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은 것 안에는 이미 나눌 것들이 들어있다(삼하1:17-27)

 

 

1. 애가

 

다윗이 애가를 부른다.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사울은 다윗을 원수처럼 생각했고

하나님도 사울과 원수였었는데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 다윗이 사울을 위해 

애가를 지어 부른다.

 

 

이것이 우리나라 얘기 였다면 

과연 애가를 부를 수 있었을까?

우리나라 교회사에도 이런 애가가 있겠지?

부러워서 하는 말이다.

 

 

2. 애가가 아니다

 

다윗의 노래는 애가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내용은 애가라기 보다는 묻어가에 가깝다.

 

 

묻어가는 요나단에게 묻어가는 노래라는 의미이다.

묻어가는 요나단이 죽지 않고 사울만 죽었으면

불렀을까? 하는 의심이 들 것 같은 노래이다.

 

 

그 이유가 제목이 일단 '활의 노래' 이다.

활은 다윗이 요나단과 헤어질 때 활을 쏘았던 것을

그 모습을 기억하는 것으로 생각된다.(삼상20장)

 

 

그리고 용맹함을 말할 때는 사울과 요나단을 동시에

말하고 있지만

사울을 위한 울음은 이스라엘의 딸들에게 맡기고

요나단을 위해서는 자신이 직접 울고 있다는 것이다.

 

(24)이스라엘의 딸들아, 사울을 위해 울라. 그는 너희를 자줏빛 

좋은 옷으로 입혔고 너희 겉옷을 금장식으로 꾸며 주지 않았느냐?

(26)내 형제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두고 슬퍼하니 그대는 

내게 진정한 친구였기 때문이오. 

나를 향한 그대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 더욱 큰 것이었소.

 

 

3. 묻어가지말고 주는 삶

 

요즘 금수저의 기준은 

부모에게는 묻어가고 부모는 책임지지 않는 

그런 인생을 말한다고 한다.

그리고 사울처럼 자식에게 묻어가는 아비를 둔 아들은

흙수저에 속한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부모에게 묻어가는 자식은 있지만

자식에게 묻어가는 부모는 좀 아닌 것 같다.

(예외인 경우도 있다)

 

 

주지 못해서 안달이 난 상태를 살아가는 사람이

부모가 아닌가 싶다.

자식을 죽여서라도 구원을 주고 싶어하시는

하나님처럼 말이다.

 

 

예수의 은혜를 받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은혜를 받고나니 삶의 목적이 받는 것에서 

주는 것으로 변했다.

 

 

물론 없는데도 주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 풍성한 것을 주는 것이고

받은 것을 주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이고

예수를 받은 나의 삶의 목적은

예수를 주는 삶으로 변해가는 중이다.

 

 

예수를 받고는 비극에서 희극으로 바뀐 나의 삶이기에

나 역시 희극을 나눠 주면서 살고 싶다.

 

 

받은 것이 너무나 많아서 안 나눌 수가 없다.

받은 것이 너무나 소중해서 나만 가질 수가 없다.

받은 것 안에는 이미 나눌 것들이 들어있는 것 같다.

그래서 오늘도 받은 것 나눈다.

(2023. 04. 11.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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