 시작으로 보기 때문이다. 거듭난 가정의 모습은 아름답다. 부모나 아이들이나 서로를 형제로 지칭한다. 가족 전체가 손을 맞잡고 기도하며 간구한다. 부모가 아이들 앞에 잘못을 회개한다.

 

주님이 계시는 가정은 정결하다. 주님이 가정을 정결케 하신다. 변화되는 가정은 주님의 편지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한다. 말씀이 생활가운데 나타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길은 가정이다. 교회의 기초는 가정이며 신앙생활은 실제의 삶이기 때문이다.

 

사실 중국에서는 온전한 가정이 아니면 교회를 지킬 수 없다. 가족 구성원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교회에 반대할 경우 교회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그래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교회의 원리를 가정에 비유한다. 온전한 한 부부를 기초로 교회가 성립된다.

 

남편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며 아내는 교회의 그림자이다. 자녀들은 증가된 교회의 확장으로 비유한다. 교회가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과 같이 아내는 온전한 남편으로부터 나온 한 몸이며 남편의 표현이기도 한다. 무엇보다 남편과 아내가 온전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아담과 하와가 한 몸이 되었던 것처럼 남편과 아내가 하나가 되어 한 가정을 이룬다. 이것이 교회의 기초단위이다. 교회의 시작은 온전한 가정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래서 중국교회에는 신실한 하나의 형제가 주 앞에서 굳건히 선 것을 매우 중하게 여긴다. 주님의 모습으로 변화되고 장성한 형제는 교회의 기초이다. 그 가정에 그리스도가 임한 것이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성령으로 오셨다. 성령은 수많은 생명을 낳는, 생명 주는 영이시다. 곧 교회를 생산하셨다. 이것이 신부이다.

 

주님의 모습으로 변화되고 장성한 형제는 죽음으로써 생명을 얻어 한 자매(신부)와 혼인하여 가정을 연다. 여기서 태어난 아이들이 새 생명들로서 교회의 지체이다. 이미 장성한 형제와 결혼한 자매,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새 생명들이 하나가 되어 한 가정을 이루는 것과 같이 집회소 또한 이러한 원칙에서 태어난다.

 

이렇게 태어난 작은 집회소를 온전한 가정이라고 부른다. 매일매일 이런 가정 가운데에는 기도와 찬송이 있고 말씀을 상고하는 집회가 열린다. 그러나 이것을 가정교회라고 부르지 않는다. 가정교회의 세포일 뿐이다.

 

이런 가정집회소의 자녀들이 성장하여 결혼하고 분가하여 또 다른 가정으로 독립되어 여러 포도송이를 이룬다. 가정교회는 이와 같은 여러 개의 포도송이를 하나로 합한 전체를 지칭한다.

 

아버지가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그들이 장성하여 또 자녀를 낳아 분가하여 생긴 가정, 모두를 한 가족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이 분가한 전체 가족을 하나의 가정교회라고 한다. 가정교회 안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 사촌, 육촌형과 누나, 동생들이 함께 하는 커다란 대가족과 같은 형성배경을 가진다.

 

가정의 번식체계와 같이 구원받은 형제 자매들이 하나의 포도송이를 이루듯 주님의 생명주는 영으로 번식된 교회형태이다. 주님이 교회의 머리이시듯 형제가 가정의 머리로서 그의 죽음과 희생을 통하여 신부를 건축하는 그런 모습이다.

 

매일 매 가정에서 집회가 열린다. 주일에 온전한 수많은 가정들이 한 곳에 모여 예배드린다. 때문에 가정교회의 핵심은 가정이다. 가정의 온전한 회복을 위하여 전 교회가 기도에 힘쓴다. 가정교회의 핵심은 온전한 가정이다.

 

중국교회는 몇 개 가정이 돌아가며 모이면서 시작된다. 소집회 형식이다. 상호간의 아주 친숙한 관계를 가진다. 각 가정이 안고있는 문제나 어려움, 자녀문제 등 가정 안의 모든 문제를 교통가운데 내놓고 주님께 간구한다.

 

어느 집에 밥그릇 숱 가락이 몇 개인가를 샅샅이 안다. 사랑하는 방법을 배운다. 중보 기도가 있다. 내 것 네 것을 구분하지 않는다. 약 20여 명 내외의 집회이다. 이런 집회소 몇 개가 모여 규모 있는 가정교회가 성립된다. 규모가 50-60명이 넘으면 집회소를 나눈다. 많은 사람이 모일 건물이 필요치 않으며 건물구입을 명목으로 돈을 걷을 필요도 없다.

 

집회 가운데에 가장 우선은 어린 자들이다. 그리스도인 자녀들의 인성과 태도가 다른 이들과 크게 구별될 것은 뻔하다. 중국에는 인구증가를 억제하기 위하여 한 가정에 아이 하나 낳기를 강제한다. 그래선지 아이들이 황제가 다 되었다. 부모 말을 듣지 않는다. 집에서건 밖에서건 임금이다.

 

그리스도인 가정의 아이들은 달랐다. 교통 가운데 주님의 말씀으로 양육해왔기 때문이다.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내가 본 어느 형제 집 자녀의 모습은 감동이었다. 아이가 밖에서 친구들과 더불어 야구를 하고 있었다. 마침 같이 어디를 가야했기 때문에 운동장에서 야구방망이를 잡고 있는 아이를 불렀다.

 

공을 치려는 아이였다. 부르자마자 아이는 방망이를 놓고 따라서는 것이었다. 난 생각했다. 만일 우리 아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틀림없이 지금 친구들과 야구를 하니까 끝나면 갈 것이라고 제 할 일을 계속 했을 것이다. 난 마음속으로 어떻게 하면 그렇게 아이들이 순종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놀라운 것은 그 형제의 이야기였다. 아이들이 부모의 말을 순종하지 않을 때 어떻게 아이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겠느냐는 것이었다. 가정에서 부모의 역할은 서로 순종하는 것을 보여주는 일 외에 다른 것이 없다 한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부모와 형제들에 순종하는 모습을 통해 아이들이 순종을 배운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하나님 앞으로 나오게 하기 위하여 부모는 아이들에게 순종을 실제로 사는 본이 되었던 것이다.

 

부모에게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은 그의 부모를 공경한다는 이야기이다. 공경 받을 수 없는 부모에게 순종할 아이들은 거의 없다. 결국 공경 받을 부모가 되었다는 뜻이다. 아이들로부터 존경받을 수 있는 아버지와 어머니이다. 가정교회가 무엇인지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온전한 가정이 무엇인지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가정교회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실행하는 곳이다.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서로 순종함으로서 나타난다. 우리는 하나님의 군대이다. 군대는 자기 의견이 없다. 순종할 뿐이다. 명령에 따를 뿐이다. 나이가 많아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지위가 높아 따르는 것도 아니다. 그 형제 안에 내주하시는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꿀이신 주님, 꿀을 삼가라 시는 주님


동북의 들녁은 넓고도 넓다. 하얼빈에서 기차를 타고 6-7시간을 달려야 산이 눈 안으로 들어온다. 여름이면 옥수수밭이 지평선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동북지방 특히 흑룡강성(黑龍江省)의 땅은 찰지고 기름지다. 하늘에서 보는 땅은 글자 그대로 검은 흑토지대이다.

 

한 여름철에는 옥수수가 자라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이다. 봄, 여름, 갈 할 것 없이 이름 모를 들꽃들이 끝이 없는 들판을 수놓는다. 들 꿀과 양봉은 동북 제일의 특산이다. 중국에는 꿀 값이 싸다. 진짜라고 거의 믿지 않았다. 값이 싼 것이 의심을 더하게 하였다.

 

중국 사람들은 가짜를 진짜보다 더 잘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에는 꿀 값보다 설탕 값이 비싸다. 그렇다면 비싼 설탕을 사다가 값싼 꿀을 만들어 팔수가 없다. 설탕은 공장에서 만들어 먼 곳에서 가져와야 하지만 꿀은 자연에서 거저 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후 중국 꿀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꿀같이 단 것은 없다. 언제 먹어도 좋다. 꿀은 당분이 많아 입에 달지만 영양가는 많지 않다고 한다. 꿀은 입에 단 것이다. 입에 단 것은 꿀만이 아니다. 남의 말하는 것 또한 꿀처럼 달다. 주님의 말씀 또한 꿀처럼 달다. 꿀은 좋지만 지나치면 해로운 이중성이 있다. 주님은 꿀이시면서도 꿀을 조심하라 하신다.

 

난 어느 날 대흥안령(大興安嶺)에서 따왔다는 꿀 몇 근을 가지고 집회소에 갔다. 노인 형제님들과 같이 들고 싶어서였다. 난 노인 형제님들과 가까이 지냈다. 중국어가 서툰 탓도 있어 노인 형제님들의 말씀은 알아듣기에 좋다. 무엇보다 폭넓은 성경 지식과 영적으로 성장한 형제님들의 도움을 받고 싶어서다.

 

한마디 한마디가 꿀과 같이 달았다. 마침 떡에 꿀을 발라먹고 있는데 옆자리를 지나던 노 형제님이 “한국 형제님은 꿀을 좋아하시네요” 라 하신다. 나는 오늘 교통이 꿀같이 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오랫동안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중국 교회는 나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이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바로 이런 곳이었나 싶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이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말씀하셨다. 얼마나 기름지고 아름다운 땅일까 생각했다.

 

어느 날 우연히 TV에서 이스라엘 가나안 지역의 모습을 보았다. 그 땅은 내가 생각하는 젖과 꿀이 흐르는 기름지고 아름다운 모습은 없었다. 아직도 상당한 면적이 사막으로 뒤덮여 있고 포성이 잠깐 멈추어있는 긴장의 땅이었다. “그래 이 세상에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어. 모두 다 썩어질 것들인데” 라고 혼잣말을 내뱉는 순간 아름다운 것은 오직 주님밖에 없다는 찬송가 가사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젖과 꿀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젖은 소에서 짠다. 동물에서 얻어진다. 그러나 소는 풀을 먹고산다. 소가 풀을 먹고 낸 것이 젖이다. 우리가 마시는 젖은 동물의 생명으로부터 얻어지는 추출물인 셈이다. 그리고 동물의 생명은 식물의 생명을 먹고 유지한다. 꿀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먹는 꿀 또한 벌이라는 동물에서 얻는다. 동물의 생명에서 얻어지는 양식이다.

 

그러나 그 꿀의 본질은 식물의 생명을 성숙하게 하는 꽃 가운데에서 가져온 것이다. 젖과 꿀 모두 동물의 생명과 식물의 생명이 연합하여 만들어진 합성체이다.

 

동물의 생명은 피에 있다. 식물의 생명은 씨 안에 있는 번식의 능력 가운데 숨겨있다. 피는 죽음을 상징하며 번식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의미한다. 주님의 모습이다. 주님은 동물의 형상과 식물이 지니는 생명의 번식의 속성을 모두 가지고 있다.

 

죽으시고 새로운 생명을 번식하기 위하여 성령으로 오신 주님이시다. 젖과 꿀은 주님을 상징한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곧 주님을 의미한다. 꿀은 주님이시다. 가나안은 지리적인 가나안 땅이 아니고 주님 자신이다. 그런데 왜 꿀을 좋아하시네 라고 말씀하셨을까 의문은 남아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주님은 이 질문에 응답해 주셨다.

 

내가 근무하는 대학에 야생동물자원대학이라는 곳이 있다. 야생동물에 대해 연구하시는 훌륭한 분들이 많았다. 양봉도 미래식품으로 연구 대상이었다. 우연히 양봉을 연구하는 교수님과 한 자리에서 점심을 들 기회가 있었다. 물어본 것도 아닌데 벌의 생태에 대하여 말하는 과정에 내 의문을 풀어 주었다. 

 

벌은 수줍음을 많이 탄다는 것이다. 친한 친구들과만 어울리고 가본 곳에만 간다는 것이다. 벌은 꿀을 따오는데 같이 다니는 친구들과 꼭 짝지어 다닌다. 그리고 한번 꿀을 따온 꽃으로 계속 간다. 자기가 좋아하는 동료들과 좋아하는 꽃으로 가서 꿀을 가져온다.

 

다른 동료들의 안내 신호가 없으면 다른 꽃에 갈 생각을 안 한다. 그래서 들에 수많은 꽃이 만발했는데도 어느 벌통에는 아가시 꿀이 들어있고 어느 통에는 싸리 꿀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벌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과만 교통을 나눈다. 벌이 꿀을 입으로 빨아서 같은 냄새가 있는 꿀 더미로 가져와서 쌓아둔다. 좋아하는 사람들과만 교통을 나누다 보면 입에서 나오는 냄새와 말이 같아진다. 이것이 꿀이다. 꿀은 파당이다.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입을 맞추는 파당을 말한다.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잠 5:3)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잠 25:27)


꿀은 입에 달고 좋다. 남의 말을 하는 것도 꿀이다. 허탄한 말도 꿀이다. 이런 말들은 같은 부류가 모여서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남의 말은 결국 자기 영예를 구하는 것이 되기 쉽다. 주님은 우리가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줄 알 때에 꿀을 먹으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주님께 드리는 소제물에는 꿀을 넣을 수 없다. 꿀은 부정한 것이다.

 

꿀은 완전식품이다. 별도 소화과정이 필요치 않다. 먹는 데로 에너지가 된다. 주님께서는 되새김질하는 동물과 식품을 정하다고 말씀하신다. 일이나 말을 되새김하여 곱씹는 것이 중요하다. 꿀은 완전식품이라 씹을 필요도 없다. 넘어가는 데로 에너지로 변한다.

 

험담은 다른 이가 물어온 꿀과 같다. 우리 안에 들어와 되새김 없이 에너지가 되기 쉽다. 입에 달고 먹기에도 좋다. 주님께 드리는 예배 가운데 꿀과 누룩은 금물이다.

 

꿀은 입에 달아도 많이 먹으면 몸을 상하게 한다. 몸 가운데 불을 당긴다. 화제의 제물이 될 수 없다. 교회생활에서 꿀은 사랑을 태우는 불이다. 좋아하는 사람들로 더불어 입을 맞추어 빚어내는 꿀은 형제들 사이의 사랑을 태워버리는 무서운 불이다.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에 미쳐 뻐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사 7:15) 무릇 너희가 여호와께 드리는 소제물에는 모두 누룩을 넣지 말지니 너희가 누룩이나 꿀을 여호와께 화제로 드려 사르지 못할지니라(레 2:11)


꿀이 진짜와 가짜 시비가 많은 것처럼 파당에서 만들어지는 말에는 진위가 분명하지 않다. 말이 옳으니 그르니가 항상 뒤따른다. 주님은 꿀이시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교통하며 주님과 입을 맞출 때 나오는 것이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꿀이다. 우리에게 합당한 꿀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신 꿀이신 주님을 누리고 싶다. 주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중국교회생활기 7부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