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철 목사는…> 

이재철 목사는 1949년 부산에서 태어나 한국외대 프랑스어과를 졸업했다. 1974년 홍성통상주식회사를 설립해 사업을 해 청년실업가로 활약했다.
 삶에 비관한 아내의 일기장을 보고 회심해 1985는 36세의 나이로 장신대 신학대학원에 입학했고, 1988년 주님의교회를 개척했다. 그는 개척 초기의 약속대로 10년 임기가 끝나자 사임하고 자원해 총회 파송선교사로 스위스 제네바한인교회에서 3년간 머물며 한인교인들을 상대로 목회했다.
 
2001년 귀국해 집필에 전념하다가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의 부름을 받아 2005년 7월 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 담임목회자로 있다. 저서로는 <매듭짓기>, <인간의 일생>, <내게 있는 것>, <참으로 신실하게>, <새신자반>, <성숙자반>, <비전의 사람>, <청년아, 울더라도 뿌려야 한다>, <믿음의 글들, 나의 고백>, <아이에게 배우는 아빠>, <회복의 목회>, <회복의 신앙>, <요한과 더불어>, <사도행전 속으로 1>, 사도행전 속으로 2> 등이 있다.
  
  
다음은 일문일답이다.
-주일날 설교할 원고지 50~60매를 설교 전까지 모두 외운다고 들었다. 어떻게 그렇게 기억력이 좋은가.
 “사람이 못났으니까 외운다. 기억력이 좋아서가 아니라 못나서 노력하는 거다.”
-젊어서 돈도 많이 벌어보게 하고, 이렇게 목회도 잘하게 하고, 특정한 사람에게만 능력을 밀어주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공평한 분은 아니지 않은가.
 “(웃음) 그렇지 않다. 저는 없는 것 투성이다. 능력이 없어서 사업에도 실패하고 곤두박질 쳤다. 저는 무능력한 사람인데 보이지 않는 그 분이 제 삶을 주관해주었다. 그야말로 하나님 은혜로 사는거다.”
 

15살에 아버지 돌아가시자 “내가 가장이구나” 생각
 
-일찍부터 사업에 눈을 떴는데, 그런 감각을 키워준 분이 주위에 있었는가.
 “아버지가 사업을 했다. 사업도 하고, 문필활동도 했다. 아버지의 좋은 자산이 그대로 이어졌으면 좀 더 괜찮아졌을텐데, 일부분만 이어졌다. 아버지는 내가 15살 때 돌아가셨다. 누님 5명에 형님 1명을 위로 둔 막내로 태어났다. 형님이 어릴 때 돌아가셔 얼굴도 기억나지 않으므로 내가 외아들인 셈이다. 15살 때 아버님이 고혈압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날 밤 생각한 것이 이제 내가 가장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누님 셋은 출가했고, 셋은 출가하기 전이었다. 누님이나 어머니도 내 호적에 등재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일찍 별세한 것이 책임감을 키우는 계기가 되었나.
 “아버지가 오래 살았다면 나도 모르게 의타적인 사람이 됐을 것이다.  그런 것도 ‘그 분’의 섭리로 느껴진다. 늘 감사하게 여긴다. 상반된 두 마음이 있었다. 내가 어려울 때 아버지가 있었으면 버팀목이 되고, 길잡이가 됐을텐데하는 마음과 함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내가 일찍 자립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었다.”
 

청년 때 사업도 그분에 의해 이루어진 일
 
-어떻게 일찍부터 사업을 벌일 용기가 났나.
 “사업을 벌였다기보다는 그런 여건이 주어졌다. 제 인생을 돌아보면 제가 의지를 가지고 하려고 한 일은 된 일이 없고, 모두가 되어진 일이다. 그 분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다. 사업도 마찬가지다. 사업 시작할 때가 20대 중반인데, 제 의지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제가 상황을 끌고 갔다기보다는 그 상황이 주어졌다. 제가 외아들이니까 병무용어로 ‘부선망2대독자’다. 그래서 군을 면제해준다. 병역법 41조2항이다. 그런데 면제확정은 만30세에 된다. 대학 졸업하던 해 언론사에도 시험쳤는데, 마지막에 다 떨어졌다. 모든 조건이 군필자여야됐기 때문이다. 나중엔 군에 가겠다고 자원했더니 방위해라해서 방위를 마치고 제대했다.
 

1972년부터 외국인회사서 해외 밥먹듯 다녀
 
대학 마치고 유태인회사인 아이젠버그에 들어갔다. 그곳은 화란항공사인 KLM의 한국대리점 역할을 했는데, 그곳에서 외대 사무처장에게 학생 한명 추천해달라고 의뢰가 갔는데, 사무처장이 화란은 프랑스가 가까우니 프랑스어가 필요할 것이라고 나를 추천했다. 막상 시험 치르러 가보니, 영어하는 사람을 뽑았다. 각 대학의 영어과 학생들이 와있어서 나는 합격 기대도 안했다. 그런데 지점장이 마지막 인터뷰를 하는데, 영어로 물으면 자꾸 프랑스말로 대답이 나왔다. 그래서 지점장은 이 학생은 영어도 되고, 프랑스어도 된다고 생각하고 나를 뽑은 것 같다. 외국회사에서 직장생활하면서 외국과 비즈니스 하는 회사를 만들수 있었다. 그것은 대학 사무처장의 실수로 된 일이었다. 내가 만들려고 한다고 주어질 수 없었다. 그 인생의 연장선상에서 내가 있는 것이다. 71년 2월이 대학졸업인데 70년 10월부터 일을 했다. 72년부터는 해외연수를 다녔다. 대한민국 외무부 공무원을 제외하고, 국가에서 일 보내고, 취업시키는 기관 빼고 민간인에게는 한달에 300명에게만 여권을 주던 때다. 그 당시엔 누가 외국에 여행하면 목사님부터 친척까지 공항에 가서 꽃다발을 주던 때다. 그런데 해외에 밥먹듯이 다니면서 20대 때 다른 세상을 보게 됐다.”
 

과도한 재물이 방탕한 생활 부르던 1984년 신학대학 ‘결심’
 
-뒤늦게 신학대학 가서 목회까지 할 의사가 있었나.
 “그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내가 사업을 하려면 교통부 장관이 면허를 줘야했다. 경쟁상대가 대단한 기업인들이었다. 내 나름대로 하나님께 면허주시고, 사업 하게 해주시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기도했는데, 막상 주체할 수 없는 돈이 주어졌는데, 한거라곤 방탕하는 거 밖에 없었다. 인생 철학이 없는 젊은이에게 과도하게 주어진 재물은 독약일 뿐이다. 1984년 주님을 뵙고, 신학대학 가겠다고 한 것은 저처럼 의지가 약한 사람이 주님을 만난 경험에서만 그치면 다시 옛날 삶으로 돌아갈 것 같아서였다. 옛삶이 잘못된 것을 깨달으면 제 정황을 바꿔야하지않겠느냐 생각했다.”

-방탕한 생활 속에서 만나던 친구들이 있고, 입에 익은 술이 있는데, 그렇게 단칼에 옛습관이 끊어졌는가.
 “36년 동안 제 욕망이 원하는 길을 걸어갔었다. 어릴 때부터 모태신앙이어서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중 삶은 엉망이니만큼 주일에는 더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했다. 주중의 삶은 내 의지로 끊지는 못하지만 참 기쁨이나 의미가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버리고 싶었지만 내 의지로는 버려지지가 않았다. 그 후 무엇이 가치있고, 무엇이 의미있고, 무엇을 잡고, 무엇을 버려야하는지를 알게 된 분기점이 있었고 새롭게 선택한 길이 더욱 소중했다. 제 결단만으로 했다면 옛길에 대한 미련이 있을 것이지만, 저를 찾아와주신 그분으로 인해 제가 가야 할 길을 아니, 옛길은 무의미했다. 어린 아이들이 소꿉장난 할 때 구리반지를 금반지라고 끼지 않은가. 그러나 그 소녀가 커서 남자친구에게 금반지를 받으면 구리반지는 더 이상 끼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다마스쿠스를 가다가 임하신 그 분을 의지해서 돌아섰다. 제게 임해주신 그 분으로 인해서 그 모든 것이 아무 의미 없는 휴지처럼 보여 어떤 미련도 없이 버릴 수 있었다.”
 

교인 입장서 “해야 할 것” 생각…예배당 안 짓는 원칙 세워
 
-목회하면서 예배당을 짓지않는다거나 미리 예산을 세워 헌금을 강요하지않는다는 등의 교회 운영 방침을 세운 어떤 계기가 있었나.
 “길을 걸어갈 때, 내가 오늘 서울역 가야지 해서 내가 걸어가지만, 오늘의 내가 아니고, 나의 오랜 날들이 합쳐진 내가 가는 것이다. 목회를 하지 않고 신학교를 갔음에도 불구하고 목회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주어졌을 때 왜 그분이 나에게 목회를 시키시는가. 나에게만 그 분이 요구하는 게 뭔가. 신학교 들어가기 전에 교회에 가서 교인으로서 교회와 교직자들에 대해 무엇을 느꼈던가를 생각했다. 25살에 교회 집사가 됐다. 십년 이상 집사로서 교회를 다니면서 교회는 이런 걸 하면 안되는데, 교회는 이렇게 해야 하는 데 하며 교인 입장에서 느꼈던 것들이 있었다. 교인의 입장에서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하지 말자,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하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며느리가 시어머니 욕하면서 배운다고 하지 않은가. 또 자신이 그 위치에 올라서면 다 통념이라는 이유로 받아들여 군림하고, 내 한몸 사리사욕을 채우는 게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 아닌가. 어떻게 초심을 이 나이가 되도록 실행에 옮길 수 있었나.
 “그 분과 저와의 관계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인생에서 제가 계획하고 이룬 일이 많다면 기존의 길에서 약간 첨삭만 하면서 갔을 것이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 전부 되어진 일 밖에 없었다. 되어지게 한 그 분이 주님이시다. 그것을 확인하고는 내가 있을 수가 없다. 나를 살려주신 그 분이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니 내 개인의 생각은 부질없어졌다. 성경을 읽어보니, 교회는 이렇게 해야 돼. 이렇게 하지말아야 돼 그것을 알려줬다.”
 

‘편식’ 막기 위해 성서 순서대로 설교
 
-이럴 때 늘 궁금해지는 것은 왜 같은 성경 구절을 읽고도 그렇게 해석과 생각과 행동이 다르냐는 것이다. 더구나 자기에게 특별히 영감을 주는 구절이 있고, 선호하는 구절이 있을 텐데 편식을 막기 위해 성서를 빠짐없이 순서대로 예배시간에 설교하다니, 독특하다.
 “하다보니 그것도 다 은혜가 된다. 큰 철학이 있다기보다는 상황이 주어지고, 그 상황에 순종하면서 이렇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 저를 버리고 가다보면 이 길이 맞았구나 확증시켜주고, 그래서 소신껏 걸어갈 수 있었다.”
 

집 없지만 보이지 않는 그분이 ‘노후대책’
 
-개인 집도 없이 산다고 들었다. 사업적 능력이 탁월해서 언제든 만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한국인 중장년의 화두는 노후대책이다. 현대는 불안의 시대다. 불안하니 노후 대책이 필수적이라고 여긴다. 그런데 집도 없고, 아무런 대책 없이 노후를 맞는 것이 불안하지않는가.
 “믿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인데, 오늘날은 있는 것만 믿으면서 믿음이 붕괴됐다. 노후대책은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그 분을 믿는 것이 아니다. 젊은이들에게 ‘우리 각자는 소명대로 사는 것’이라고 말해준다. 모든 사람이 나처럼 살 수는 없다. 하지만 나는 소명대로 산다. 예수님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뭔가를 이루게 해주면 그 때 믿겠다고 한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고 거래다. 하나님은 거래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원한다. 저와 제 처에게 주어진 소명이 같다. 노후대책이 없어도 오늘까지 지켜준 그 분이 내일도 나를 책임져줄 것이라고 믿는다. 스위스 라브리공동체의 창시자 에디트 쉐프 부부는 2차대전이 끝나고 눈에 보이는 것들이 하나님을 대체하자, 알프스 산자락에 나무 별장 한채를 구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기만 해도, 엘리야에게 까마귀를 보내 먹이신 것을 보여준 하나님의 영광을 증명하기 위해 살자고 했다. 그들은 외딴 집으로 들어갔지만 죽을 때까지 한끼도 안굶었다. 유럽에 그들이 있었다면 아시아에는 토레이(대천덕) 신부 부부가 있었다. 그들이 공동체를 시작한 시기가 비슷했다. 쉐프 박사는 최고 잘사는 나라 스위스에서 시작했다면 토레이신부는 못사는 한국에서도 최고 오지에서 시작했다. 당시 강원도 황지는 오지 중의 오지였다. 기차역에서 세시간 걸어 들어간 곳이다. 토레이 신부가 더 귀한 길을 간 것이다. 그게 믿음이다.”
 

진리의 푯대 쫓아야 인생이 허물어지지 않아
 
-100주년기념교회엔 젊은이들이 많이 온다. 젊은들에게 어떤 ‘삶의 가치’를 전해주는가.
=인생은 시계 초침이다. 거창한 것도 아니고, 죽음이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초침 일초 일초가 쌓이면 하루가 가고, 하루가 쌓이면 한달이 가고, 그게 일생이 된다. 사람들은 일생하면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일초는 우습게 여긴다. 일초를 허비하고, 일생이 소중해질 수 없다. 에베소서 5장16절에 ‘세월을 아끼라’는 말이 있는데, 짧은 시간에 많은 일을 효율적으로 하라는 말이 아니다. ‘엑사고라소’라는 말은 ‘건져올리다’, ‘시간을 건져올려라’는 말이다. 하루에 똑같이 24시간이 스쳐 지나가는데, 오늘도 물거품처럼 날린 사람도 있지만, 그것을 건져올리라는 것이다. 그것을 건져올리는 잣대는 진리 밖에 없다. 진리의 푯대를 쫓아가면 인생이 허물어지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코끝의 호흡이 멈출 때 후회하게 된다.”
-자녀가 몇인가.
 “아들만 넷이다.  내 처가 아이들을 사랑해줘서 감사하다. 요즘은 여자가 아이를 안낳겠다고 하면 못낳는 것 아니냐.”
-집도 재산도 갖지않고, 자식들에게 물려줄 것도 없으니, 자식들이 불안해 하지 않은가.
 “아들들에게 말했다. 세상이 말하는 유산이란 없다. 인생길은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 어려서부터 자율과 자립을 강조했다. 스스로 결정하고, 가봐야 한다. 실패를 절대 두려워하지 마라. 실패해야 자기 길을 찾는다. 저처럼 수렁에 빠진 사람도 건져줬는데, 그 아이들이 한 순간 실패의 늪에 빠질 수도 있고, 허우적거릴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또한 재산이 되리라 믿는다.”
-국회에서 기독교 여성들을 모아놓고, 자기 자식들만 잘되라고 기도하고, 밖에선 부동산 투기나 한다고 질타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것이 불안한 현대인들 아닌가. 자신이 불안하니 내 자식이라도 덜 불안하라고 안전망을 쳐주기 위해서 죽자살자 외고에 자사고에, 명문대에 보내려고 혈안이 돼 있는 것 아닌가.
 “사람들이 두가지를 착각한다. 자기 시대가 도덕적이나 윤리적으로 붕괘돼 있고, 자기 시대가 과학이 가장 발달돼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이 사회의 병리현상은 오늘날만이 아니라 처음부터 있는 것이다. 그것을 거슬러가느냐, 편승하느냐, 그 차이다. 인생이 달게 끝나느냐. 쓰게 끝나느냐, 그거다. 눈에 보이는 안전장치를 다 쳤는데 그 속에 행복에 있는가, 사랑이 있는가. 보이는 것에 영원한 가치가 있느냐 따져보면 아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것에 따라 삶의 결과가 달라진다.”
 

쪽방 같은 곳에서 외로운 삶 살아가는 현대인 가슴아파
 
-핀란드가 보기엔 교육천국이고, 안전망을 잘 갖춰놓은 듯 보이지만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고, 대부분이 1인 가정으로 외로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얘기한 적이 있지 않나. 유럽인들이 불행하다고 보는가.
 “이번에 베를린의 한인교회 연합집회가 있어서 갔는데, 숙소가 호텔이 아니고, 가정집이었다. 유럽에 가봤으면 알겠지만, 유럽의 집은 반드시 창문 밖에 셔터를 내린다. 그러면 해가 떠도 캄캄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커튼을 쳐도 빛이 들어오는데, 유럽은 바깥 세상과는 완전히 단절된다. 많은 이들이 홀로 가정을 이루고 사는데, 셔터를 내리고 골방 같은 데 있으면 밤에 뭘 느낄까. 카페나 햄버거 집에 가면 마주 앉는 테이블이 아니고, 혼자 벽보고 먹는다든가. 유리창보고 먹는다. 이렇게 살다가 인생이 끝나면 자기 인생에 대해 뭘 느낄까.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목회자인 토니 캄플로가 ‘사람이 죽는 순간에 자기가 못다 이룬 업적을 후회하는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은 죽기 전 바르게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했다. 목회하면서 장례식 수없이 치르고, 임종을 지켜봤는데, ‘내가 투자를 더했으면 더 부자가 됐을텐데, 그 때 줄타기 잘했으면 장관 한 자리 했을텐데’라고 그것을 후회하는 사람은 보지못했다. ‘해야될 것을 못한 것, 하지말아야 될 것을 한 것, 그것을 후회한다. 토지 캄플로는 ‘인간은 죽음이 자기를 덮치는 순간에 딴 세상이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에 그런다고 했다. 독일에서 쪽방 같은 곳에서 셔터를 내리고 어느날 비수처럼 죽음이 찾아왔을 때 어떻게 생을 마감할지 가슴이 아프다.”
 
-지난 며칠 동안 연평도 폭격훈련으로 인한 전쟁공포로  떨고 있었는데, 목사님은 안전지대에 있었다.(웃음) 이 상황을 어떻게 보나.
=독일에 가 있을 때 교민들 중에 자식들이 서울에 유학하는 사람도 있고, 서울에 사업 때문에 출장가야 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그분들도 전쟁을 겁냈다. 누군가가 비슷하게 쓰긴 했던데, 전쟁은 난다 안난다 속단할 수는 없다. 사소한 우발적인 것이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가진 게 많은 사람은 전쟁을 무서워한다. 한반도에서 누가 가장 부자인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다. 북한 땅이 혼자 것이다. 2천만이 자기 노예 아닌가. 흔히 북한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기층민은 이렇게 살 바에야 전쟁이라도 하자는 생각도 하겠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전쟁이 나면 모든 것을 잃는다.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 쉽기도 하지만, 일어나는 게 어렵기도 하다. 교회와 정부는 역할 자체가 틀리다. 어떤 상황에서든 모든 종교를 포함해서, 종교는 종교가 구현하고자 하는 사랑을 구현하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국가는 안보의 경계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교회가 정부의 역할을 대신해서도 안되고, 정부가 교회의 역할을 대신해서도 안된다. 각자의 역할에 충실해야한다.”
 

4대강 찬성, 반대 의견 포괄해 ‘신앙공동체’ 이뤄야
 
-그러면 환경문제건 평화문제건 교회는 관심을 갖지 않고, 무관심해야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불교신자든, 그리스도인이든, 개개인은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 정치적인 소견을 가지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전된 민주사회를 지향하는 길이다. 하지만 교인들이 모두 모여 있는 종교는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어떤 교회는 4대강 찬성하는 사람만 있고, 어떤 교회는 반대하는 사람만 있다면 그것이 교회이겠는가. 친목단체일 수는 있다. 교회의 가장 기본성이 보편성이다. 어떤 이념이든지 다 들어와 어울릴 수 있어야 한다. 로마 식민지인 유대에서 마태는 세리였다. 당시 세리는 매국노였다. 시몬은 열심당원이었다. 급진주의자다. 시몬의 입장에서 마태는 청산해야할 공적1호였고, 마태의 입장에서 시몬은 천하대세를 읽지못하는 철부지였다. 그들이 예수님 때문에 한테이블에 앉은 것이다. 4대강 반대나 찬성쪽으로 한목소리를 내는 게 아니라. 찬성하는 사람도,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할 사회를 이루어 신앙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이 교회가 지향할 바가 아닌가. 나도 개인적인 의견이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개인적인 의견을 드러내지 않는다.”
 
-사회적인 현안이기 때문에 교회가 침묵하고, 권력의 불의에도 눈을 감아야 하는가.
 “의나 불의의 문제일 때는 분명히 밝혀야 한다. 하지만 4대강은 선악의 문제라기보다는 우선순위나 정책의 문제, 관점의 문제다. 선이나 악, 의나 불의가 분명할 때는 말할 필요가 없다. 2차 대전에 끝나고, 드골이 프랑스의 대통령이 됐는데, 사임하고, 드골이 다시 국민의 부름을 받고 총리가 됐다. 좌우가 극심히 대립하다가 통합의 시대로 들어가는데, 드골이 한 말이  ‘나는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다. 나는 그위에 있다’고 했다. ‘나는 그 위에서 군림한다’는 교만이 아니고, 우파도 좌파의 대통령도 아니고 프랑스 모두를 위한 대통령이라는 것이었다. 4대강은 개개인이 판단할 문제이지, 단체의 목소리를 내는 것은 사회통합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여야에 대해서도 한 교회 목사는 수십년 동안 일관되게 한편만 들고, 강남의 모교회는 일관되게 반대편만 든다면 둘 다 문제가 있지 않은가.”
 

예수는 사람을 사람되게 하기 위해 오신 것
 
-예수 그리스도가 온 성탄절기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왜 왔는가.
 “예수님은 사람을 사람되게 해준 분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보면 흙으로 사람을 지었다고 했다. 하나님의 생기를 불어넣었다. 그래서 생영이 된 것이다. 흙과 호흡이 합쳐지면서 인간이 된 것이다. 죄로 말미암아 생기와 단절됐다. 예수님은 흙에 생기를 다시 불어넣기 위해 오셨다. 사람을 사람 되게 하기 위해서 오셨다. 공동묘지를 뛰어넘는 사람으로 생기를 누리는 생령으로 살게 한 것이니까 우리에게 복음이다. 어머니 태속에 있는 것을 태아라고 하지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다. 또 내 심장이 마비되면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시체라고 한다. 사람은 자기 코로 호흡하는 순간부터 호흡이 멎는 순간까지만 사람으로 본다. 인간의 호흡은 하면 할수록 늙어간다. 그리고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그 영혼을 호흡함으로써 사람답게 살게 된다.”
 
-지구상에서 제일 정신없이 바쁘고 스트레스 많이 받는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 아닌가.  이에 동의하는가. 그처럼 바쁜 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충분히 동의한다. 성탄은 주님을 믿든 믿지 않든 일년에 한번 자기멈춤의 시간이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지금 뭐하고 있는가. 어디로 가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자라고 하는데, 왜 구원자인가. 나는 구원의 삶을 살고 있는가. 자동차가 엑세레이터만 있으면 흉기다. 브레이크가 있어야 한다.”
profile