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역자의 기준

2018.07.14 06:47

박상형 조회 수: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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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역자의 기준(행16:1~10)



오늘 바울의 전도여정에 두 명의 동역자가

합류를 한다.



디모데와 누가.



디모데의 합류(선택)는 다소 요란하게 소개되지만 

반면에 누가의 합류는 아주 조용하게

기록되고 있다.



(10)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사도행전을 쓴 누가가 우리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디모데의 합류만 눈여겨본다면 우리는 여전히 

동역자의 합류에 대한 기준을 찾아다닐 것이다.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외조모때부터 믿음 생활을 한 뿌리깊은 

가문이다. 라는 등



그것이 필요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없이도 살짝 전도여행에 합류한

누가도 있음을 보았느냐는 것이다.



동역자는 너무나 중요하다.

그러나 동역자의 기준을 함부로 정하는 것은

안되는 일이다.

기준이 있었다면 누가도 기록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동역자의 기준을 어떻게 정했을까?

훈련받은 자?

디모데는 아직 훈련을 받지 않은 사람이었다.



디모데에게는 헬라사람인 아버지 때문에

할례를 행했지만

이방인인 누가에게 할례를 행했다는 말은 없다.



디모데는 동역자이고 누가는 아니였을까?

그럼 나중 누가에 의해 기록된 누가복음이나 

사도행전이라는 책이 존재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디모데도 동역자이고 누가도 동역자이다.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행하고 합류를 시켰지만

누가에게는 그런 기록이 없다.

준비된 자, 완벽한 자를 동역자로 택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바울 역시 완벽하지 않았다.

바나바와 마가 문제로 심하게 다투었고

할례 그 자체로는 신앙상 아무 의미도 없다고

갈라디아서에서 주장한 그가(갈5:6, 6:15)

유대사람들의 눈이 두려워 할례를 행했다.



복음의 길은 완벽히 준비하고 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완벽히 준비하면 하나님이 하실 일이 없다.



가면서 시정하고, 가면서 배우고

못 본 것은 가다가 발견하면 되는 일이다.



성령님이 바울의 길을 막으셨다.

그리고 한 밤중에는 와서 도와달라는

마케도니아 사람의 환상까지 보여주신다.



하나님의 일로 가는 것이 분명하다면

하나님이 길을 보여주신다.

하나님의 일로 가는 것이 분명하다면

사람의 길을 막으신다.



그러므로 이 길은 빨리가야할 길이 아니다.

빨리 성장해서 빨리 커지고 하는

그런 길이 아니라 잘 듣고 가야할 길이다.



가다가 막힌 길을 아는 것이 필요하고

와서 도와달라는 것을 듣는 귀가 필요하다.



천천히 가지 않고는 알 수 없고

천천히 가지 않고는 들을 수 없다.

천천히 가도 하나님이 인도하시면

더 정확히 더 빠르게 갈 수 있다.



선교단체의 중간리더인 나는

숫자의 필요성보다 은혜를 강조한 탓에

사람의 관계보다 말씀을 강조한 탓에

전 대표님의 눈 밖에 났었다.



지금도 숫자보다는 은혜다.

지금도 관계보다는 말씀이다.

천천히 가는 것에, 적은 숫자로 가는 것이

점점 자유로워지고 있다.

지금은 섭섭하지 않다.



말씀이 은혜로 와 주시는 한 나는 계속 

자유로워 지지 않을까 싶다.

(2018. 07. 14.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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