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 5

2010.02.09 15:02

박진수 조회 수:936

비교종교학자이자 신화 연구가인 죠셉 캠벨은 모든 사람에게는 ‘성소(聖所)’, 즉 자신만의 성스러운 공간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성당과 교회와 절이 종교와 신자를 위한 것이라면 캠벨이 말하는 성소는 개인의 의식을 확장하고 조화로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공간입니다. 종교적 성소가 그렇듯이 개인적 성소 역시 “가령 돈이나 명성을 얻는 방식의 기능을 전혀 갖고 있지” 않습니다. 대신에 “자신의 모습을 거듭거듭 찾을 수 있는 장소”이자 “자기 삶을 움직이는 힘을 재발견”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이런 공간을 만들 때는 3가지가 중요합니다. 공간과 시간과 놀이 도구. 캠벨의 입을 빌리면 “성스러운 공간과 성스러운 시간과 즐거운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성소의 특성을 한 마디로 집약하면 ‘놀이터’입니다. 캠벨은 <신화와 인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 생각에 성스러운 공간을 고안하는 좋은 방법은 그것을 놀이터로 삼는 것이다. 여러분이 하고 있는 일이 마치 놀이 같다면, 여러분은 거기 열중하게 된다. (...) 여러분은 자신의 장난감을 마련해야 한다. 그것은 마땅한 일이다.”

 

성소는 놀이터입니다. 예를 들어 캠벨의 성소는 자신의 서재이고, 그의 장난감은 책과 글쓰기입니다. 그는 자신의 성소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글을 쓰기 위해 그 방에 들어가면, 나는 지금껏 길을 찾는 데 있어 도움을 받았던 책들에 둘러싸이게 되고, 문득문득 그 중에서도 유난히 통찰력이 있었던 작품들을 읽는 순간을 상기하게 된다. 글을 쓰기 위해 자리에 앉으면 나는 사소한 의례적 세부사항-즉 메모장은 어디에 두고, 연필은 어디에 두는 등-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만사를 내가 기억하는 이전의 모습과 똑 같이 만든다. 이 모두가 나를 해방시키는 일종의 ‘준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공간이 특정한 종류의 행위와 관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은 그 행위를 다시 한 번 환기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 행위는 곧 놀이다.”

 

성소에서 우리는 자아의 상실과 자아의 고양이 동일하게 느껴지는 어떤 순수한 황홀의 경험에 빠져듭니다. 이것은 무용가인 니진스키가 말한 ‘춤추는 자가 사라지고 오직 춤만 남는 순간’이고, 피카소의 말처럼 ‘위대한 피카소가 사라지고 단지 그림만 남는’ 경험입니다.

 

성소는 어떤 리듬입니다. 이 리듬 속에서 내면은 조화를 얻고, 놀이와 공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리듬에 맞춰 춤추는 걸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욕망과 두려움입니다. 이에 대해 캠벨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런 조화로운 리듬을 막는 두 가지 운동은 붓다의 두 가지 시험과 정확히 일치한다. 하나는 욕망으로 여러분이 대상을 소유하게 만들며, 또 하나는 혐오 또는 두려움으로 여러분이 그 대상으로부터 돌아서게 만든다.”

 

여기에 저는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바로 ‘의무’입니다. 의무는 놀이를 일로 만들고, 사람을 조급하고 지루하게 만듭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얼른 이걸 해치우자, 그게 최선이다’라고 생각합니다. 놀이는 사라지고 남은 건 노역입니다.

 

욕망과 두려움과 의무가 어떻게 성소를 망치는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성소에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는 바랍니다. ‘뭔가 대단한 걸 쓰고 말거야!’ 그러면 그런 글은 좀처럼 나오지 않습니다. 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그렇지 내 주제에 글은 무슨...’ 이런 생각은 글쓰기를 걱정덩어리로 만듭니다. 혹은 ‘아, 오늘까지 두 꼭지를 꼭 써야 하는데’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마음은 성스러운 공간을 평범한 공간으로 되돌려 버립니다. 우리의 일상을 생각해보세요. 거기에는 온갖 바람과 걱정과 의무감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은가요? 성소에서만큼은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성소에서의 놀이가 시작됩니다. 점수판에 신경 쓰고 승패에 매이는 운동선수는 경기를 망칩니다. 반대로 승패가 아닌 경기에 집중하고 점수가 아닌 플레이를 즐기는 선수가 절정의 경기력을 보여줍니다.

 

저는 손에서 글이 쏟아져 나와 글이 글을 이끄는 경험을 종종 합니다. 이런 경험은 정말이지 황홀합니다. 이때 제게는 아무런 바람도 걱정도 의무도 없습니다. 사실 글을 쓰는 사람은 제가 아닙니다. ‘나’는 글이 나오는 통로일 뿐입니다. 제 경험으로는 이렇게 쓴 글이 최고입니다.

 

여러분은 자신만의 성스러운 공간과 놀이 수단을 가지고 있나요?

그곳에서 여러분은 ‘살아 있음’을 경험하고 있나요?

 

* 오늘 소개한 책 : 조지프 캠벨 저, 다이엔 K. 오스본 엮음, 박중서 역,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2009년

 

* 오늘 제가 말이 많았습니다. 죠셉 캠벨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이렇습니다. <신화와 인생>을 읽으며 가슴이 뛰었고, 캠벨이 언급한 사람들의 책을 찾아 읽었습니다. 이 책은 저로 하여금 생각으로만 머물던 것을 행동하게 만들고, 뭔가를 쓰게 만들었습니다. 앞의 문장들을 수동형으로 쓴 것은, 이 책이 제게 하나의 계시였고 저는 그것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출처 <구본형의 변화연구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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