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다라 지방에 귀신들린 자 둘은 몹시 사나워 아무도 그 둘이 있는 길로는 지나갈 수 없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무섭고 불편했을텐데도 그저 피해다니며 살고 있는것이다.

 

SOS라는 TV프로그램이 생각난다.

한 동네에 알코올 중독자의 횡포나 폭력행사자의 만행을 그저 무서워하고 피하거나

욕하며 사는 모습이 생생하고 방영되었다.

그들 대부분은 상처때문에 스스로 소외됨을 택했고 사회속에서 고립되어 모두를 적대시하였다.

 

이와 비슷한 상태의 사람들을 다룬 다른 방송사에서 엑소시스터라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는데

빙의된 사람을 무당이 궂을 하면서 귀신을 대하는 모습이 나왔다.

귀신은 자기거처된 존재를 시시때때로 죽이려하고 사람들에게서 고립시키고 해하려 하여

차마 눈뜨고 볼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었다.

무당은 의뢰인에게서 돈을 받고 귀신에게 사정사정해서 달래고 얼르며 한을 풀어주고

그 사람에게서 나가게 하는 것을 보았다.

무당의 귀신과 의뢰인의 귀신은 동급이고 동류여서 사정을 봐 준 것에 불과한 것이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의 권세앞에 떨며 사정하는 귀신을 볼 수 있고 세 부류의 사람을 본다.

1. 귀신 들린 자

2. 돼지 치는 자

3. 온 시내의 사람들

이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1. 귀신 들린 자는 예수님과 상관이 없기를 바란다.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괴로워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거처를 옮겨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결국 바다에 들어가 몰사한다.

돼지떼도 귀신과 사느니 죽음을 택한 것 같다.

예수님과 상관이 없기를 바라거나 괴로와하면서도 살기를 바라는것은 돼지만도 못한 생명이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2. 돼지 치는 자는 자기가 치던 돼지가 귀신들려 바다에 뛰어들어 죽었으니 돼지 주인에게 얼마나 면목이 없었겠는가?

그들은 예수님이나 귀신은 보지 못한 채 오직 돼지만 본 것이다.

시내에 달려나가서 그들이 뭐라고 말했을까?

귀신마져도 무서워 떨던 예수님의 존재를 그들은 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저 돼지떼에 귀신이 들려 돼지떼가 죽은 것만을 전하였을 것이다.

돼지 치는 자는 돼지 밖에 보지못했다.

물질에만 한정된 시각을 가진 것이다.

물질의 득실에만 몰두하는 시선으로는 예수님은 물론 귀신도 보지 못한다.

나에게 돈 되는 일 좀 하라는 어떤 사람의 불쌍한 농담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3. 온 시내 사람들은 어떠한가?

귀신들린자 때문에 가지 못한 길은 슬슬 도망다니고 피해다니면서 귀신이 쫓겨나 죽은 것을 고마와 하기는 커녕

귀신을 쫓아낸 예수님에게 떠나가달라고 한다.

그들은 잃은 돼지떼를 귀신보다 두려워하는 모습이다.

예수님을 만나려고 가서 본 목적이 귀신과 살아도 좋으니 그들에게 소중한 물질과 살게 떠나달라는 간구아닌가!

돼지도 귀신과 살기 싫어 바다에 뛰어들었는데 , 더러운 것이 더러운 줄 모르는 눈뜬 소경아닌가...

 

말씀만 하셔도 집에 있는 하인이 낫겠다고 말한 큰 믿음의 이방인 백부장보다도

제 것을 버리고 좇는 작은 믿음의 제자들과 다니셨던 예수님...

꾸짖으셨을지언정 만물을 다스려주시고 그들을 두려움에서 건지신 예수님...

모든 사람들에게 기피의 대상이었을 두 사람에게서 귀신을 내어쫓아주시고도

재산 상실(몰사한 돼지떼) 때문에 배척당했던 예수님...

귀신 만도 못한 , 돼지떼만도 못한 사람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구원받지 못했다면 어쩔 뻔 했습니까?

귀신만도 못한... 돼지만도 못한... 존재로 살 뻔하지 않았습니까?

구원받아 거듭남으로써 새롭게 되었으니 이왕이면

이만한 믿음을 보지못하였다고 기뻐하실 예수님의 칭찬을 받고 싶습니다.

 

온전한 인격의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하루하루 그 분의 향기를 맡으며,

 어느 때고 말씀앞에 순복하는 아름다운 순종의 모습으로 살기를 오늘도 간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