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방백들을 사용하여 예레미야를 공격하신 이유?

두 번째, 구스인 왕궁 환관을 사용하여 예레미야를 살리신 이유?

왜 하나님은 한번에 다 모든 것을 정상으로 만드실 수 있는데 그러하지 아니한 이유는?


예루살렘에 있어서 현재의 상태는 방백들(조정 대신)이 정권을 좌지 우지 하며

왕에게 권한을 주지 않는 상황이었다. 이에 시드기야는 우유부단함을 보여주는 왕으로 비추인다.

방백들은 바벨론 파가 아닌 애굽파였다.

이런 와중에 예레미야는 구덩이에 투옥되어 죽기를 기다리듯 보인다.

어느것 하나 하나님의 말씀처럼 눈에 보여지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말을 잘못하였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하는 상황이었다.

예레미야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을 가지고

그 입술을 통해 증거하는 과감함 순종함을 보여주었다.

예레미야가 본 것은 무엇인가?

그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무엇을 보았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그 순간에 바로 예레미야가 죽어가는 그 순간에

(사람이감당할시험밖에는너희가당한것이없나니오직하나님은미쁘사너희가감당하지못할시험당함을허락하지아니하시고시험당할즈음에또한피할길을내사너희로능히감당하게하시느니라) 고전 10:13

구원의 밧줄을 내려주십니다. 기적을 발하여서(구스인 왕궁 환관) 말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만한 시험이 끝나는 순간 하나님께서 행하십니다.

또한, 그 이상의 시험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나에게 해당하는 시험의 한계는 어디일까요!

주변사람에게 쉽게 화내고, 짜증내고, 게으름들이

그 한계성을 알게 하시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솔직히 그러한 상황이라면 두려울 것 같으며,

어찌 행동했을까 하는 자포자기도 나왔을 법합니다.

 

 

지금은 2010년 경기도 고양시 일산입니다.

이곳에서도 예레미야에게 하신 말씀처럼 이야기 하고 계시다면,

내가 예레미야라면, 혹 내가 방백들일 수 도 있다면,

혹, 내가 구스인 왕궁 환관이라면,

결과는 예레미야가 구출되어 하나님의 뜻이 맞다는 것을 확인하는 일만 남을 것입니다.

나는 예레미야를 리더로 보고 있습니다.

불평불만으로 이간질하는 것이 아닌 왕궁 환관을 통해

긴급한 순간에 도구로 사용되어질수 있도록 소망합니다.

두려움, 게으름, 불편함, 자아, 하나님 명령 앞에선 아무 의미 없음을 생각합니다.

조금씩 더 하나님과 교제권을 회복하는 하루이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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