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철 목사) 우리가 어떤 대상을 분석하고 파악하려 할 때 그 대상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실체를 놓치기 쉽습니다. 그 대상과 상반되는 것을 같이 놓고 보면 우리가 요구하는 대상을 훨씬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하나님께서 태초에 빛을 창조하셨는데 우리가 빛만 들여다보면 빛이 뭔지 알 수 없잖아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실 때 세상은 흑암이었습니다. 흑암이라는 배경을 놓고 빛을 보면 빛의 가치와 의미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태양과 달, 별들, 우주를 만드셨는데 코스모스(cosmos), 질서라는 뜻이죠. 질서만 들여다 보면 질서의 가치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코스모스를 만들기 전의 세상은 카오스(chaos), 혼돈. 혼돈을 배경 삼으면 코스모스의 의미를 바르게 알게 됩니다.

 

우리가 삶이 뭐냐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것과 대비되는 죽음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죽음이라는 렌즈를 통해 삶이 무엇이고 생명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됩니다. 죽음은 순서가 없지 않습니까. 태어날 때는 순서에 따라 할아버지, 아버지 순으로 태어나는데 죽음에는 순서가 없습니다. 제가 장례식을 치른 가장 어린 아이는 태어난 지 3일된 아이였습니다. 3일 된 아이도 할아버지보다 먼저 죽을 수 있습니다. 죽음은 장소가 구별되지 않습니다. 신혼여행 가다 사고로 돌아가신 부부도 봤습니다. 죽음은 정해진 시간이 없습니다. 한자로 사(死) 자를 보면 한밤중(夕)에 비수(匕)처럼 날아온다는 뜻입니다. 낮에 비수가 날아오면 피할 수 있는데, 밤이니 피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은 이사야 선지자 말씀처럼 우리 코 끝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내뿜은 숨을 들이마시지 못하면 죽는 것이죠. 죽음을 알면, 우리가 오늘도 하루 살았다고 하는데 실은 하루 죽은 것이죠. 50년 살았다고 하면 50년 죽은 것이죠. 우리 나이만큼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은 것임을 알면, 삶이 뭐냐 생명이 뭐냐 알 수 있습니다. 죽음을 모르면 매일 사는 것 같은데 실은 매일 무의미하게 죽는 것입니다. 어느 날 호흡이 끝나면 자기 삶에 대해 후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창세기 5장에 보면, 에노스 때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에노스의 이름 뜻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자신의 죽음을 알았을 때 생명이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찾게 됩니다. 죽음을 알고 삶을 알면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인생 사용 설명서가 됩니다. 그 사용 설명서대로 인생이라는 제품, 삶이라는 제품을 바르게 쓰면 그 삶이 의미 있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삶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에노스의 죽음이라는 거울 앞에 서고, 그 죽음 앞에서는 여호와를 찾지 않을 수 없고, 참된 삶의 실체를 인생 사용 설명서를 통해 알아갈 수 있습니다.

 

이어령-이재철 ‘지성과 영성의 만남-삶과 가족’ 지상중계 중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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