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치려드는 것과 가르치는 것(욥37:14~24)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가르치려 들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가르쳐야 한다.

당신이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예수님께서 직접 명령 하셨기 때문이다.

 

(마28:20)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잘 가르칠 수 있을까?

 

 

1. 가르치려 들지 않으면

 

가르치되 가르치려 들지 않으면 된다.

가르침 속에서 자신을 꾸미며 단장하고 있는

가르치려드는 그 마음을 떼어내면 된다.

 

 

엘리후는 욥이 모르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지식을 드러내며 가르치려 하고 있다.

 

(15)하나님께서 언제 구름을 움직이시고 그 번갯불을 내시는지 압니까?

(16)구름이 어떻게 공중에 잘 매달려 있는지, 지식이 완전하신 분의 

이런 기이한 일들을 알기나 합니까?

 

 

가르침은 모르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지만

가르치려드는 것은 잘난 척 하는 것이다.

가르치려드는 것은 가르치는 사람은 잘 몰라도 

가름침을 받는 사람은 알 수 있다.

 

 

2. 끝까지 해야

 

가르침을 받는 대상자도 가르치려드는지 알 수 있지만

가르치는 사람도 그것을 알 수 있다.

 

 

가르침과 가르치려드는 마음 사이에 공간이 있는데

그곳에 오해라는 마음이 산다.

자신은 분명 가르치는 것일 뿐인데

가르치려들지 말라는 말을 듣게되는 것이 그것이다. 

 

 

오해는 핵 분열과 같다.

처음엔 거대한 힘이 있지만 반감기가 있다.

시간이 지나면 힘이 약해진다는 말이다.

 

 

힘이 약해지지 않고, 오해가 이해로 바뀌지 않아도 

진실은 끝까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오해받는 다고 멈추면 가르치는 것이 아니었고

가르치려드는 것이었다는 것이 증명이 된다. 

 

 

끝까지 할려면 가르치고 

오해나 다른 여러가지 이물질 때문에 중간에 포기하려면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3. 먹으면서 해야

 

오래하는 방법은 먹으면서 하는 것이다.

예수를 먹는 것인데 그것도 잘 먹어야 한다.

먹지 않은 것을 가르치니까 끝까지 못한다.

먹고 소화시키지도 못한 것을 가르치니까 가르치려드는 것이다.

 

 

엘리후는 하나님은 능력이 전능하신 분이니까 

우리가 그 분께 나아갈 수 없다고 한다.

 

(23)우리는 능력이 크신 전능하신 분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분의 심판이나 무한한 공의는 왜곡될 수 없습니다.

 

 

얼핏보면 그럴 듯한 말이며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말 같아보이지만 참 무식한 말이다.

능력은 힘이 아니라 따뜻함이라는 것은 이솝우화에도 나온다.

 

 

하나님의 능력이 크시기에 우리가 나아가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사람에게 오신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말씀을 먹지 않으니까, 말씀을 소화시키지 못하니까

엘리후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는 것 아닐까?

 

 

코로나19가 교회의 예배를 중단시키리라고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코로나19가 교회의 진면목을 드러냈다.

교회가 말씀은 전파하지 않고 바이러스를 전파한다고 한다.

코로나19가 이제 어쩔래? 하면서 교회에 질문을 던지고 있다.

 

 

어쩌긴 계속해야지!

만나지 못하면 온라인으로 하면 되고

듣지 못하면 직접 듣고 먹으면 되지.

먹으면서 가르칠 것이고 나부터 가르칠 것이다.

 

 

혹시 고난으로 욥을 시험하신 것처럼

코로나19로 교회를 시험하시는 것은 아닐까? 

 

 

이 참에 진짜만 남았으면 좋겠다.

가르치려드는 마음은 나자빠지고 가르치는 마음만 살아남게...

(2021. 12. 20.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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